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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백수를 위한 길위의 인문학>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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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09-24 09:55 조회7,422회 댓글0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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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린 천하장사이자, 말타기와 검술의 달인, 한 시대를 풍미한 화적패의 수괴였던 임꺽정을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한 단어로 정의한다. ‘백수’. 서른다섯의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남자’ 그가 바로 임꺽정이다.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구들 역시 백수다. 매여 있을 곳도, 매여 있을 필요도 없는 그들은 자연스레 길 위로 나선다.

그 길에서 친구와 스승을 만나 신나게 놀고, 사무치게 배운다. 밀당이고 뭐고 없이 연애와 결혼도 화끈하게 해치운다. 백수라서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늘 길 위에서 낯선 존재들과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낸다. ‘박사실업자’ 출신의 ‘본투비’(born to be) 백수인 저자 고미숙은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 이 사실을 발견한 순간, 한때나마 가지고 있었던 ‘백수로서의 자의식’을 한방에 날릴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 청년백수들이 청석골 칠두령의 배짱과 의기를 터득할 수 있기를. 부디 갖바치의 눈부신 비전과 지성에 접속할 수 있기를. 무엇보다 밥과 우정과 유머로 이어지는 ‘달인들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세상에 내놓은 책이 이 책 『청년백수를 위한 길 위의 인문학 : 임꺽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이하 『길 위의 인문학』)이다.

* 이 책은 2009년 출간되었던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의 개정판본입니다.




머리말

1장 길 위의 경제 : 청년백수와 직업

노는 남자들|과객질과 무명|‘사돈의 팔촌’- 핏줄과 경제|우정의 경제학 - 잃어버린 낱말을 찾아서|약탈과 공생, 그 어울림과 맞섬|백수는 미래다!

2장 길 위의 배움 : 청년백수와 공부
‘배우는’ 남자들|배워서 뭐하나?- 아무 이유 없다!|‘백수’에서 ‘달인’으로!|이야기와 서사, 달인들의 공부법|스승과 제자, 냉정과 열정 ‘사이’|앎, 축제 혹은 평상심

3장 길 위의 우정 : 청년백수와 친구
‘솔직한’(?) 반역자|친구가 뭐길래!-우정과 인생|싸우면서 ‘정분’ 난다!|이야기는 ‘힘’이 세다!- ‘말잔치’|의형제, 피보다 ‘찐하고’ 연인보다 더 ‘에로틱한’

4장 길 위의 에로스 : 청년백수와 사랑
이 ‘풋풋한’ 사랑 - 청년 꺽정이|길 위의 사랑 - 충만한 신체, 충만한 대지|“너는 내 운명”- 일편단심 민들레들|사랑 따윈 필요 없어! - 곽오주|귀신도 못 말리는 열애 - 봉학이|‘이 죽일 놈’의 사랑 - 배돌석이|‘여인천하’ 혹은 위풍당당 그녀들|에로스와 유머 - ‘젖의 보학’

5장 길 위의 가족 : 청년백수와 결혼
데릴사위, 불안한 정규직|장모님은 아무도 못 말려!|카사노바와 조르바 ‘사이’- 중년 꺽정이|세상에서 제일 ‘자미난’ 부부싸움

6장 길 위의 복수 : 청년백수와 원한
복수의 두 가지 코스 : <괴물>의 ‘박강두’와 <밀양>의 ‘신애’|복수의 화신 1-“개호령을 겁낼 내가 아니오”|복수의 화신 2-“호랭이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주십시오”|복수의 화신 3 - “집안을 도륙내주십시오”|소인배들의 초라한 말로-자업자득!

7장 길 위의 존재 : 청년백수와 독립
꺽정이, “극히 천하구 극히 귀한”|반역과 객기 ‘사이’|원초적 동력, ‘자존심’|‘홀로서기’ - ‘가출’하거나 ‘출가’하거나!

8장 길 위의 공동체 : 청년백수와 조직
갖바치의 ‘코뮤니티’-낯설고도 특이한|청석골, 난민촌 혹은 ‘인디언 공동체’|‘도중회의’-축제와 유머|전략 1 - 잠행과 변신|전략 2 - 엑스피드|움직이는 요새 - 동번서번!|소설 『임꺽정』과 노마디즘이 만나면?

