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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7주차 수업후기
 글쓴이 : 준희 | 작성일 : 19-06-27 13:24
조회 : 395  

이문희 샘 루쉰

루쉰의 삶을 중국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해서 이야기하겠다. 이를 통해 외침에 나오는 소설 14편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 루쉰 집안은 양무파를 지양했다. 이 시기 청나라 지식인층은 황실을 사수하려는 수구파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입헌파, 민주공화정을 주장하는 혁명파 등으로 나눠진다. 1898, 루쉰은 어머니가 준비해준 8원을 가지고 남경에 있는 강남 수사학당에 입학한다. 집안 어른들은 여기가 양무파가 운영하는 학교인 줄 알고 보냈는데 사실 여기는 입헌파들이 변법자강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학교였다. 루쉰은 변법자강운동에서 추진하는 일본 유학생으로 발탁되어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쑨원(손문)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루쉰은 장타이엔과 혁명파 동맹회와도 교류하면서 광복회에서도 활동한다. 루쉰의 도쿄유학 시절은 봉건주의 부르주아와 개량주의에 반대하는 사상을 키우는 시기라고 보인다.

유학을 통해 세워진 사상을 루쉰은 문예지에 글을 올리는 문예활동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문학을 무기로 하는 애국주의 운동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09, 루쉰은 집안 사정으로 일본 유학을 접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의학전문학교를 중단하고 중국으로 돌아온 루쉰은 러시아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러시아 여자에게 러시아어를 직접 배우면서까지 루쉰은 억압받는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 혁명을 이뤄냈는지에 관해 공부한다. 러시아 문학을 비롯해 여러 공부를 하면서 루쉰은 서구의 의회제도 자체가 혁명이나 계몽이라기보다는 관료들이 갖고 있는 자리를 국회의원들이 나눠 갖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 루쉰은 봉건 통치자나 부르주아의 개량주의자들, 의회를 주장하는 사람들까지도 비판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은 산업 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진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실제적으로 루쉰이 경험할 수는 없었다.

귀국 후 루쉰은 항저우에서 학교 교원으로 근무한다. 이듬해인 1910년에는 고향 사오싱으로 돌아와 중학교에게 근무하다 초급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이 당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이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루쉰은 자신은 어떻게 혁명을 할 것인가에 대해 선택한다. 그 길은 문학을 통한 문예활동이었다. 민중들의 의식을 계몽시키겠다는 자신만의 사상과 혁명을 연결하는 길을 마련한 상태에서 루쉰은 신해혁명을 맞게 된 것이다. 외침(1923년 출간)에 수록된 소설 대부분은 신해혁명의 과정과 신해혁명 후에 나타난 중국의 현실을 해부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곰샘 코멘트>

혁명을 교과서에서 배울 때는 지도자들이 치밀하게 준비해서 일어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발적인 마주침이 겹쳐져 일어난다. 중국 근대사를 보면 계획적으로 준비한 봉기는 실패하고 전혀 준비가 없었던 우창봉기는 순식간에 들불처럼 펴져나갔다. 이것이 때가 허락해야 가능한 시운이다. 쑨원의 행보, 위안스카이의 죽음과 군벌의 등장, 국공 합작 등 루쉰은 격동의 시대를 보낸다.

루쉰이 혁명을 냉철한 시선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과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진화론, 의학, 생리학, 식물학 등의 공부로 냉정하게 대상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 장타이에게 배운 중국 불교와 중국 고전은 혁명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힘이었을 것이다. 사회가 어지러우면 대개는 사회학이나 정치학 쪽으로 혁명의 명분을 만들려고 한다. 이전의 양무파나 변법자강파들은 이런 행보를 걸었다. 그러나 루쉰은 그런 공부를 한 적이 없다. 중국인들을 들여다보니 체제가 무엇이 됐든 온 정신이 마비된 채로 썩어 있다. 광인일기를 비롯해 외침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대부분은 관습에 쩔어 있는 민중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민중이 주인이면 민중들이 각성된 상태여야 하는데 루쉰이 보기에 민중들은 전부 철방에 있는 상태다. 이 지점을 직시하는 것이 다른 혁명가와 루쉰의 차이점이다. 루쉰은 진짜 혁명을 꿈꿨다. 진짜 혁명은 봉기나 암살, 시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이 바꿔야 한다. 그러려면 정신이 개조되어야 한다. 자연과학과 해부학의 관찰법과 역사 전체를 가로질러 인간이 어디에 예속되어 있는지를 깊이 사유하는 힘으로 루쉰은 새로운 소설을 쓸 수 있었다. 글의 초점을 루쉰이 본 혁명, 즉 부조리하고 어처구니없고, 희망이 어그러져도 지속해서 희망을 갖게 만드는 혁명의 실상과 루쉰의 학문적인 방법론을 명료하고 디테일하고 찾아내서 연결하여 외침에 나오는 인간에 대해 분석을 하면 된다.

