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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 시즌 4] 3주 후기 <신을 위한 변론> 제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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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젤라 작성일18-11-14 15:16 조회1,9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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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도끼에 두 번 발등 찍히고 싶지 않아!

 

 

카스 4. 카렌 암스트롱에 취하러 감이당에 첫 발을 내딛었다. 닐 암스트롱 아자씨가 달에 내디딘 그 첫 발자국 못지않은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천에서 독서모임을 하는 나는 다음 달에 볼 책이 고미숙님의 책이 여서, 토요일 감이당 홈페이지를 펼쳐보았다. 모집 중인 프로그램에 눈이 갔고, 신의 역사라는 책을 읽다가 던져두고 있어서 카렌 암스트롱에 꽂혔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10시부터라니, 급히 책을 주문하고 도서관을 뒤져서 빌려 읽었다. 전화로 문의한 감이당은 친절했다. 에라, 시작해보자.

 

실제로 고미숙 샘과 한자리에 하다니!!! 게다가 옆자리에 열하일기 공동작가, 길진숙 샘이 앉아계셨고, 이미지로만 접하던 공간속에 내가 있었다. 식사를 하자하고 산책을 하자하고. 서울 살다 인천으로 시집가서 20년만의 서울 충무로, 지도 들고 찾아온 내게 느닷없이 남산 산책로가 펼쳐진 것이다. 얼마 만에 바라본 서울 풍경인지. 먼저오신 분들께 물으니 최소 몇 년씩은 되셨단다. 나는 얼마나 이곳으로 향하게 될까!

 

1-2주는 자비를 말하다로 세미나를 했다. 제목은 말하다 이지만 행해야 하는 평생프로젝트로 12단계를 제시한다. 결국 몸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4F(내겐 F4가 익숙 ㅎㅎ)는 어디서나 강했지만 내 속에 있는 새로운 신피질을 스위치 온해서 맞짱떠 보리라. 자비와 공감 평생프로젝트, 일명 자공평프!

 

3주부터는 신을 위한 변론이다. 카렌이 자비를 말하는 것은 세상에 자비가 없어서 였을테고, 신을 위한 변론은 일단 신이 있다는 것 아닐까! 그게 궁금했다. ? 고백컨대 나는 세상이나 학교 그리고 부모님을 믿고 살다가 크게 한번 깨져봤다. 생명을 끊고 싶을 만큼. 어둠의 긴 터널을 통과할 쯤 종교에서 빛을 찾아 편히 숨을 쉬게 되었고, 방향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결혼도 하고, 가정이라는 것도 이루고 늘 부족하지만 부모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배신을 겪고 싶지 않다. 물론 다가오는 삶의 시간들을 덜 괴롭게 보내고 싶어서인 이유도 있다. 성서나 신앙공동체 속에서의 고마운 인연들에게서도 보아왔지만 이제 이곳에서도 찾는다. 나를 비워감으로서 얻는, 맞이하게 된 순간에 느끼게 되는 어렴풋한 그 무엇을.

 

1장은 호모 렐리기오수스 이다. 종교적 인간.

 

17000년 전 구석기시대 라스코동굴. 그 안에는 600점의 프레스코화와 1500점의 조각들이 있단다.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 그리 했을까. 자신들의 먹이가 되어준 동물과 하나 되어, 죽어가는 동물에게 영원을 불멸을 기려 불안감을 해소했을까? 성인 입문식 장소였을까? 논리적 과학적 사고가 없던 시대에 대해서는 신화로서 그 의미나 이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발제자는 매일 신성함을 느끼면 산다는 제목 하에 내 안의 신성을 깨우다종교핵심원리를 정리해 오셨다. 길 샘은 세미나에서 이란 첫째. 근원적 에너지로 법칙, 질서, 원리 등 지고의 신이였는데 현실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둘째. 현실적 고통 해결을 위해 인격신을 만들었는데 쓸모없는 신으로도 밝혀지기도 하고 바뀌어 감에 따라 인간은 찾아 헤매다가 셋째. 내 내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정리해 주셨다.

