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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즉불통 시즌3] 4주차 감정의미래~p.133 발제(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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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원 작성일21-08-14 12:53 조회3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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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받은 온라인 세계에서 주체성을 발현하는 개인으로_(김다원)

 

 

 

당사자가 아닌 경우, 온라인에서 사건사고에 대한 토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상황) 퍼거슨 백인 경찰의 총격 사건 : 열여덟살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망 후 BLM(Blak Lives Matter) 운동 촉발

(언쟁) 저자가 경찰관의 무장을 해제하고 예방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 페이스북에 올림. 이후 동창이 긴 메시지를 보냄. 그는 현직 경찰로 일하고 있었고, 저자의 글에 경찰을 매도하고 있다며 편협한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함. 이에 저자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회적 구조를 이해하라는 답신을 보냄.

(결론) 메시지는 읽씹 당함. 이후 저자는 민망하기 짝이 없다고 고백. “그 친구 말대로 법을 진행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나는 몰랐고, 흑인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른다고 했던 내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우리 둘다 몰랐던 것이다. 그럼 우린 도대체 뭘 얘기한 걸까? 분노? 두려움? 존중? 자격? 공감?(p.12)”

 

인스턴트 메시지 - 과부화된 소통의 시도, 소셜 미디어 내에서 진정한 소통은 가능한가?

저자는 소셜 미디어가 진화하며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현상에 대해 설명한다. 인터넷이 보급화되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소셜 미디어는 단시간안에 폭발적인 기술 성장을 이뤄냈다. “기술이 변화하고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도 커지면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널리 알리는 범주의 사람들이 내게 접근할 수 있다. -다채로운 주제를 넘나들며 상대방의 글에 댓글을 달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p.12).”

물론 소셜미디어 비판론자들의 시각을 밝히며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그러나 저자는 삶의 대부분을 온라인과 함께 살아온 세대에게 기술을 통한 공감의 연대를 포기하는 것은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다(p.15)”고 말한다. 이는 저자의 의도가 분명히 밝혀지는 대목이다. 그는 현실적이고, 실리적으로 현 시대의 틀에서 어떻게 소통을 이뤄낼 수 있을지에 초점을 둔다. “, 공감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디스토피아적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적응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p.16)”

 

공감에 대한 의심 - 공감은 우리에게 실익을 가져다 주는가

저자는 공감에 대해 인지적공감(남의 정신 상태를 이해함)과 정서적 공감(타인의 입장에 서서 감정을 함께 나눔)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공감은 다른 사람과의 연대에 도움이 되며, 연인 사이나 아이를 키울 때, 그리고 남을 돌보는 일은 기본적으로 공감이 바탕에 있다(p.19)”고 밝힌다. 하지만 공감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긍정적 편향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정적 편향을 가지게 만들 수 있다는 시각도 소개한다(p.20). 공감을 의도적으로 활용시켜 다른 한 편이 소외되는 남용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공감의 가치를 재확인시키며, 필요성에 대해 꾸준히 언급하며 전개를 이어간다.

 

기술의 고도화 - 기술 발전과 소통의 질 향상은 양립할 수 있는가

기술 발전에 따라 인류의 소통도 발전했는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소통의 진정성에 대해 수치화하기 어렵지만, 누구도 확실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술발전과 소통의 질. 둘은 비례관계가 아니다. 저자는 예시로 스냅챗의 스트리크기능이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향상을 보이며 소셜 기술은 표면상으로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나, 실제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공감을 형성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p.22). 모순적이게도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든 기술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취약해진다(p.27).

 

대화가 게임인 세계1 - ‘온라인 전투를 시작합니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언제 누가 댓글 전쟁에 뛰어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규칙을 강요할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거기에 응하지 않으면 승리는 그들의 것이다.(p.44)” 이러한 현상은 대한민국 댓글창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포털사이트 헤드라인 기사, 개인 SNS, 최근엔 유튜브 채널에서도 댓글의 영향력은 어느정도 힘을 행사한다. 자본을 활용해 이를 수매하는 집단적인 움직임까지 있으니, 온라인 세상은 다른 의미에 본인 몫을 챙겨야 하는 전쟁터일지도 모른다. 이기고자 하는 욕망에 전염되어 상대방의 논리를 꺾고 싶다는 생각(p.45)은 온라인에서 더 발현되기 쉽다.

 

대화가 게임인 세계2 - 플레이를 잠시 멈추고 나와주시겠어요?

저자는 악플러를 오프라인으로 이끌고 나온 사례에 대해 소개한다. 작가 겸 유튜브 운영자 딜런 마론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 대화하기라는 팟캐스트를 통해 악플러들과 통화를 했다. 실제 전화연결이 되면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가다가 결국 서로를 응원하며 끝이 난다(p.53)”고 한다. 상대방을 직접 오프라인으로 끌고 나오는 형식은 흔히 셀럽들의 악플 읽기라고 알려져 있는 방법과 다르다. 일방적으로 댓글을 감당하고 흡수하는 형식이 아닌, 본인이 던진 말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누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p.59).