부록
『임꺽정』의 사상|라디오 스타:‘이주민’들의 접속과 변이|『임꺽정』 등장인물 캐리커처|『임꺽정』 인물관계도






“꺽정이는 요즘말로 치면, ‘비국민’이다. 그런데도 절대 기죽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다. 양반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저항만이 아니라, 그런 가치들을 훌쩍 뛰어넘는 자유를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정말 ‘감동먹었다’. 천민에다 백수면서도 이렇게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다니. 따지고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조선의 선비들도 그렇지만, 그리스 시대에도 자유인은 직업이 없는 이들이었다. 정규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바로 노예였다. 평생 한 가지 직장과 노동에 붙들려 있는 것, 그것이 노예의 저주받은 숙명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정규직을 열망하는가? 과연 그게 자연스러운 생존본능일까? 백수는 임금노예인 정규직을 얻지 못해서 안달복달하고, 정규직은 언제 거리로 내몰릴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그래서 결국 백수나 정규직 모두 노예가 되어 버리는 이 기막힌 현실! 이 모순과 부조리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들에게 꺽정이와 그의 친구들은 말한다. 제발 그렇게 삶을 방기하지 말라고. 자기 자신을 좀 믿어 보라고. 길 위에도 얼마든지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존재한다” (인트로, 「‘집의 시대’에서 ‘길의 시대’로」 중에서)
“근대 이전은 구술문화의 시대다. 모든 것이 구술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시절, 이야기는 소통의 수단이자 오락이요 예술이었다. 또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우리 시대는 서사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서사적 본능을 망각해 버렸다. 자신의 일상, 자신의 인생, 자신의 배움이 모두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것이다. 동시에 청각도 잃어버렸다. 청력 자체도 현저히 떨어졌지만 경청의 힘을 익히려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속내와 인생역전을 멋들어지게 이야기할 줄도 모르지만, 남의 사연을 허심탄회하게 들을 줄도 모른다. 결국 남의 이야기는 드라마와 예능을 통해 엿보고, 자기 이야기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상담사, 아니면 종교인들에게 털어놓는다(이런!). 임꺽정과 그의 친구들을 보면 서사와 경청이 하나의 능력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매혹적인 교량이라는 것도.
공부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하려면 판이 벌어져야 하듯이, 공부를 하려면 반드시 ‘터’가 있어야 한다. ‘스승과 도반道伴 함께 도를 닦는 벗, 도량道場 수행처’이 있는 터. 터는 넓을수록 좋다. 그 배움‘터’들의 네트워크, 거기가 바로 백수지성의 산실이다”(본문 2장 ‘길 위의 배움 : 청년백수와 공부’ 「이야기와 서사, 달인들의 공부법」 중에서)


최근작 : <청년백수를 위한 길 위의 인문학>,<나는 누구인가>,<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 총 78종 (모두보기)
인터뷰 : '수유+너머'를 듣기 위해 고미숙을 만나다! - 2004.04.02
소개 :
고 전평론가. 1960년 강원도 정선군 함백 출생. 가난한 광산촌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신 부모님 덕분에 박사학위까지 무사히 마쳤다. 대학원에서 훌륭한 스승과 선배들을 만나 공부의 기본기를 익혔고, 지난 10여 년간 지식인공동체 ‘수유 + 너머’에서
좋은 벗들을 통해 ‘삶의 기예’를 배웠다. 덕분에 강연과 집필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1년 10월부터 ‘수유 + 너머’를 떠나 ‘감이당’(gamidang.com)과 ‘남산강학원’(kungfus.net)에서 활동하고 있다. 감이당은 ‘몸, 삶, 글’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인문의역학’을 탐구하는 ‘밴드형 코뮤니타스’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열하일기 삼종세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전2권)과 달인 삼종세트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동의보감 삼종세트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근대성 삼종세트 『계몽의 시대』, 『연애의 시대』, 『위생의 시대』, 그리고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윤선도평전』 등이 있다.

