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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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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7-06-25 19:05 조회4,4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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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하오!’ ‘짜이찌엔!’ 가볍게 인사를 나누 듯, 자유롭고 편안한 『논어』 독법. 개념어나 자구 해석에만 매달리거나, 엄숙하고, 진지하고, 경건한 자세로는 절대 『논어』를 포함한 고전을 재미있게 읽을 수 없다는 저자는 그동안 괄호 쳐진 상태로 애써 무시되었던 사실들(공자의 신체 조건 및 출생 배경)과 애초에 기록을 의식하지 않았기에 더욱 생생하고 왁자지껄했던 스승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의 맥락, 그리고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나만의 『논어』 읽기, n+1개의 『논어』 독법을 창안할 것을 제안한다. 『논어』와 공자에서 출발하는 동아시아 고전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읽어낼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책으로, 수년 간 고전을 매개로 다양한 곳에서 독자와 만나 온 저자의 ‘논어 강의’를 책으로 엮었다.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 최고의 스승 공자, 천 개의 배움 논어에 대한 유쾌한 강의』 저자 인터뷰 


1. 공자와 『논어』에 관한 책들 중 가장 경쾌한 제목을 가진 책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제목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싶으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하하. 그런가요? 그런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렇다면 성공인데요. 처음 공자와 『논어』에 관한 책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사실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의 책제목을 찾기 어려웠어요. 동양 고전에 관련된 책이기 때문에 딱딱하거나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막연하게나마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양 고전 그중에서도 특히 한문 원전일 경우, 일차적으로 뜻풀이(번역)를 접하기도 전에 포기해 버리거나 외면해 버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만큼 사실 고전은 언어 면에서 일차적 장벽이 형성되어 있는 셈이에요. 좋은 번역이 있다 해도 일반 독자들이 곧바로 고전 텍스트의 맛을 즐기면서 독서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저는 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고전 텍스트들이 지금보다 더 다양하게 독자층을 만날 수 있는 다양성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공부는 무작정 쉬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쉬운 공부가 꼭 좋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고전은 아직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들을 찾아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역시 그런 시도의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목도 좀 딱딱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라는 제목은 어느 순간 ‘탁’ 하고 떠오른 제목인데요. 큰 뜻이 있다기보단 우리가 아는 가장 기본적인 중국어 두 마디로 제목을 삼은 겁니다.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처음 배우는 말이 인사잖아요. 안녕하세요. 안녕? 공자와 논어와 가장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말을 공자와 논어에게 붙임으로서 우리 스스로 공자와 논어에게 첫인사를 건네는 자리에 서보게 하자, 그렇게 ‘의미’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하하.^^ 

2. 이 책을 펼쳐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공자는 키가 크다’라는 것인데요. (외모지상주의는 아닐 테고^^;;) 공자의 신체조건에 주목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사실 이 ‘신체성’에 관한 대목은 제가 공자와 『논어』 강의 때마다, 아니 동양 고전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얘기하고 다니는 사실인데요. 저는 이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느즈막하게 동양 고전을 공부하게 된 사람이거든요. 학부와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현대문학이었습니다. 한문으로 된 텍스트는 공부할 이유도 시간도 없었죠. 더구나 『논어』, 『맹자』 같은 책을 읽고 또 그에 관해 책까지 쓰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죠. 그런데 우연히 동양 고전을 공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논어』와 운명적으로 만난 겁니다.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일단 너무 재미있는 책이어서요. 머리말에서 감사인사를 드렸습니다만, 당시 저희들의 『논어』 강독 스승님께서 너무 재미있게 가르쳐주신 덕분이었을 겁니다. 여하튼 그런 인연으로 공자/『논어』 등과 관련된 책들을 하나씩 읽어 가게 되었더랬죠. 그런데 그러다 또 한 번 깜짝 놀라게 되었어요. 공자 프로필에 관한 오래된 기록에 버젓이 공자의 키가 9척 6촌이라고 나와 있는 거예요. 이게 요즘 감각으로 환산하면 대략 2미터 10센티미터에서 왔다갔다 하는 정도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저는 그때까지 공자님라는 말을 들으면 키가 작고 배가 많이 나온 뚱뚱한 할아버지를 떠올렸거든요. 그렇게 공자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시 일반 사람들에 비해 남다른 정도였다는 상상을 하면서 공자와 관련된 자료들을 읽기 시작하자, 그 이전까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던 구절들이 마구 눈에 걸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모든 새로운 자각들을 모아 보니 결국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공자는 건장한 빅맨이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건, 그렇게 공자를 생각하면서 『논어』를 읽자 『논어』에 나오는 공자 관련 구절구절들이 아주 새로웠다는 사실입니다. 굉장히 힘세고 건강하고 체력 좋은 거인! 이것은 사실 제 『논어』 읽기가 시작되는 단초이기도 했던 셈이었죠. 아, 참 질문이 뭐였죠? 공자의 신체 조건에 주목한 이유를 여쭤 보셨던가요? 
그 이유는 다른 게 없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공자 나아가 유학의 신체성을 분명히 환기한 상태에서 텍스트와 만나게 된다면, 『논어』가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유학에 대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기득권 양반 귀족들의 학문. 전 근대시기 변화에 뒤처진 보수적이고 계급주의적인 학문.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의 학문. 뭐 그런 이미지 아니었나요. 유학에 이런 면모가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동아시아 세계가 수천 년간 이어져온 내력과 서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연히 이런 이미지가 전근대시기 유학의 전부는 또 아닌 겁니다. 아니기는커녕 아주 달랐습니다. 화끈하고, 야생적이고, 생동감 넘치고, 거칠고 등등… 공자의 신체성에 주목해서 읽다 보면, 정말이지 다양한 얼굴을 가진 『논어』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동양 고전 자체에 대한 고정관념이 크게 전환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3. 이 책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에서는 공자의 여러 제자 중 안회, 자로, 자공에 대해 집중 분석을 해주셨는데요.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지만 결국은 제자들을 통해 공자에 대해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세 제자를 통해 각각 공자의 어떤 면모를 얘기하고 싶으셨던 건가요?(+보너스 질문: 책에 나오는 세 명의 제자 포함해서 공자 제자 중 선생님의 ‘최애’ 제자는 누구이고, 이유는 무엇인지 간단히 얘기해 주세요^^) 

