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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로드 클래식] 일리아스(2)-태초에 ‘우정’이 있었다!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6-03-25 09:17
조회 : 2,291  
[로드 클래식] 일리아스(2)-태초에 ‘우정’이 있었다!


전쟁에 이유가 없듯이 에로스적 탐닉에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둘 다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죽고 죽이고 뺏고 빼앗는. 그러다 보면 문득 ‘대체 왜 이렇게 사는 거지?’라는 의문이 드는 건 인지상정. 그리스인들이 찾은 해답은 ‘신들의 책략’이라는 것. 제우스와 헤라, 아프로디테 등 그 이름도 찬란한 올림포스 산의 신들이 인간의 마음과 자연을 멋대로 주무르기 때문이라는 것. 헬레네의 약탈로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를 틀어지게 한 것도 다 신들의 조종 탓이다. 전쟁이 10년이나 지속된 것도 마찬가지다. 아테네 연합군이 치고 들어오면 태양의 신 아폴론이 나서서 트로이를 분발시키고, 트로이가 승기를 잡으면 여신 헤라가 아테네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제우스는 양다리를 걸친 채 양쪽의 저울을 맞추느라 분주하다.


한마디로 좌충우돌에 중구난방이다. 하지만 이 카오스적 흐름이 바로 자연의 이치다. 우주는 움직인다. 아니, 움직이는 것이 우주다. 천지가 그렇고, 만물이 그러하다. 하니, 인간이야 말해 무엇하리. 애증이 순식간에 엇갈리고, 길흉이 동시에 덮쳐 오며,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또 살게 되고. 어찌하여 삶은 이토록 무상한가? 이런 질문들이 신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대책 없이 요동치는 사건들의 이면에 어떤 법칙이 있긴 할 것이다. 한데 도무지 알아차릴 방법이 없다. 그러니 저 ‘불사의 신’들이 저지르는 ‘오묘한’ 장난이라고 할 수밖에.

동양에서는 이런 변화를 음양오행의 상생/상극으로 해석한다. 사계절과 오장육부, 칠정(七情)이 맞물리면서 생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고 보는 것. 이것만으로도 동서양의 차이는 확연하다. 동양에선 리듬과 강밀도가 척도지만, 서양은 모든 것이 ‘의인화’되어 있다. 『노자』와 『주역』이 보여주듯 동양에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법칙을 의미하지만, 서양에선 아주 다채로운 인간적 형상으로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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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물론 공통의 키워드는 있다. 자연이건 신이건 불멸한다. 왜? 생성과 소멸, 운동과 순환을 영원히 멈추지 않음으로써. 반면 그 사이클에 단 한 번밖에 참여할 수 없는 인간은 필멸한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불멸과 필멸, 이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동양에선 ‘천지만물과 소통하라’고 한다. 『일리아스』에선 ‘불멸의 명성을 얻으라’고 한다. 어떻게? 영웅적인 투쟁과 죽음을 통해서. 하지만 이거야말로 신의 책략이 아닐까. 죽도록 싸우다 처절하게 죽어야 하다니. 게다가 그 동기가 여인을 약탈하기 위함이라면? 오, 이런 허망할 데가! 신들이 부여한 이 숙명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 우정이 그것이다.

아가멤논에 대한 분노로 전장터에서 물러난 아킬레우스를 움직인 건 절친인 파트로클레스다. 아테네인들이 수세에 몰리자 파트로클레스는 용감히 싸우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아킬레우스는 절규한다. “당장이라도 죽고 싶어요! 전우가 죽는데도 도와주지 못했으니 말예요. 그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었고 제 도움이 필요했는데도 저는 그를 파멸에서 구하지 못했어요. 이제 저는 사랑하는 고향 땅에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일리아스』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이 대목이다. 아가멤논에 대한 분노도, 단명에 대한 두려움도, 신들의 달콤한 위로도 단번에 뛰어넘게 해준 것은 오직 우정의 파토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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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들은 동성애였던가? 물론 아니다. 잠깐! 근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남성끼리(혹은 여성끼리)는 이렇게 사랑하면 안 되나? 에로틱한 욕망이 개입하지 않는 한 이런 식의 ‘찐한’ 브로맨스는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유포한 통념이다. 푸코에 따르면 “고대시대 이래 수세기 동안 우정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관계의 양식이었다. 그 우정의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은 얼마큼의 자유를 누리고 일종의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동시에 강렬한 애정의 관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근대와 더불어 “사회적 관계로서의 우정”은 사라지고 “동성애를 사회·정치·의학의 문제로 선언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결과 모든 인간적 결합의 핵심은 에로스가 차지하고 말았다.

에로스는 필멸이지만 우정은 불멸한다. 전자는 머무르고 탐착하게 하지만, 후자는 떠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아킬레우스의 절규를 보라. 우정이 신의 책략을 벗어난 윤리적 선택이 될 수 있을까? 있다. 아니, 우정만이 그럴 수 있다. 우정은 세상을 연결하고 만물을 순환시키기 때문이다. 고로 『일리아스』는 말한다. “태초에 우정이 있었다!” 이 작품이 전쟁서사시를 넘어 로드클래식으로 도약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래서 드는 질문, 우리는 언제쯤이면 에로스만이 열정의 원천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나 우정이 펼치는 생생불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고미숙 고전평론가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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