오찬영 허먼 멜빌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사상적 변화와 변곡점을 통해 허먼 멜빌(1819.8.1~1891.9.28)의 개인적인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허멘 멜빌의 소설은 모비딕(1851)을 기점으로 전반부 작품과 후반부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작품(TYPEE, OMOO, Mardi-Redbam, white-jacket)은 해양모험 소설이다. 부잣집에서 자란 멜빌은 13살 때 갑자기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게 되고, 아버지가 일 년간 정신병원을 앓다가 사망하자 소년 가장이 된다. 멜빌은 몰락한 가정의 생계 부양을 위해 온갖 잡일을 하다 배를 타게 된다. 처음에는 상선, 다음엔 포경선, 마지막으로는 미국 해병에 입대해 수경선을 탄다. 멜빌은 수병으로 복무하다 25살에 제대한다. 이후 뉴욕으로 돌아와 27살에 처음 쓴 작품이 <타이피 1846>. 폴리네시아의 식인종이 나오는 <타이피>와 다음 해에 쓴 <0M00>는 독특한 소재로 큰 히트를 친다. 이 소설의 이야기들은 실제로 멜빌이 폴리네시아에서 겪은 일이었다.

19C 미국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미국만의 문학을 원하는 예술적 욕구가 일던 시기였다. 현재 내로라하는 미국의 많은 지성 작가들이 이 시기에 배출된다. 멜빌도 데뷔작으로 미국 문학을 이끌어갈 유망한 인재로 떠오른다. 이 지점에서 멜빌의 범상치 않음이 드러난다. 멜빌은 나는 좀 다른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구가 들끓는 청년이었다. 그는 독자들이 열광하는 식인종 이야기를 계속해서 쓰기보다 폴리네시아에서 직접 목격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예를 들면 야만인들이 문명민보다 훨씬 우아하고 친절하며 열린 생각을 하는 자들이었고, 반면 백인 선교사들은 잔인함과 폭력으로 원주민을 대하고 있었다. 멜빌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과연 문명인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멜빌은 1849년 발표한 세 번째 소설(Mardi-Redbam)부터는 자신이 쓰고 싶었던 철학과 사상, 항해를 하면서 직접 목격한 세상, 자기만의 문체들을 실험하게 된다. 이때부터 멜빌의 추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851년 발표한 <모비딕>으로 멜빌의 추락은 더욱 가속화된다. 멜빌은 끝내 대중들의 인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완전히 잊힌 채 72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멜빌이 쓰고 싶은 소설의 방향과 대중들이 원하는 소설의 방향이 너무나 달랐다. 그럼 이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을까? 나에게 재능은 있는 걸까? 슬럼프에 빠진 멜빌에게는 부양할 가족이 8명이나 있었다. 해소되지 않는 예술적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 멜빌에게 1850, 14살이나 많은 나다니엘 호손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뒤집어 놓았다. 호손은 멜빌에게 멜빌 자신의 철학을 글쓰기로 구현할 수 있는 문학적 영감을 주었다. 키도 크고 강골이었던 멜빌과 태생적으로 음울하고 내성적인 호손이 전혀 다른 신체를 가졌지만 둘은 사상적으로나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들이 일치하면서 정신적인 소울메이트가 되었다. 멜빌은 호손의 <주홍글씨>를 보면서 금욕이나 관습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증오, 질투, 분노, 위선들이 무거움을 전복시킬 수 있는 열쇠로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영감을 받게 된다. 멜빌은 자신이 그동안 탐구했던 철학이나 예술적 지평선을 이런 식의 문체적 표현을 통해서 구현될 수 있을 거라는 답을 찾게 된다. 이에 <모비딕>의 집필 방향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이후 멜빌의 후반부 작품에는 크게 3가지의 특징이 나타나게 되는데 첫 번째는 <모비딕>의 흰고래처럼 고귀한 존재가 등장한다. 두 번째는 고귀한 존재를 인식하는 존재가 등장하며, 마지막으로 멜빌의 작품들은 모두 비극으로 결말을 맺는다. 멜빌의 삶과 작품을 통해 멜빌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멜빌의 비판적인 시각이다. 미국은 민주주주의 가치가 정말로 잘 이뤄지고 있는가? 근원적으로 민주주의에는 고귀한 자가 존재할 수 없다. 제도와 거대 언론 등 중앙집권적인 민주주의에서는 개인은 오직 자신속으로 만 침잠한다. 결국 고립된, 이성을 가진, 합리적인 시민상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개인의 위상이다. 멜빌은 민주주의의 명암(明暗)()’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두 번째는 에이허브의 캐릭터다.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에이허브는 계속해서 악의 화신으로 해석된다. 유럽에선 에이허브가 히틀러가 되고, 현재의 미국에선 트럼프가 된다. 이처럼 정치에서는 민주주의를 해방하는 정신 나간 선동가들로, 또 경영학에서는 조직에서 에이허브 같은 독재자를 만났을 때 어떤 조직원이 되어 이를 저지시켜야 되느냐 등으로 해석된다. 나는 <모비딕>을 읽으면서 에이허브의 캐릭터에 일종의 스파크를 느꼈는데 이런 식의 에이허브 해석에 혼란스럽다. 멜빌은 야상적인 사고와 원시인적인 감각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멜빌은 그의 삶과 글이 완전히 일치했음을 보여준다. 에이허브를 보면서 니체가 많이 생각났다. 초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니체를 만나야하고, 초인들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고 몰락하는지 알고 싶다면 멜빌을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곰샘 코멘트>

