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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장자처럼 조르바처럼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5-01-18 17:49
조회 : 4,267  
그림 이억배 화백


내 서재 속 고전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열린책들 펴냄(2012)


장자
장자 지음, 김학주 옮김/연암서가 펴냄(2010)


여기 두 사내가 있다. 하나는 65살의 떠돌이 백수, 다른 하나는 35살의 엘리트 부르주아다. 전자의 이름은 조르바. 젊어서부터 온갖 전장터를 누빈 백전노장이다. 후자는 ‘단테와 말라르메’를 읽고, 불경을 필사하면서 존재의 심연을 탐사하는 ‘책벌레’다. 조르바는 그를 ‘두목’이라 부른다. 이 둘이 ‘크로스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잘 모르겠지만 일단 흥미롭긴 하다. 기질이며 지성, 계급의 차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30년의 세대차가 어떤 ‘케미’를 연출할지 기대된다.

통념적으로 보자면, 조르바는 노장세대를, 두목은 청년세대를 대변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조르바가 훨씬 ‘래디컬’하다. 그는 어떤 이념도 이상도 믿지 않는다. 조국, 신, 혁명 따위는 한갓 망상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얽어매고 노예화한다는 점에서. 그가 이런 원리를 깨달은 건 학교나 책이 아니라 생로병사의 현장이다. 젊은 날 발칸전쟁이 일어났을 때 조국 그리스를 위해 총을 들었다. 죽이고 훔치고 강간하고…. 온갖 짓을 다 해봤다. 그러던 어느날 한 사내의 멱을 땄는데, 그 다음날 장터에서 구걸하는 아이들과 마주친다. 바로 자신이 죽인 사내의 아이들이었다. 그 순간 강력한 채찍이 그의 영혼을 후려갈겼다. 그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모든 걸 다 털어주고는 있는 힘을 다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조국과 돈, 신으로부터, 그밖에 또 다른 이상과 열정으로부터. 반면, 젊은 ‘두목’은 아직 이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현재 그가 붙들고 있는 건 붓다와 공동체다.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붓다의 소리를 듣고 그 경지에 도달하고자 치열하게 정진한다. 한편 10대부터 꿈꿔온 ‘혁명과 영성’, ‘예술과 노동’이 공존하는 커뮤니티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했다.

둘은 크레타로 가는 길에서 만났다. 갈탄광 사업을 하기 위해서다. 광산에서 두목은 자본가고, 조르바는 노동자다. 하지만 일이 끝나고 밤이 오면 관계는 180도 전환한다. 조르바는 노련한 멘토고, 두목은 철부지 학인이 된다. 조르바의 가르침은 ‘대략난감’이다. 그에 따르면, 이성이란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이고, 결혼이란 ‘개골창에 대가리를 집어넣은 것’이며, ‘하느님과 악마는 하나다’ 등등. 게다가 그는 에로스의 달인이다. 그는 천하를 떠돌지만 묵을 곳을 걱정하지 않는다. 왜? 어느 마을이든 과부가 있으니까. 그렇다고 그가 싸구려 난봉꾼인 건 아니다. 그의 사랑은 진짜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과부의 쭈글쭈글한 주름이 펴지면서 생의 가장 빛나던 시절로 돌아간다. 여자가 원하는데도 같이 자주지 않으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했더라도 지옥행은 면할 수 없다는 아주 독특한 박애주의자(?)이기도 하다. 어디 여자뿐이랴. 그는 모든 사물에서 영혼을 발견하는 범신론자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그는 영원히 놀라고, 왜, 어째서 하고 캐묻는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한마디로 조르바는 두목의 내부에서 떨고 있는 추상적인 관념에 살아 있는 육체를 부여하는 존재다. 쉽게 말해, 조르바에겐 ‘오직 삶이 있을 뿐!’이다. 반면 두목에겐 삶에 대한 온갖 개념과 이미지로 무성하다. 삶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서 이리 재고 저리 재고, 또 이런 이상, 저런 정열에 사로잡힌다. 마치 이념과 가치를 잘 구축하기만 하면 세상만사가 다 해결될 듯이 말이다. 허나, 조르바가 보기에 세상은 카오스다! 아무리 정교한 이치도, 완결된 이상도 이 카오스의 무상한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뒷북’이며 ‘미네르바의 부엉이’고 ‘뻘짓’이다. 그러니 이 무상성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그 리듬을 타는 것 말곤 달리 길이 없다. 과연 이 두 개의 포물선은 서로 마주칠 수 있을까?

