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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行설水설] 마음과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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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곰숙 작성일11-10-06 18:03 조회4,8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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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과 정치>


 


 먼 옛날, 페르시아 출신의 승려 달마가 갈대잎을 타고 동쪽으로 왔다. 소림사에서 면벽정진을 하던 중,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이름은 혜가. 달마의 침묵을 깨뜨리고자 팔 한짝을 싹뚝! 잘라 바쳤다.


 때는 바야흐로 한 겨울. 눈덮인 뜨락에 선혈이 낭자할 즈음, 마침내 달마가 입을 열었다.


 


“네가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제 마음이 이리도 어지럽습니다.”


“네 마음을 이리 가지고 오너라. 내가 편하게 해주마.”


 


 문득 말문이 막힌 혜가.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달마가 말한다. “그럼,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순간, 혜가에게 번개같은 깨달음이 일어났다. 마음의 ‘본래면목’을 본 것이다.


중국 선불교의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이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박진감이 넘친다.


앎이란 모름지기 존재의 모든 것을, 아니 몸뚱아리를 오롯이 거는 실천적 행위임을 이보다 더 리얼하게 보여주기도 어렵다.


그 혜가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막막하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우리의 마음은 왜 이토록 어지러운가?


 


 물론 아주 간단한 답이 있긴 하다. 마음은 뇌에 있다. 뇌의 신경다발들이 감정과 의식을 주관하고 그것이 곧 마음이다, 라는.


뇌과학의 약진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첨단의 학설이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아니, 더 막막해진다.


뇌과학이 아무리 뇌의 활동양상을 상세히 보여준다고 해도 우리에게 저 혜가의 번개같은 깨달음이 올 것 같진 않다.


그래서인가. 서구의 대체의학들은 점차 뇌의 특권성을 해체하고 있다.


마음은 심장에, 그리고 대장의 융모세포에, 신장 혹은 자궁에, 나아가 세포 곳곳에 다 있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한국인의 ‘오래된 미래’ <동의보감>의 입장은 훨씬 더 깊고 정교하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마음의 거처는 뇌가 아니라, 심장이다. 심장은 칠신(七神)을 주관하는 군주지관이다.


 그리고 나머지 장부들도 혼/백과 의(意), 지(志), 지혜 등을 분유받는다.


 더 구체적인 마음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칠정, 곧 ‘희노우사비경공’ 또한 오장육부에 다 배속된다.


간담은 분노, 심/소장은 기쁨, 폐/대장은 슬픔, 신장/방광은 두려움 등으로. 결국 장부에 다 마음이 있다.


그런데 간은 근육을, 비위는 살을, 폐는 피부를, 신장은 뼈를 주관하므로 결국 마음은 몸 전체에 산포되어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담론 역시 우리를 즉각적인 깨달음으로 인도하진 않는다. 하지만 뇌과학처럼 차갑고 냉소적이지는 않다.


적어도 그것은 ‘마음의 평안’을 위한 단서는 제공해준다.


마음과 몸은 분리되지 않는다, 마음에는 안팍이 없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는 삶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럼 정치는 어디에 있는가? 여의도 혹은 청와대? 국회의원과 정부부처의 활동 또는 세계정상들의 대회?


그런 것이 정치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넌센스다. 뇌와 발바닥이 떨어져 있듯이, 그것들은 삶의 현장과 아주 멀리 있다.


또 정치란 오직 경제적 수치만을 다룬다고 여기는 것 역시 낡은 사고법이다.


 


 정치가들의 언술은 하나같이 생산과 분배, 유통 등 물질를 둘러싼 제도에만 집중될 뿐,


그것들이 어떻게 삶의 희노애락과 연동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아니, 무지하다.


건물을 짓고 배를 띄우고 도로를 건설하는 것, 혹은 경기를 부양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생로병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르는 정치는 이제 정말 지겹다.


 


 극단적인 예로, 지난 10년간 전국 곳곳에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화려한 조명과 첨단의 장비, 최신식의 설비를 갖춘. 그런데, 거기가 텅텅 비어있다면?


건물에 호흡을 불어넣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산중의 초가건 도시의 빌딩이건, 사람이 들지 않는 곳은 다 흉가다. 흉가에는 귀신들이 산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정치는 귀신들을 위한 것이었던가?


그렇게 건물과 시설, 그리고 각종 제도가 넘쳐나는데도 사람들은 집이 없고, 갈 곳이 없고, 또 만남의 장소가 없다.


 


 그래서 절규한다. 외롭다고, 외로와서 미치겠다고. 이 외로움의 근원은 무엇인가?


수많은 분절의 선들이 있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세대간 단절이다.


청년은 노인을 만나지 못하고, 노인은 청년들과 말 한번 섞어보지 못한다.


청년의 열정과 노인의 지혜가 순환하지 못하는 사회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외로움과 행복, 격절감 같은 건 통계적 수치로 포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현장의 실감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정치란 바로 이 실감이 교차하는 곳에 존재해야 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로 정치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부디 좌와 우, 진보와 보수 같은 낡고 상투적인 구도가 아니라,


인정물태 혹은 실존적 번뇌와 밀착한, 정치의 새로운 공간이 활짝 열리기를 희망한다.


하여 저 혜가가 그러했듯이, 불안과 고독에 시달리는 대중들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 수 있기를.


 


                                                                                                                                                       (경향신문, 2011. 9.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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