작품을 통한 멜빌의 인생사 스토리는 잘 구성됐다. 고귀한 존재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민주주의는 평균적 속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고귀한 것은 없애야 된다. 비천함을 벗어난다는 것은 경제적 상승을 통해 속물적 교양인이 되는 것이다. 원래 우리가 생각한 민주주의는 모든 존재가 고귀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귀한 자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고, 비천한 자는 속물 교양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시민, 국민으로 대변되는 중산층은 교양어를 쓰면서 매너를 갖추었지만 자기 안에 있는 고귀함과 비천함 사이의 대결이나 투쟁은 다 감추고 위장하는 존재다. 예술적인 철학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굉장히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다. 니체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와 떼어놓을 수 없다. 초월적 존재인 신을 믿는 그들은 인간들이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중세부터 이어진 기독교와 자본주의 결탁은 근대에 와서 여러 가지 스타일로 사람들을 예속한다. 마크 트웨인(허클베리 핀)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호손은 성의 금욕주의 허구성으로 이를 비판한다. 이와 다르게 멜빌은 인간 안에 있는 야만성을 고래나 수탉 등의 동물로 비판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미국 초기 근대의 시대적 흐름만 더 보충하여 멜빌이 추구했던 인간 안의 야생성에 좀 더 집중해봐라.

 