고미숙의 한 마디
“백수는 더 이상 특별한 존재조건이 아니다. 인간이 밟아야 할 자연스런 스텝 중의 하나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결국 백수로 태어나 백수로 가는 것, 그게 인생 아니던가. 그걸 깨우치는 순간, 백수는 자유인이 된다. 자유를 위한 ‘삶의 기예’, 그것이 백수의 인문학이다 …… 하여, 나는 소망한다. 우리 시대 청년백수들이 청석골 칠두령의 배짱과 의기를 터득할 수 있기를. 부디 갖바치의 눈부신 비전과 지성에 접속할 수 있기를. 무엇보다 밥과 우정과 유머로 이어지는 ‘달인들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기를.”



<청년백수를 위한 길 위의 인문학> 저자 인터뷰
― 백수라도 괜찮아! 길 위에서 만들어지는 우정의 네트워크만 있다면!

1. 책 제목이 『청년 백수를 위한 길 위의 인문학 : 임꺽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입니다. 책에서는 ‘길 위의 시대’가 열렸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왜 '길 위'인지, 또 백수와 길 위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21세기는 디지털 문명의 시대고, 디지털은 항상 유동하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도 끊임없이 이동하는 거죠. 그러면 집, 학교, 직장, 교회…… 이런 식으로 딱 고정되어 있던 장소들이 이제 굉장히 많이 흔들리게 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늘 길 위에 있고 싶은 그런 흐름을 갖는데, 거기 가난한 백수들도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실제로.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학교를 가고, 직장을 갖고, 집을 장만해서 거기서 알콩달콩 오래오래 산다 이런 식의 삶의 리듬이 깨진 거죠. 고정된 것들이 해체되면서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이동을 하게 됐는데, 그게 바로 집에서 길의 시대로 변주됐다는 그런 뜻이죠.
청년백수는 너무나 일반적인 현상이고, 인생 전체를 봐도 중년에도 언제든지 백수가 되고, 정년까지 버텨도 또 백수가 되니까 청년백수라고 하는 이런 시절을 너무 좌절하거나, 자기가 인생의 실패자다,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인생이 백수로 태어나서 백수로 끝난다면 청년백수 시절에 자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고 익히면 청년기도 잘 통과할뿐더러 나중에 직업을 가졌다가 자기가 뭔가 인생을 바꾸고 싶을 때도 당당하게 또 길 위에 나올 수 있는 이런 것들이 가능한 시대가 아닐까. 그래서 특히, 제목을 청년백수를 위한 길 위의 인문학, 이렇게 짓게 된 거죠.

