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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세미나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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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성나무 작성일21-08-03 17:49 조회4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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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동행 수칙
 
오늘은 [고통은 나눌수 있는가] 후반부 세미나 시간이다. 
발제문 순서는 건우샘과 정원샘이고 다들 읽어보셨으리라. 
건우샘의 발제문에 대한 질문으로는 소연샘께서 건우샘과 미진샘처럼 장애인 관련일을 하게된 계기를 물었다. 건우샘은 지인의 소개로 일하게 되었다. 봉사가 아닌 직업으로서 보람도 있기에 일하고 있다. 그 전에 했던 직장생활 보다 의미와 만족이 크다. 미진샘은 그동안 했던 공연 관련 일의 연장 선이라고 생각해서 처음엔 보조강사로 시작했다. 해보니 흥미가 느껴져서 직업으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장애인들을 위한 일을 하다보니 장애인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문제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에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많은 공감이 되었다. 
그렇다면 고통의 당사자는 계속 고통을 이야기하고 경청은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들만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의 재희 어머니처럼 원망과 분노만 쏟아내는 것도 내 곁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나아가 고통에 함몰되어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는 것이다. 
고통의 당사자도 고통의 곁도 모두 고통에 함몰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 객관화이다. 
책에서 선아가 했던 걷기를 추천한다.걷기의 속도는 마음의 속도와 같아서 걸으면서 풍경을 바라보는 나를 느끼듯이 고통을 바라보는 나를 객관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암 환자도 자기 객관화의 과정을 거쳐야  병을 받아들이고 곁을 지키는 사람들과 일상을 살아 갈 수 있다.
더불어 읽기도 권하고 있다. 정원샘은 독서로 위로를 받은 경험을 나누었다. 읽기는 타인의 말에 경청 하겠다는 의지이다. 경청은 내가 틀릴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을 때 진정한 소통이 된다. 존 듀이는 삶이란 성장의 과정이라고 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에 경청해서 고통에 짓눌려 잃어버린 소통의 능력을 찾아 고통과 동행하는 삶을 받아들일때 나와 곁이 고통으로 인해 성장할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남자는 중풍으로 십여년을 누워 있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오랜 병 수발에도 명랑함을 잃지 않았는데 그 힘의 원천은 글쓰기와 소통이었다. 블로그에 자신의 이야기를 꾸준히 쓰고 댓글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객관화가 되면서 일상의 명랑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회적인 인정은 성과위주의 서열 규칙에 따르고 있다. 나의 성과가 사회적인 인정을 못 받을 때 생존의 위협을 넘어 존재감의 위기도 경험한다. 그 중에 하나가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다. 현대의 성형의술은 사고로 인해 기능을 상실한 부위에 대한 생활의 복원이 아닌 매체가 세뇌해 온 미의 기준을 복제하는 시장으로 변질 되었다. 미디어에서는 사회가 정한(?) 미의 기준에 못미쳐서 누가 가장 많이 삶이 파괴 되었는지 전시하고 그 또는 그녀를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IT위 발달로 인한 SNS로 우리는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자. 서로를 자기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을 우리는 일상에서 하고 있는가? 우정과 사랑도 불안하긴 마찬 가지다. 서로가 현존의 기쁨이 아닌 상대가 나의 성과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로 존재를 받아들인다. 이러한 가치관이 기반이된 관계 속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불안을 느낄수 밖에 없다.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인 고통으로 번지고 그래서 개인과 사회가 같이 무너질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강조한 인간의 복수성에 주목하고 있다. 개인은 하나의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나와 남이 만들어내는 모습이 사회가 되어 다시 나를 구축하는 복수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나를 알기 위해 타인의 이야기와 생각이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해상도가 높고 교양이 쌓인 글에서 우린 거울 보듯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나를 발견하고 인정할때 고통이 나의 성장이 될 수 있다. 사회를 향한 관심을 구걸하거나 상대를 대상화 하지 않고 현존하는 기쁨으로서 사랑과 우정을 누릴 수 있으며 고통의 당사자를 영원한 피해자로 만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글들을 서로 추천하고 읽고 써보자. 감이당의 오창희 선생님이 쓰신 책 [아파서 살았다]는 쓰기까지로 발전시키신 좋은 예이다. 


** 황제내경 (44,45,46편)
여러 병증의 세밀하고 구체적인 표현을 보며 우리는 우리 몸을 이 정도로 들여다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병원에 맡긴 몸이 아닌 내가 내 몸을 설명할 수 있도록 관찰하는 삶을 살아 보자. 우리는 경옥샘이 현재 쓰고 계신다는 몸 일기를 응원하고 자극을 받았다. 
특별히 오늘의 책 [고통을 나눌수 있는가] 와 연결되는 황제내경의 한구절이 있다. “슬픔이 지나치면 … 종종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옵니다. … 생각은 끝없이 하면서 바라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에서 슬픔은 음양오행적으로 보면 금 기운이다. 금 기운은 쌓이는 성질의 에너지인데, 이 에너지를성찰의 에너지로 승화 시킬 때 병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슬픔과 생각이 넘칠때 일수록 해상도가 높은 교양의 글로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궐증에서 열궐은 술과 관련이 깊다. 술의 기운은 성하고 날랜데 과도한 음주가 많은 열을 발생시키고 그 열로 인해 몸 안에 음양의 균형이 깨져서 위가 안좋아진다는 부분은 모두가 무릎을 치게 하였다. 
노하고 미치는 병(양궐노광)은 양기 과다의 위험성을 말해준다. 치료법은 음식을 줄여 양기를 돕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아프면 뭔가를 먹어서 낫게 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선 음식을 줄이라고 한다! 우리 몸은 전체적인 음양의 조화가 깨졌을 때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식습관에 치우침은 없는지 돌아보자. 감정을 관찰하듯이 몸에 나타나는 증상도 세밀하게  표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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