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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대학인이여, 필연의 법칙 따라 사는 존재로 돌아가라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5-04-24 18:16
조회 : 3,912  

[길 위의 인문학] 대학인이여, 필연의 법칙 따라 사는 존재로 돌아가라


취준생·인구론·혼밥족. 이것이 우리 시대 대학생들을 지칭하는 유행어들이다. 이 유행어들을 ‘헤쳐모여’해보자. 대학생은 친구도 애인도 없이 혼자 밥을 먹으면서 취업을 준비한다(혼밥족). 하지만 인문계는 그렇게 해도 90%는 백수가 된다(인구론). 뭐 그런 뜻 아니겠나.

사실 인문계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과계통을 나와도, 또 소위 명문대를 나와도 취업에 유리한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선택의 폭이 좁아서 더 오랫동안 백수로 살아야 한다. 이쯤 되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학은 대체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또 청년들은 대체 ‘뭔 생각으로’ 이런 대학을 다니는 거지? 취업의 관문도 아니고 지성의 전당도 아니며 청춘의 열정을 누릴 수도 없는데… 대체 왜? 합리성과 효율성을 유일한 척도로 삼는 이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말이다. 이렇게 헷갈릴 때는 처음부터 다시 짚어보는 게 상책이다.

사피엔스가 되는 길 포기한 대학

현생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곧 생각하는 존재다. 사유가 삶의 형식을 낳고, 그 삶에서 다시 사유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존재라는 의미다. 교육혁명가인 이반 일리히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종의 탄생 이래 “약 만 세대에 걸쳐 수천 가지가 넘는 다양한 생활 방식을 발명했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유어를 썼다. 모든 문화인의 조건은 자신이 발을 디딘 구체적 시공간의 필연성-지극히 덥거나, 지극히 춥거나, 지극히 건조하거나, 지극히 축축하거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각자가 처해있는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언어를 만들었고, 그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필연적 조건을 해석하는 언어와 상징의 다양성, 필연성 위에서 삶을 구축하는 방법의 다양성이 문화의 다양성으로 표현된다.”(문탁, 블로그)

이것이 문명과 역사의 동력일 것이다. 그 최고의 성과이자 산물이 대학의 탄생이다. 인류의 문명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수많은 답이 가능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존재가 ‘자기 삶을 창조하는 주체가 되는’ 길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니까. 대학의 의미가 우리 말로는 ‘큰 배움’, 영어로는 University, 곧 ‘보편성’이라는 명칭이 부여된 이유일 터이다.

헌데 지금은 대학을 가는 순간 생각을 멈춘다.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피엔스가 되는 길을 ‘포기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좀 민망한 일이긴 하지만 요즘엔 대학생이 책과 가장 거리가 멀다. 지성이란 단어 자체도 잘 쓰지 않는다. 대학생이 책과 지성을 포기하면 뭐가 남지? 허깨비가 된다. 그러니 혼자 밥을 먹을 수밖에. 그렇게 청춘의 에너지를 다 바쳐 취업전선에 뛰어들면 그 다음엔 온통 결핍투성이다. 뭐가 부족해, 뭐가 부족해…. 이반 일리히는 이런 존재를 호모 미세라빌리스(궁핍한 인간)라 지칭했다. ‘미세라빌리스’는 미제라블(비참한)에 라틴어 어미를 붙인 것이다. 쉽게 말해 ‘레 미제라블’의 후예라는 뜻이다.

일리히는 묻는다. “만 세대 이상 필연의 법칙에 따라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는 현대에 와서 거의 멸종되었다. 불과 200년 전에 탄생한 호모 미세라빌리스는 필연의 법칙이 아니라 필요의 법칙에 따라 사는 존재이다.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 것도 아니고, 급격한 빙하기가 시작된 것도 아닌데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미세라빌리스 사이에 도대체 지구에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문탁, 블로그)

궁핍한 인간 ‘호모 미세라빌리스’의 시대

이반 일리히에 따르면 지난 200년 동안 우리에게 닥친 일은 바로 ‘경제발전’이라는 사태였다. 국가든 개인이든 모든 삶의 목표는 성장이다. 다름아닌 부의 성장! 이 라인에선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할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듯 ‘갈애(渴愛)’에 빠지는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은 ‘필연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갈구하는 ‘필요(needs)‘에 의해 살아가야 한다.