이세경 들뢰즈와 가타리

저자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 책은 685월에서 온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듯이 <안티 오이디푸스>의 중요한 출발점은 68혁명이었다. 또 하나는 1969년에 이뤄진 들뢰즈와 가타리의 만남이었다. 사회의 대변혁을 일으킨 68혁명은 19685, 소르본 대학에서 학생들의 봉기로 일어났다. 그러나 68혁명의 시작은 322일 낭테르 대학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기숙사 출입문제도 있었지만, 밑바탕에는 낭테르 대학의 상황이었다. 1958년 우파인 드골이 집권하면서 고급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갑자기 대학교들이 신설된다. 빈민가에 위치한 낭테르 대학도 학생 수가 10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늘어난 학생 수에 비해 교육여건은 여전히 열악했다. 당시 2~3여년에 걸친 공사로 완성된 수영장 오픈식에서 한 학생이 교육부 장관에게 “300페이지에 달하는 당신의 교육에 대한 보고서를 읽었는데 어떻게 청년의 성 문제는 한 줄도 없는 거죠?”라는 질문을 한다. 당황한 장관이 자네는 진짜 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네. 저기 수영장에나 뛰어들지 않겠나?”라고 대답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굉장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이는 학교의 열악한 환경 등 여러 문제들이 더해지며 학생들의 봉기로 이어졌다. 봉기는 프랑스의 베트남 참전 반대 등 세계적인 문제로 확대되며 소르본 대학으로 옮겨간다. 처음 학생문제로 시작되었지만, 학생들을 향한 폭력적인 드골 정부의 진압과정이 TV로 중계되면서 노동자 운동으로 번지게 되고 시민들도 참여하면서 걷잡을 수 없게 퍼지게 되었다. 이후 여성의 인권, 동성애, 이민자 등 기존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게 된다. 68혁명이 기존의 혁명과 다른 점은 지도자나 조직 없이 개별적으로 일어난 운동이란 점이다. 자유, 박애 등 거대 이념이나 권력의 쟁취가 목적이 아니라 지금 당장, 오늘의 일상에 관심을 갖자는 것이다. 당시 대학교들은 다 개방되었고 사람들은 다 같이 모여 자유롭게 소통하며 축제처럼 퍼졌다. 드골이 했던 “5월의 사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말은 68혁명이 어떤 운동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68혁명 당시 들뢰즈는 리옹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들뢰즈는 68운동에 참여한 유일한 철학과 교수였다. 들뢰즈는 철학과 교수였지만 실천이나 혁명에 많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가타리는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정신분석을 하는 보르도병원에서 심리분석을 담당하는 의사였다. 10대부터 공산주의운동이나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아서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했는데 가타리 역시 낭테르 대학의 시위에도 참여했다. 혁명이 끝나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당면했지만 풀지 못했던 68혁명의 문제들에 대해 궁금증이 남았다. 들뢰즈는 사람들은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왜 다시 예전의 예속적 상황으로 돌아갈까? 철학자로서 나는 뭘 해야 할까하는 고민이 있었고, 가타리도 23살부터 15년 동안 보르도 병원에서 근무하며 라깡의 구조주의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관심사가 비슷했던 두 사람은 보르도병원 의사의 소개로 19696월 만나게 된다. “들뢰즈는 번개였고 나는 피뢰침이었다라고 가타리가 말할 정도로 둘은 서로 잘 통했다. 많은 아이디어를 가졌지만 이를 소통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지 못했던 가타리와 철학적 지식과 역사적 지식을 가지고 있던 들뢰즈, 두 사람이 만나 안티 오이디푸스가 시작된다.

<곰샘 코멘트>

68혁명이 기존 혁명의 틀을 벗어났다고 말하는 지점, 실존주의나 구조주의의 철학적 인식론을 흔들어버리는 지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맹렬히 비난하는 지점, 전혀 새로운 쓰기 방식, 기계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현방식 등 안티 오이디푸스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 이 중 어느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 글을 쓸 것인가? ‘의미에 집중하면 거대하고 집단적인 기호체계에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혁명도 국가단위, 민족단위, 계급단위, 이런 식으로 해야만 혁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68혁명은 이런 것으로 포획할 수 없는 혁명이다. 그러기에 드골이나 공산당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욕망이 분열적으로 일어나고, 지도자도 없는 등 혁명의 성격이 기존의 의미망을 벗어났다. 각자의 현장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이웃과 접속을 하니까 사회가 변혁된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이 시도하는 방식과 같다. 촉발되면 퍼지고, 이는 어떤 의미로도 환원이 안 된다. 이런 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금 세대와 감성적으로 맞는 것 같다.

68혁명은 의미화가 아니라 표현하는 방식, 스타일이 바뀐 것이다. 또한 기존의 인식론을 깨는 것이다. 각자가 의미 권력에 억압되었던 것이 터져 나오면 각자 다른 노래가 터져 나온다. 문제는 접속을 해야 한다. 접속해서 촉발이 이어지면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간다. 이렇게 되는 것이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68혁명은 이런 혁명이었고, 여기에 맞는 형식으로 두 사람이 글을 쓴 것이다. 사실을 나열해서 쓰지 말고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라. 혁명과 산출과정, 저자의 인생역정. 이 중에서 내가 어떤 것을 편집할 것인가? 이것이 사람마다 달라야 한다. 나의 문제의식에 따라서 스토리가 들어가야 한다. 지성의 핵심은 편집이다. 편집에서 독창성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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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세경   2019-07-04 12: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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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놀라울만큼 성실한 후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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