공자의 제자들에 관해서는 그동안 이미 많은 얘기들이 있어 왔습니다. 공자의 제자들에 주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논어와 공자에 관한 상식적인 분류일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분류라고는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 부분을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만큼 공자와 『논어』 관련해서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제자들을 다루면서 하나의 원칙을 지시하기 위해 썼습니다. 책에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공자의 제자들이야말로 『논어』의 저자이자 주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수사가 아닙니다. 『논어』는 철저하게 이 제자들에 의해 기획 편집된 텍스트입니다. 하지만 공자의 제자들이 중요한 건 이들이 책을 편집한 주체들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논어』 안에서 이들은 실제로 공자와 함께 대화를 주고받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간단한 얘길 왜 그렇게 어렵게 하냐고 말씀하시겠지만, 이 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논어』는 어떤 책입니까? 라고 물으면 당연히 공자님 말씀을 엮은 책이라고 대답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반만 맞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논어는 틀림없이 공자님 말씀을 엮은 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공자님 말씀만 들어서는 절대로 『논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님의 그 말씀이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공자님의 그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그건 바로 그 제자가 그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 제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질문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논어』는 공자님 말씀을 보고 듣기 위한 책이 맞지만, 공자님의 그 말씀은 특정한 어떤 제자와의 대화 상황을 배경에 깔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제자의 그 물음이 아니었다면 그 말은 똑같은 말이라도 다른 의미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논어』에서 공자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질문(자)의 맥락까지 함께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질문자=제자들의 맥락까지 짚어 가는 독서에서 논어는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미 쏠쏠한 텍스트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읽는 것은 결과적으로 『논어』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일거양득인 셈이죠. 
이번 책에서 세 명의 제자들에 관해 쓰게 된 건 전적으로 지면 제약에 따라 제한된 것입니다만, 그중에서도 세 명으로 간추린 것엔 이유가 있습니다. 안회와 자로와 자공은 각각 스승 공자를 만드는 서로 다른 분야(?)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제자들을 통해 스승 공자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죠. 안회의 덕행과 자로의 실천지성, 그리고 자공의 유연한 능력은 모두 스승 공자의 한 측면씩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자로와 자공을 아주 좋아합니다. 특히 자공에 대한 저의 편애는 책에서도 여러 차례 커밍아웃한 상태인데요. 저는 자공이 등장할 때 공자님과 주고받는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재미있어요. 고수들의 바둑을 보면 별 거 아닌 수를 주고받는 것 같은데 실은 그 한 수 한 수에는 캘수록 여러 의미들이 숨어 있죠. 바둑을 수담(手談)이라고도 하는데 수를 읽어내는 안목이 깊을수록 이야기[談] 층위가 다양하고 풍성해지죠. 저는 자공이 공자님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런 감동을 받곤 합니다. 