2. 『임꺽정』의 칠두령들은 모두 백수인데도 콤플렉스가 없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요즘 청년들은 스펙에서 조금만 빠지는 게 있어도 그게 자존감이 낮아지는 이유가 되고, 또 외모도 그래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수술을 하곤 하는데요. 어떻게 하면 칠두령들처럼 청년백수들이 '백수'임에도 콤플렉스에 빠지지 않고, 자존감 있게, 나아가 진정한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쓸쓸하고 그런데……. 청년기란 건 인생의 봄이잖아요. 그러면, 그 시절은―모든 시절은 돌아오지 않지만,―그때 경험해야 되는 고유한 리듬과 파동이 있는데, 그게 획일화가 돼서 몰개성화되는 게 일단 너무 안타깝고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될수록 다 콤플렉스와 트라우마가 커진다는 것도 아주 역설이에요. 예전에 제가 청년기였을 때에 비하면 (지금 청년들은) 외모나 모든 면에서 너무너무 업그레이가 된 거예요. 완전히 인종개량이 된 것 같거든요. 그때는 키가 170만 넘어도 킹카였으니까(). 지금은 뭐 너무 쭉쭉 빠졌고, 외모도 그렇게 피부가 좋은 청년이 있었을까, 싶어요. 다 여드름투성이였고. 요즘 보면 피부병환자라고 했을 만큼 울퉁불퉁했는데, 오히려 그때가 더 여유 있고, 더 당당했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뭔가 부족해서 그걸 채워야겠다, 고 하면 그게 왜 하필 다 외모로 가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걸로도 많이 채울 수 있잖아요. 목소리가 좋아진다든지, 말을 재미나게 한다든지……. 신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을 살릴 수 있는 다양한 기제가 있는데 다 얼굴을 판박이같이 만드는 걸로 (집중되어 있어요). 또 이제는 남녀가 똑같이, 그러니까 성형이 진화하다, 진화하다 이제 남성들도 다 하는 걸로 파고들었더라구요. 그러면 이제 남녀가 얼굴이 똑같아질 텐데, 앞으로, 이 사태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런데 만족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 이것도 또 굉장한 역설이에요. 그래서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그걸 향해 달려가면 모두가 다 상처투성이다, 이걸 다시 확인을 하게 됐어요. 개성이란 건 다 기준이 달라야 해요, 기준이. 그리고 청년기는 그야말로 개성이 막 들쭉날쭉, 울퉁불퉁, 좌충우돌, 이렇게 하는 시절인데, 이거를 왜 하나로 다 묶어 버리게 됐을까, 이게 너무 안타깝죠. 그러던 차에 『임꺽정』을 보고. 칠두령은 정말 인생도 가지가지고 사연도 외모도 뭐 모든 게 가지가진데 콤플렉스가 없다는 거, 이거에 너무 놀랐어요. 그래서 이 원리가 뭘까. 이거를 열심히 탐구를 했는데, 일단 첫번째는 칠두령은 다 자기 힘으로 뭘 해야 됐다는 거, 요게 핵심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돌봐주는 부모도 없고 사회에서는 아예 내팽개쳤고, 다 포기한 존재들이니까 자기 앞가림을 자기가 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는 되게 불쌍해 보이지만 자기가 한 가지를 하면 한 가지만큼 자존감을 가져요. 아무리 남이 주는 돈이 커도 자기가 번 돈 만큼의 만족감을 못 주거든요. 이것처럼 자기가 뭘 했을 때 인간은 뿌듯한 거예요. 그러니까 칠두령은 다 하나에서 열까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했던 것, 이것이 주는 당당함, 이런 게 있었죠. 그에 비하면 우리시대의 청년들은 뭐가 많이 부족하긴 한데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참 없다는 것. 그러다 보니까 과잉보호나 서비스에 익숙해지고 자기 힘으로 할 생각이 안 들게 된 게 아닐까. 이제 자기가 열심히 하는 건 얼굴을 바꾸는 일, 이런 거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복근을 만든다거나 이런 거요. 그거 말고도 굉장히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은데, 이 출구가 봉쇄돼 버린 거죠. 이것 때문에, 하는데도 자존감이 안 생기는, 하면 할수록 콤플렉스가 커지는 이런 역설이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칠두령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뭔가를 배워서 마스터한다, 이런 게 있었어요. (예를 들면) 봉학이가 활 연습하는 거. 아주 어린 시절에 활을 진짜 열심히, 그리고 남이 안 보는 데서 막 열심히 배우거든요. 그리고 가서 기도를 하고. 절에 가서 태조대왕처럼, 자기도 태조대왕의 핏줄을 쪼끔 이어받았거든요, 쪼끔. 몰락한 왕족이지만……. 태조이성계는 정말 활을 잘 쐈어요. 그래서 활을 잘 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사실 이거를 잘해서 뒤에 영광이 오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걸 가지고 뭐 장학금을 받는 것도 아니고 금메달을 따는 것도 아닌데, 요렇게 하는 과정에 자기가 너무 삶이 재미지고, 충만했던 거죠. 그러니까 고런 마음이 그 청년들에게 무한한 자존감을 준 게 아닌가.
그리고 유복이 같은 경우는 앉은뱅이가 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그때 표창을 던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는 바빠서 못하고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고 하지만 유복이 앞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요. 앉은뱅이가 돼서 궁둥이로 이렇게 왔다갔다하고, 간신히 조팝이랑 강냉이로 끼니를 때우고. 근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하루 종일 마당에 앉아가지고, 옛날에 표창 던지던 게 생각나서 그거를 하잖아요. 칠두령은 정말 훌륭한 미덕이 있는 게 어디 가서든 진심을 다해서 배운다는 거, 아무런 대가가 없는데(도 배우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 길 위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힘을 준 게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대가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잖아요. 성적을 올리면 카드를 줄게, 금메달을 따면 어떤 대가를 준다, 이런 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대가가 없는 거는 아무것도 못하게 됐어요. 이게 정말 안타까운 거고. 대가 있는 것만큼 하려면 또 너무 많은 성취를 요구하니까 그땐 이미 질려 버리는 거죠. 이런 게 이제 청년들한테 알게 모르게 굉장히 치명적인 결핍과 상처로 작용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멘탈을 연습을 하다 보면 멘탈갑이 되긴 틀렸죠. 항상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거예요. 왜냐, 모두가 긍정할 만큼 하기는 너무 힘든, 그게 먼저 딱 보여요. 그러면 나는 못해, 이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멘탈갑이 되려면 타인의 인정과 대가라는 이 기준을 버려야 된다, 이거를 칠두령이 가르쳐 준 것 같아요.

