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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行설水설] 디지털의 은총과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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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1-12-05 19:04 조회3,8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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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터치’의 시대다. 손가락만 움직이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아니, 손을 직접 댈 필요도 없다. 그저 스윽 훑기만 해도 된단다. 정보면 정보, 상품이면 상품, 소통이면 소통, 무엇이든! 다 있고, 누구든! 다 누릴 수 있다. 이 ‘전지전능한’ 은총 앞에서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져 있다. 지하철과 버스, 기차를 타노라면 다들 자리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터치를 시도한다. 잠시도 쉬지 않는다.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한다. 심지어 걸으면서도, 잠들면서도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현대인들의 묘비명은 이 한줄로 요약되지 않을까? “살았노라, 그리고 터치했노라!”

은총이 이토록 눈부시다면 반드시 대가가 있는 법. 마땅히 그 은총 뒤에는 저주가, 아주 끔찍한 저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체의 소외’다. 이제 사람들에겐 ‘눈과 손’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모두 잉여다. 진화의 소박한 원칙에 입각한다면 잉여적인 것들은 자연계에서 가차없이 퇴출당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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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게 아니라 이미 퇴출을 예고하는 수많은 ‘신상’ 질환들이 만연하고 있다. 당뇨와 고혈압을 앓는 소아들, 허리 디스크와 난청을 앓는 청년들, 갑상샘 종양에 시달리는 20대 여성들. 적어도 질병에 있어서 세대 간 장벽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전에는 노화의 한 과정으로 앓던 노인병이 이젠 청년들의 ‘트렌드’가 되어 버렸다. 말할 나위도 없지만, 노인이 앓는 ‘노인병’보다 청년이 앓는 ‘노인병’이 훨씬 더 끔찍하다. 자연스러운 노화과정이 아니라 과격한 도태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진정 두려운 바는 기억력의 증발이다. 멜로에 나오는 로맨틱한 기억상실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랑의 추억, 이별의 아픔을 후딱 잊어버리는 거야 뭐 그닥 나쁜 일이라고 할 건 아니다(쩝!). 니체는 오히려 망각의 능력을 터득해야 한다고 설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도래하고 있는 망각증은 그런 낭만적인 ‘신드롬’이 아니라 기억력 자체의 실종을 의미한다. 스마트폰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저장해준다. 덕분에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다. 친지들의 전화번호도, 거리에 대한 공간적 감각도, 사물들의 이름도, 아주 기본적인 생활정보조차. 기억의 점진적이고도 총체적인 부재? 그건 알츠하이머(치매)를 뜻하는 말이 아니던가.

그렇다. 치매의 일상화, 이것이 우리가 치러야 할 아주 가혹한 대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 시대적 징후를 포착한 것일까. 요즘 한 인기 드라마에는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치매를 앓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멜로의 주인공이 치매라니? 대체 이게 말이 돼? 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다들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걸 받아들이고 있다.

한번 생각해보라. 디지털 세대는 뭔가를 기억하기 위해 몸부림쳐본 경험이 없다. 교육의 영역에서도 암기는 점차 사라져간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는 명목으로. 미리 말하지만 주입식과 암기는 동일한 말이 아니다. 암기, 더 정확히 말해서 암송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이고도 탁월한 교육법이었다. 독서란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텍스트의 모든 내용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외우는 것이었다. 아니 외운다는 말은 부적합하다. 텍스트와 신체가 한몸이 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냥 몸에 착! 달라붙어 입에서 술술 나와야 한다.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를 비롯해 사서삼경, 불경과 성경 등 인류의 위대한 고전은 다 암송을 통해 구전돼 왔다. 하지만 지금의 독서는 오로지 눈으로 스윽 훑는 것이고 각종 리뷰를 클릭하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토록 많은 독서교육을 받고도 스스로 책을 읽는 능력을 터득하지 못하고 그토록 많은 논술지도를 받고도 글쓰기의 기초를 모르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사람들의 뇌세포는 급격히 퇴화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운동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운동과 순환이다. 뉴런들은 운동을 통해서 촉발되고 활성화된다. 따라서 뇌를 활성화하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이빨과 턱을 움직여야 하고 사지를, 특히 발바닥을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음식들은 대부분 다 입에서 살살 녹는다. 또 직접 발로 뛰어야 하는 일은 점점 줄어만 간다. 하체가 부실하니 허리가 안 좋고 허리가 약하니 이빨이 흔들리고, 그러는 사이에 뇌세포는 차츰 침몰되어 간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문명생리학적 배치다.

디지털의 은총에는 경계가 없다. 앞으론 터치조차 불필요한 시대가 올 것이다. 동시에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정보들이 콸콸콸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은총이 무한할수록 저주 또한 끝이 없으리라. 은총과 저주의 이 ‘무한연쇄’를 헤쳐나가려면 삶 혹은 생명 차원의 전략이 절실히 요구된다. 전략의 거점은 어디까지나 몸이다. 단언하건대, 몸보다 더 확실한 실존의 현장은 없다!

(경향신문, 2011-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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