4. 이 책에서 ‘백 번이나 넘게 나오는 인(仁)에 대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논어』를 통해 인을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대개 ‘공자’, ‘『논어』’ 하면 바로 ‘인’을 떠올리곤 하니까요. 그렇다면 ‘인의 철학자’라는 것은 공자에 대한 오해였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공자님은 인(仁)의 철학자가 맞습니다. 만약 오해가 있었다면 그건 공자님이 인의 철학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공자의 인이 개념적 혹은 실체적으로 추상 내지는 규정될 수 있다는 식의 오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간단히 말해, 말씀하신 대로 『논어』에는 인이란 말이 100번도 넘게 나옵니다. 하지만 인이 나오는 곳마다 절취해서 다 모아본다 해도 ‘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없다고 봅니다, 저는. 왜 그런가 하면, 인이란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은 공자 시대에도 생소한 말이었습니다. 공자 이전 텍스트들에서 인이란 말의 용례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말이 공자에 의해 특별히 용법을 갖는 중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였다는 겁니다. 어떻게 인할 것인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논어』 안에 등장하는 인은 거의 이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안회가 어떻게 인하느냐고 물으니 ‘극기복례’하라고 말씀하시고, 사마우가 자신이 어떻게 인해야 하느냐 물으니, ‘말을 아끼라’고 대답해 주는 식인 겁니다. 그러니 공자님은 인의 철학자가 맞습니다. 인이라는 새로운 품행의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책에 보면 선생님께서도 30대 초반에야 공자와 『논어』를 만나게 되셨다고 나오는데요. 『논어』를 읽기 전과 후에 선생님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셨는지 궁금합니다. 또 이와 관련해서 독자들이 꼭 『논어』를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말씀해 주세요. 

앞의 질문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저는 한국문학을 전공했고 그것도 현대문학 쪽이었습니다. 한때 소설을 써보고 싶은 과분한 욕심을 잠깐 가졌었더랬는데, 소설에 재능이 없다는 걸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던 바람에 우연히 접하게 된 고전 텍스트 읽기 세미나에서 어느 순간 재미를 느끼고 있었더랬습니다. 그러다 연구실(남산강학원) 동료들과 함께 연구실의 영원한 한문 마스터 우응순 선생님께 원문 강독 수업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한문 강독에 관해서는 날라리인 셈인데, 어찌됐건 우선생님은 평생 한문을 읽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평생 얼마나 여러 번 『논어』를 읽으셨겠어요. 그런데 늘 선생님께서 공부를 가장 많이 해오시고, 가장 재미있어 하세요. 가장 즐겁고 유쾌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한문 강독을 우선생님처럼 즐겁고 재미있게 하시는 분을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어쨌든 이러저러하게 우샘 덕분에 논어 강독을 한 번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30대 초반 내지는 중반 즈음이었던 같아요... 그런데 그 이후로 이 『논어』가 자꾸 입에 남았습니다. 논어는 구절들이 짧거든요. 또 말이 대구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금세 외워지는 구절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읽다보니 어느 순간 더 이해되는 구절들도 있고,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구절들도 생기고… 그렇게 『논어』 읽기가 어찌어찌 시작됐습니다. 『논어』에 관해서는 이런 말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논어』를 읽고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어떤 사람은 『논어』를 읽으면 저도 모르게 손발을 흔들며 춤추게 된다고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던데, 『논어』는 칭찬이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을 춤추게 만드는 걸 보면요. 
저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논어 구절들이 한 구절씩 새로운 의미로 이해되는 걸 경험하면서 정말 저도 모르게 손발이 춤을 추었던 것도 같습니다. 
『논어』를 만나고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논어를 읽기 전과 읽고 난 이후 분명히 달라진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논어』를 읽고 난 후엔 누가 어떤 책을 읽으면 좋겠느냐고 추천해 달라고 하면 그 1순위가 『논어』라는 사실입니다. 
아주 오래된 얘깁니다만. 제가 문학 공부하던 시절에 시 전문 계간지에 실렸던 이성복 시인의 인터뷰 기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어가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소설가 이인화(당시엔 평론가 류철균) 교수였는데요. 이 젊고 명민한 비평가가 한 세대 위의 시인을 찾아가 자꾸 예리하게 지적으로 따지고 물어요. 그런데 이성복 시인이 나중에 그랬어요. 자신은 요즘 동양 고전을 읽고 있다고. 그러면서 인터뷰어인 류철균 평론가에게 꼭 『논어』를 읽어 보라고 합니다. 제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동양고전으로 숨어버리는(!) 듯한 선배를 꼬치꼬치 따지고 몰아붙이는 지성적인 후배와 그런 후배의 날카로운 창날을 피하며 삶이라는 건 그렇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 이상의 혹은 이전의 무엇에 대한 실천이라고 비껴서 버리는 노작가. 
『논어』를 읽는다는 것은 늘 현재적인 작업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독서여야 합니다. 저는 『논어』가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각자의 현재를 되묻고 그것에 응답을 해주는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무인도에 한 손에 한 권의 책만을 들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제 한 손에는 『논어』가 들려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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