3. 이 책을 읽다 보면 결국 백수는 우정의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정말 직업을 안 가지고 이렇게만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직업이 없으면 돈 벌 곳이 없는 거고, 그러면 살아가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 혹은 두려움이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있을 것 같습니다만....
: (선생님 자신 가리키며) 요기 있잖아요. 직업이 없이 이렇게 잘 먹고, 잘살고 있잖아요. 어떤 직장을 규칙적으로 다니는 이런 직업, 이게 20세기 내내 되게 중요했죠. 직장, 그러면 이런 거였는데, 근데 이미 재택 근무라든가, 프리랜서라든가, 프리터라든가 이런 식의 알바나 직업이 많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유동하는 직업이 많이 생겼다는 거죠. 어떤 순간에 일을 하다가 그게 끝나면 그냥 자유인이 되는 직장이 이제 많이 생겼죠. 그리고 앞으로는 이게 더 많아질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장소를 점유하고 사람을 모아서 평생을 끌고 가기에는 변화가 너무 크니까 그런 식의 직장은 유지하기가 이제 어려울 거예요. 그러면 필요한 만큼 돈을 벌고 그다음에 쉬고 싶을 때 쉰다, 이게 좋지 않습니까? 안 좋아요? 그래서 쉬는 동안은 내가 정말, 정말로 하고 싶은 일들, 여행을 한다, 친구들과 만나서 원 없이 수다를 떤다, 책을 본다, 아니면 봉학이처럼 화살을 연습한다, 이런 거를 해서 화폐나 교환법칙에서 벗어난 활동, 요거를 할 때 사람이 굉장히 충전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다가 돈이 부족하면 다시 일에 결합해서 경제활동을 하고. 이렇게 하는 거를 누구나 원할 것 같아요. 그러면 제일 좋은 게 글을 쓰는 거죠. 저자가 된다는 건 그야말로 하고 싶을 때 하고,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예요. 그러면 뭐 돈을 너무 조금 벌지 않냐, 그런데 조금 벌어도 되는 게 쓸 시간이 별로 없어요. 책 보고 글을 쓰고 하는 시간에 언제 쇼핑을 하고 소비를 하겠어요. 그리고 소비에 대한 욕구도 안 생겨요. 그러니까 조금 벌어도 많이 버는 부자보다 훨씬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다, 이게 진짜 부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세상이 이렇게 변한다는 거, 요것이 하나 중요하죠.
그다음에 근대 이전에 그러니까 자본주의 이전에는 대체로 이런 리듬으로 살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게, 그리스로마 시대 가면 자유인이 그랬다는 거죠. 자유인이란 게 특별한 직업이 없는데, 그냥 어영부영 먹고살면서 광장에서 철학을 했다, 이런 게 사회적으로 가능했던 거잖아요. 예전엔 그렇게 생산력이 낮은데도. 조선시대로 와 보면 선비들은 일단 일종의 자유직이잖아요. 여행하고 싶을 때 여행하고 팔도유람을 하다가 기본적으로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이렇게 했는데 사회가 이거를 먹여살렸어요. 그러면 농민이나 공장이, 이런 사람들이 너무 힘들지 않았나. 생산력 전체가 낮으니까 힘든 면은 있었지만, 농민을 봐요. 농민도 일 년 내내 직장에 다니는 게 아니에요. 농민도 농번기 때 일을 하는 거죠, 집중적으로. 그때는 잠자는 시간도 줄이고 일을 하는 거고. 그 나머지는 추수할 때 바쁘고. 그다음 나머지 많은 시간은 한가한 거죠. 그래서 그때 사랑방에서 이야기꽃이 많이 피었고, 그런 게 지금 구비문학으로 엄청나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리듬으로 살다가, 갑자기 공장에 가라, 그러니까 적응이 안 됐었어요. 그래서 강제로 공장에 막 보내서 일 년 내내 빡빡하게 일을 한다, 이게 이해가 됐겠냐고, 이 리듬이. 일단 봄이 와서 모내기를 할 때는, 몸이 막 그렇게 무르익으면 그때는 일을 많이 해도 몸이 괜찮은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벼가 무르익어서 그럴 때는 몸에 막 기운이 돋는 거예요. 그런데 벼가 익어서 고개를 숙일 때 되면 이제 거두어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 완전히 빈 들판밖에 없을 때는 농민도 쉬는 거죠. 새끼를 꼬거나 투전이나 고스톱을(고스톱은 뭐 나중에 나왔으니까;). 이런 걸 하고 그다음에 마을에 축제가 열리고. 이런 리듬을 타는 게 노동이 훨씬 유연하고 자연스럽고. 유목민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초원을 따라서 계속 이동을 했으니까. 출퇴근하고 이런 직장하고 전혀 다르잖아요, 경제활동을 하지만.