일러스트 강일구
“‘필요’라는 개념은 한때 ‘지혜로운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로 불렸던 인간을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을 갖지 못한 궁핍한 인간 곧 호모 미세라빌리스로 바꾸어놓았다.” 한마디로 본성이 ‘아주 후지게’ 바뀐 것이다. 그의 진단은 현대문명 전체를 향한 것이지만 우리 시대 대학에 적용하면 훨씬 더 적나라하다. 경제개발을 스펙이라고 바꾸면 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대학은 지성의 전당이 아니라 스펙의 공장이 되었다. 스펙이란 청년의 잠재력을 온갖 항목으로 쪼갠 다음 그 빈칸들을 채워가는 과정이다. 학점은 물론, 봉사·언어·해외연수 기타 등등. 하지만 이 항목들은 아무리 기를 써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난 뭘 할 수 있어’가 아니라 ‘난 뭐가 부족해’가 되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자괴감뿐! 마치 거식증에 걸린 모델이 미이라처럼 말라가는데도 자신의 몸을 여전히 뚱뚱하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즘 인문학 특강으로 대학을 방문하는 기회가 종종 있다. 시설은 참 눈부시다. 첨단의 장비와 럭셔리한 건물. 또 청년들의 외모나 패션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제학자의 말처럼 “평균에 속하는 평범한 젊은이들은 과거 프랑스의 루이 14세보다도 더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여기에 지성만 더한다면 이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까 싶은데 막상 강의에 들어가면 참담하기 짝이 없다. 청춘의 패기는 고사하고, 다들 좀비처럼 얼이 빠져 있다. 청년기의 특권을 누리기는커녕 불안과 초조에 빠져 멘탈이 백지장처럼 얇다. 80년대에 주로 데모와 최루탄 속에서 지냈던 세대들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상황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게 바로 스펙문화의 참담한 결과다. 아무리 화려한 스펙을 갖추면 뭘하는가? 신체적 역량이 제로인 걸. 이제사 그걸 눈치챘나보다. 일부 대기업에선 스펙과 무관하게 채용을 하겠단다. 그러자 청년들은 다시 멘붕이다. 그럼 이제 뭘 해야지?

스펙은 공염불이자 무용지물

대학생이 할 일은 지성을 연마하고 인생의 기본기를 배우는 것이다. ‘공염불’같은 소리라고. 그럼 스펙은 뭘 주는가? 취업의 관문을 간신히 통과한다고 해도 거기에서 적응하려면 다시 사람과 인생을 배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결국 호모 미세라빌리스의 처지를 면할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성공한 정규직들을 만나보면 늘 ‘돈이 없다’거나 ‘빚이 늘었다’는 타령이지 ‘남아 돌아간다’ ‘이제 뭔가 좀 새롭게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도 결국 호모 미세라빌리스의 팔자를 못벗어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펙이야말로 공염불이자 무용지물이다. 더 결정적인 증거는 다름아닌 대학의 몰락이다. 스펙문화를 선도하다 대학은 결국 침몰하고 있지 않은가.

대학이 부활하려면 결국 호모 사피엔스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 취업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기본을 익히는. 다시 말해 지성을 통해 삶을 운용하는 창조력과 잠재력을 터득하는! 그런 점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기는 ‘말과 글’이다. 글로벌 리더십이건 인생의 비전이건 삶과 세계를 이끄는 것은 말이다. 그 말의 결정체가 글이고. 하여, 지성은 말과 글의 능력을 체화하는 것이다. 또 말과 글보다 더 큰 소통의 회로는 없다.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핵심적인 전령사! 따라서 대학생이라면 모름지기 말과 글에 대한 기본기만은 확실히 익혀야 한다.

인문학은 부활하는데 인문계는 몰락

인문계니 공대니 하는 구분도 무의미하다. 어차피 대학 4년 동안 전공을 제대로 마스터하기란 불가능하다. 말과 글이 문과계통에만 한정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구분도 없다. 자연의 이치, 우주의 원리, 생물의 진화 등이 어떻게 글쓰기의 영역이 아니란 말인가? 『총균쇠』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등이 보여주듯 우리 시대 최고의 고전들은 대부분 과학서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번역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이과계통에선 글쓰기를 가르치지도,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과계통에서 글쓰기를 배우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인구론이라는 유행어가 말해주듯 인문계는 취업에 대한 공포로 IT기술을 익히고 경영학을 듣느라 바쁘단다. 이거야말로 이중낭비다. 전공의 장기도 살리지 못하고 취업전선에서도 하류취급을 받는다는 점에서. 대학 밖에선 인문학이 붐을 일으키는데 인문계를 다니는 학생들은 인문학을 버려야 하는 이 어이없는 상황!

디지털은 지식과 정보가 물처럼 흘러다니는 시대다. 그 유동성이 생산력이자 물적 토대다. 그래서 글이야말로 최고의 생산수단이다. 지금은 누구든 자신의 매체를 만들 수 있고, 또 누구든 접속할 수 있지 않은가. ‘창조와 접속’의 제한이 전혀 없는 시대인 셈이다. 더구나 다른 유형의 생산에는 고비용이 들지만 글쓰기는 노트북 하나면 충분하다. 아울러 아무리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해도 결국엔 솔로가 된다. 중간에 짤리든 아니면 정년을 하든. 그 다음엔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자유인이 자립할 수 있는 길 중에 글보다 좋은 것이 있을까. 말과 글, 이것으로 뭔가를 창조할 수 있다면 그때 일은 곧 커뮤니티가 되고 수행이 된다. 지성과 우정, 경제와 구도가 하나되는 길, 대학에서 닦아야하는 기본기란 바로 이것이다. 요컨대, 호모 미세라빌리스의 ‘공장’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산실’로의 대전환! 대학이 침몰하는 배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중앙선데이(2015.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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