어떤 이상도 믿지 않는 두 사람
그들이 추구한 자유는
수동적 도피나 체념이 아니라
두려움과 쾌락으로부터의 해방
진정한 생명과 자유의 경지

조르바가 야심차게 기획한 사업이 완전 박살나자 둘은 깨끗하게 헤어진다. 그리고 5년, 그사이에 전세계의 국경선이 아코디언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격변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느날 두목의 꿈에 조르바가 나타났다. 그때부터 알 수 없는 열정에 휩싸여 두목은 미친 듯이 글쓰기를 한다. 그것은 이전에 했던 추상과 관념이 아니었다. 오장육부로부터 솟구치는 기(氣) 혹은 에너지의 유동적 흐름이었다. 조르바에 대한 스토리가 완성되는 순간, 조르바의 죽음을 알리는 엽서가 도착한다. 두 개의 포물선, 곧 조르바의 육신과 두목의 정신이 마침내 하나로 융합된 것이다. 육신이 말이 되고 텍스트가 되는 과정, 그것이 <그리스인 조르바>의 기본 줄거리다. 텍스트의 탄생 과정이 ‘텍스트’가 된 셈이다. 그럼 조르바가 두목이 된 것인가? 두목이 조르바가 된 것인가?

문득 이 대목에서 <장자>의 나비에 대한 비유가 떠올랐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 <장자>는 ‘초월적 피세’ ‘호방한 상징’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장자는 오히려 이 카오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상이 아무리 한심하고 구질구질하고 역겹고 난감하더라도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하면서 그 운명을 껴안고 한바탕 노는 능력”을 터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세상의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삶이라도 다시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절대자유의 삶이”(이희경 편, <낭송 장자>) 아니겠는가. 이것이 장자가 전하는 ‘삶의 기예’다. 조르바의 경지와 여러 모로 상통한다. 장자의 주해서는 100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것은 장자가 난해하다는 증거도 되지만 그만큼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다성적 텍스트”라는 뜻도 된다. 달리 말하면, 누구든, 아무렇게든 읽어도 된다는 뜻일 터, 그것이 진정 장자가 원한 독법이 아니었을지.

그러고 보니 장자의 언설 구조도 <그리스인 조르바>와 닮은 데가 있다. 장자가 조르바라면, 두목은 장자에 나오는 공자를 비롯한 유자들이다. 공자와 안회 등은 명분과 이상에 사로잡혀 있다. 어떻게 인의를 구현하고 왕도정치를 실현할 것인가? 하지만 장자는 말한다. 그런 식의 이념이 세상을 바꾼 적은 없다고. 범죄와 형벌이 넘쳐나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러므로 어떤 명분과 가치도 생명과 자연의 리듬을 따르는 것보다 더 위대할 수는 없다. 이걸 잊으면 외적 성취에 사로잡히고 그러면 번잡해져서 불안에 빠져버린다. 그 순간 한편으로 난폭해지고, 다른 한편 쾌락을 쫓게 된다. 두려움과 쾌락에 빠진다면 제명에 죽기 어렵다. 자기 명도 지키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설정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다. 조르바에게서 배운 것이리라. 아니, 조르바와 그의 경계가 사라졌으니 그런 말조차 무색하다. 두려움과 쾌락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그가 도달하고자 했던 자유의 경지다. 이것은 결코 수동적 도피나 체념이 아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생명’과 ‘자연’이 깨어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한 ‘지복’의 세계다. 발칸전쟁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전장터를 누비고, 프란체스코 성인과 붓다를 동시에 가로지른 카잔차키스의 편력이나 천지만물과 소통하고자 모든 인위적인 가치들과 사상적 전투를 쉬지 않았던 장자의 궤적이 그 증거다.

2015년이 밝았다. 허나 아직은 갑오년이다. 을미년이 되려면 입춘 때까지 좀더 기다려야 한다. 하여, 1월은 심연을 탐사하는 충전의 시간이다. ‘생자필멸’하는 우주의 리듬을 되새기는 정진의 시간이기도 하다.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이 새로운 계획에 부푼다. 대개는 부와 성취에 대한 것이리라. 하지만 새해가 진정 ‘새로운 시공간’이 되려면 이전과는 다른 길이 열려야 할 터, 2015년엔 조르바와 장자를 길잡이 삼아 ‘생명과 자유’의 경지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그러기 위해선 시공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 ‘대체 이 신비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소리치는 조르바처럼. 또 ‘시시각각의 변화에 응하면서 만물과 함께 늘 다시 탄생하고, 마주칠 때마다 매번 꽃피는 순간이 되는’ 장자처럼.

(2015.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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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후안   2015-01-22 10:10:38
 
너무도 좋은 글입니다, 이런 글쓰기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리스인 조르바와 장자를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을 안해본것은 아니지만 이렇듯 그 둘의 상관관계를 이렇듯 설득력있게 기술할수 있는 내공은 어떻게 해야 달성될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곳에 와서 글을 읽을때마다 끝도 없는 자괴감이 밀려옵니다. 대단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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