 

미래의 대화에 대비하기

저자는 소통을 도와주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가 가진 공감 능력도 더 강화돼야 한다(p.71)고 말한다. 이를 직업으로 삼고 공감 교육을 연구하고 진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2<공감을 떻게 가르칠것인가> 파트에서는 앱과 게임, 가상현실 체험으로 공감 교육을 하는 시도를 소개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집부터 몽골의 게르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의 주거 공간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탐험하며 배울 수 있는 어린이 교육용 앱이 있다. 카메라 접근을 허용하면 어린이가 작은 화면 속 집안의 거울 속에서 자기 얼굴을 보게 된다. 플레이어가 또 다른 장소를 경험하는 것이 이 게임(타이니밥의 ‘Home')의 핵심이다(p.87). 이론적으로 반사실적 사고를 하도록 훈련이 된다면 다른 사람의 경험도 상상하도록 훈련할 수 있다고 한다(p.98). 이러한 게임들에 대해 저자는 자신과 또래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거나 농담처럼 가볍게 넘긴 반면, 비슷한 게임 플레이를 희망하는 학생들의 숫자는 9000명이 넘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시도를 대하는 미래 세대의 접근법은 거침없다. 어른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접속하여 성장해 온 세대들, 또 앞으로 더 이 온라인 세계에 결속될 세대들에게 어떤 가이드라인을 세워줄 수 있는가. 이전 세대의 역할과 현 세대의 피드백은 상호교환 될 수 있을 것인가.

 

VR: 공감기계 -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러한 우려는 VR(가상현실)체험에서 더 구체화된다. “VR이 체험자의 공감을 유도할수 있다면 스트레스, 괴로움, 위압감, 탈진, 불안감과 같은 다른 감정은 물론, 기존에 트라우마가 있는 상태에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까지도 느끼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런 반응이 과연 긍정적일지 혹은 부정적일지에 대한 심리학계 및 기술업계의 논의는 치열하다(p.124).”

또한 저자는 가상현실을 통한 공감교육으로 인종차별, 성차별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역지사지를 그야말로 기계를 통해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고결한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른 사람의 삶을 잠시 엿보는 투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p.127) 것이다. 당연하다. 실은 이 지점은 비단 온라인에서만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다. VR체험이 아니더라도 훈련, 캠프 등의 오프라인 형식을 통해서도 우리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곁에 머물러보지만, 이를 나의 삶으로 끌어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책 속에 강인구 기자의 말처럼 타인의 입장이 된다는 건 기껏해야 그 상황을 이해하는 수준에 불과하다(p.129).

 

마지막으로 저자는 VR 계발과 관련한 책임자들의 임무에 대해 무겁게 이야기한다. “창작물이 창작자를 반영한다는 것은 진실이며, 기술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 예외일 리 없고 완벽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유용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술에 가치를 부여할 힘든 결정을 내리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그 힘든 결정은 이 책을 함께 읽은 우리도 함께 논의해야 할 지점이다.

 

못다한 이야기 - 내향인의 까똑 활용기

나는 휴대폰과 멀어지는 오프라인 라이프를 꽤 오랫동안 추구해왔다. 까똑은 내게 정말 어려운 매체다. 알아가기 시작한 이들과 처음에는 까똑을 해야한다. 계속 이어지는 까똑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머뭇거린다. 어쩌면 실없는 이야기. 계속 계속 이야깃거리를 내뱉어야 하는 까똑의 세상. 그 세상에서 나는 타이밍을 놓칠까 긴장한다. 상대방의 까똑을 받은 후 답신을 보내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허용되는가. 나처럼 말의 호흡이 빠르지 않은 사람에게 까똑은 모래시계를 눈앞에 놓여주는 것 같다.

그러니 평소에는 까똑의 핑퐁같은 속도감을 거부하고 주로 문자, 전화를 이용한다. 그러나 서로를 막 알기 시작한 관계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게 어렵다. 나는 도착한 엘레베이터를 두고 문이 닫히는 걸 보는 것처럼, 답장할 타이밍을 놓치고 늦은 답신을 보낸다. 이 지점이 상대방에게는 무례가 되어, 나의 언어와 대화법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나는 할 말이 없으면 말이 없는대로 두는 편이다. 무리해서 내뱉은 언사로 오해를 쌓고 싶지도 않고 내향적인 성향을 자연스럽게 두고 싶어서다. 특히나 사회생활에서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 그래왔다. 그동안 말을 아끼는 건 내게 실보다 득을 가져왔기에, 여전히 이 포지션이 편하다. 그래서 나와 같은 유형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 책을 읽었는지 궁금하다.

새롭게 맺는 관계에서 <연락>은 어떤 수단이 되는가. 이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까똑의 세계에서 연락은 어떻게,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가. 우리가 연락하는 이유는 만나지 못하는 순간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닌가. 공간적으로 당신 곁에 없다 한들 나는 당신을 생각하고 있노라, 나의 삶 반경에 당신이 포함되어 있다며 알리는 거 아닌가. 그 과정 없이 신뢰를 요구한다면 도둑놈 심보인가.

 

까똑보다 문자가 더 좋고, 문자보단 목소릴 들을 수 있는 전화가 좋다. 그럼에도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 가장 좋다.” 스무살 즘 먼저 이렇게 표현해준 선배가 있었다. 나는 이 말을 틈틈히 인용하고 다녔다.

 

대면하지 않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과 실이 양립한다. 깊게 나아가 온라인 매체의 보급화가 정말로 우리 사회를 보다 평등하게 만들었을까 되짚어본다. 지난 미디어의 역사는 매체를 발전시키기에 몰입해 성공했으나,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논의하거나 교육하지 않았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넘쳐나고 분별력을 발휘할 수 없게끔 오픈 페이지가 설계된다. 대중의 심리를 조정하기위해 밤낮으로 연구하고 회의하는 팀들이 넘쳐난다. 오프라인에서의 상위그룹들은 온라인에서도 비슷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지금도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이럴 때에 우리가 갖춰야 할 온라인 소통의 기준이라는 게 있을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숙명을 거쳐야 한다면, 울며 겨자먹기가 아니라 유쾌하게, 경쾌하게 동행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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