그래서 지금처럼 직장이 없으면 불안하지 않나 이거는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하에서 일정 부분 조장된 거죠. 어쨌든 지금은 굉장히 유연한 시대가 됐으니까 앞으로 우리가 자연스러운 본성, 일과 휴식을 내가 조절하는 이런 삶을 기획해도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문제는 소비를 줄이는 거예요. 사람들이 불안한 건 어떻게 보면 소비를 마음껏 하지 못할까 봐 불안한 게 더 많죠. 기본적 생존권(이 불안한 것)이라기보다. 생존권이 문제가 있을 땐 사회시스템에서 분배를 원활하게 하면 돼요. 왜냐하면 정말 기본적으로 먹을 게 없어서 누군가 굶는 게 아니잖아요. 누군가 굶었다는 건 어딘가 분배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거죠. 옛날에는 흉년이 들면 정말 다 굶었잖아요. 그리고 전염병이 오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었다구요. 지금은 사회 전체의 부나 가족 안에서 부가 상당히 축적이 된 경우도 있는데, 순환이 안 되고 있어요. 내 친구의 재산이 있거나, 친구한테 먹을 게 있으면 나는 굶지 않는 거예요. 이런 게 사실 중요한데 이게 순환이 안 되면 내가 직장에서 내 돈을 모아놓지 않는 한, 나는 불안하다… 그런데 이 불안은 해소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아주 많이 버는 사람도 역시 불안해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우리가 끊임없이 확인했죠.
그러면 어떻게 네트워크를 만들까 이게 핵심이에요. 그래서 길 위에 나서면 서열, 직위,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스펙도 필요 없으니까 그때는 정말 친화력, 우정의 기술만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친구를 만드는 그런 능력을 학교를 다니면서, 서클활동을 하면서 배워야 되고, 직장도 일종의 그런 건데, 직장에서는 우정의 기술이 잘 안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직장을 오래 다니다 그만둔 분들은 대부분 다 이런저런 차원에서 다 솔로죠. 식구들하고도 교감이 안 되고 친구들하고도 안 되고. 그러면 이게 저는 가장 인생에서 치명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다 잃어도 내가 지금 만나서 밥을 먹고 내 하소연을 들어줄 친구가 있어야 돼요. 그것을 칠두령은 정말 너무 이런 인생에 꼭 필요한 게 뭔지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일자무식인데 참 지혜로운 거죠. 그래서 친구, 우정의 네트워크 이것이 있어야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이걸 알았기 때문에 이 기술을 우리시대의 청년들이 많이 배웠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이 이유 없는 불안증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곰곰이 하나씩 따져보면 내가 굉장히 자유의 공간이 있는데 그냥 다 불안하다, 학습된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무조건적인 경우가 많거든요. 정말로 불안의 구체적인 이유가 있으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노력을 해야 되는데, 그냥 막연하게 미래가 불안해 노후가 불안해 이건 좀 아닌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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