 

종교변화의 선봉에 있던 아리아인은 자아(아트만)을 찾기 위해 체계적 수련법을 개발하고, 그리스는 케노시스(자기비움), 공자는 , 부처는 아나타(無我)를 제시하였다. 종교는 관념적 활동이 아니라 실천적 활동이었다. 궁극적 실재는 교리로 정리될 수없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완전히 초월적인 실재였다. 정성껏 마음을 단련하고 남을 위해 자기를 버릴 줄 알아야만 이를 수 있었다.(68).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인간의 이성 너머에 있어 헤아리거나 벗어난 그 무엇 대신,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남을 위해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자기를 버릴 때 이를 수 있는 그 무엇인가보다.

 

2장은 신이다.

 

카렌은 신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교들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설명한다.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보기 드문 시도, 즉 야훼를 거룩한 자로 궁극적 초월성의 유일한 상징으로 만들려한 과정을 서술한다.

 

발제자는 이곳에서 공부하는 청년이란다. 진짜 예쁘다. 부럽다. 그는 함께 변해가는 신이라는 제목으로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갈망, 인간화된 신을 파괴하다 & 표현할 수 없는 신의 실재, 유배당한 신, 그리고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계시 로 발제문을 준비해왔다. 책 자체의 소제목들이 들어있다.

내게는 익숙한 내용이지만 안에서만 바라본 것을 밖에서 보는 새로운 시각이 있어 신선하고 흥미롭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이 겪은 역사 속에서 한낱 부족신에서 출발한 신을 체험(이집트탈출)으로 만났고 최고의 위기(바빌론유배)를 겪으면서 자기들의 정체성을 찾고 그 이유를 헤아리면서 기록(성서)으로 남기기 시작하고 뿌리(창세기)를 더듬었다.

 

자신들의 신을 야훼라고 부른 J(야휘스트계), 엘로힘으로 부른 E(엘로힘계) 이 두 기사들에 의해 쓰인 것이 서사로 합쳐져서 성서의 최초 토대가 되었다(74). 그들은 기원전 1850년경 야훼와 아브라함간의 약속부터 시작해서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즉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그 과정에서 신과 함께한 이야기를 펼친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예루살렘은 신이 머무는 곳이었기에 민족성지가 된다. 신명기 기자(D)들에 의해 새로운 서사가 덧붙여져 의인화된 야훼의 이미지로, 초월적인 엘로힘의 이미지로 수정된다(87).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빼앗겼다. 신도 유배를 당하니, 사제계(P)들 기사들은 자기들이 받은 성결법전(레위기)과 성막기록(민수기)을 엮어내고 율법사의 혁신(90)을 가져온다. 신은 언제 어디서든 그들과 함께한다는 그리고 신의 현존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적인 성전을 만들어낸 것이다. 유배자들은 타자성의 조건을 모사함으로써 신이 살던 성스러운 왕국(에덴동산)을 상징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자기들이 겪은 것들을 토대로 공감과 연민의 강력한 윤리적 요소(신성,91)를 강조하며 남과 같이 느낄 줄 아는 능력을 가지라는 것이다.

 

기원전 530년 귀환결정 후 성전재건을 하지만 많은 문제들에 봉착한다. 페르시아 궁전 필경사였던 에즈라는 야훼의 토라를 연구하고 율법을 행하도록 가르친다. 이방인 아내를 돌려보내라는 명령까지도. 사랑하라면서도 떠나보내야 하는 그들에게 성서는 신은 모순 속에 있었을 것이다. 사랑은 변한다가 아니라 신은 변한다 아니 신에 대한 해석이 바뀌는 것인가. 유대교의 성서해석(미드라쉬)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무언가를 탐구하다, 연구하다, 추구하다 라는 의미란다(99).

 

종교...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행해야 되는 것이다. 종교의 진실은 실천적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이다(머리말). ...한계 없기에 단정할 수 없다. 할 말이 없다. 언어 넘어서는 것이라, 그래서인가 침묵하게 된단다. 더 읽어보자. 암튼. 나의 이해에도 벗어난 것이고 내 표현에도 한계가 있다. 후기 쓰라고 해서 써 봤는데 말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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