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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行설水설]이상한 나라의 ‘에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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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1-12-27 14:03 조회4,5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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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에로스’



고미숙 | 고전평론가






나는 프리랜서 겸 고전평론가다. 강연과 집필이 주생업이다 보니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세대를 만나게 된다. 구성비율로 보면 10대 청소년과 중년 여성들이 많은 편이다. 둘은 매우 다르게 보이지만 의외로 유사한 성향도 많다. ‘에로스로부터의 소외’라는 측면에선 특히 그렇다. 
10대들에게 물었다. ‘지금, 자신의 일상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가 뭐지?’ “성욕이오!” 이런 말을 들으면 중년 여성들은 당황한다. 자신의 아이를 비롯해 모든 청소년은 꿈과 비전 같은 원대한(?) 고민을 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대한테 그런 것들은 너무 ‘추상적’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는 때인데 10년 뒤, 20년 뒤가 뭐 그리 절절하게 다가오겠는가. 그에 반해, ‘에로스적’ 충동은 생생한 현실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여성은 14살, 남성은 16살부터 성적 주체, 곧 생식이 가능한 몸으로 바뀐다. 지금의 기성세대 역시 그랬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어른들은 시치미를 뚝 뗀다. 청춘과 에로스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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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물었다. ‘성교육은 받고 있니?’ “네, 피임법하고 성폭행 예방법.” 헉! 이건 성교육이 아니라 성범죄 예방책이 아닌가. 하긴 우리 사회의 성담론은 이 둘을 중심으로 굴러간다. 공적인 장에선 성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1년 내내 인터넷을 도배한다. 성과 폭력, 그리고 범죄는 거의 동일어처럼 붙어다닌다. 이런 배치하에선 모두가 성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소심해질 수밖에 없다. 여학생들은 특히 그렇다. 어떤 선생님이 물었다. 여고생들한테 성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그래서 내가 되물었다. “지금 어떻게 하고 계시는데요?” “몸을 함부로 굴려서 순결을 잃으면 삶의 가치가 떨어진다. 그러니 몸 간수 잘해!” 헐~ 저 20세기 초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세팅된 순결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대세라니.

그래서 반문했다. “아니,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얼마나 높아졌는데, 왜, 아직도 삶의 가치를 남성에 의해 평가받아야 하는 거죠?” 이래서 ‘누군가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다’는 멜로의 판타지가 아직도 통하는가 보다. 한편에선 폭력에 대한 공포가, 다른 한편에선 맹목적 순정이. 이런 배치하에선 어떤 여성도 에로스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온통 포르노 천국이다. 포르노를 본다는 것이 이젠 더 이상 은밀한 ‘지하활동’이 아니다. 인터넷 사이트 어디를 들어가도 바로 포르노와 접속 가능하다. 거기다 대중문화는 온통 ‘섹시’ 콘셉트이다. 우리 시대의 미적 척도에 섹시미 말고 다른 무엇이 있는가? 다들 섹시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안달한다. 섹시하다는 건 무슨 뜻일까? ‘나는 너를 성적으로 느껴’라는 뜻이 아닌가? 이렇게 범람하는 포르노그라피 속에서 청춘의 욕망은 괄호 속에 넣어버린다. 또 여성들은 여전히 순결을 ‘지켜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참, 이상한 나라의 에로스다!

그래서 가장 일차적으로는 10대들의 성이 소외되지만, 이 소외는 중년 여성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중년 여성들은 기혼이건 미혼이건 성적 욕망을 표현할 장이 없다. 중년 여성들은 자신들이 앓고 있는 각종 질병의 원천에 ‘성욕의 결핍과 왜곡’이 있다는 걸 스스로도 잘 인정하지 못한다. 왜? 성은 더럽고 위험한 것이니까. 여성은 늘 남성이 ‘욕망해주기’를 욕망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성인 남성들이 대단한 권리를 누리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성인 남성들 역시 자신의 욕망을 ‘떳떳하게’ 표현할 담론의 공간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결국 모두가 피해자다.

이런 배치는 조선시대와 비교해도 무척 열악하다. 조선시대에서 성이란 자연스러운 일상이자 유쾌한 농담이었다. <변강쇠타령>의 옹녀도 그렇고, <임꺽정>의 여성들은 성적 표현에 있어 또 얼마나 위풍당당한지. 특히 <동의보감>에는 성욕에 대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나온다. 하지만 거기서 성욕은 금지의 대상이 아니라 철저히 조절의 대상이다. 그리고 조절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다. <동의보감>이 지향하는 ‘양생술’이란 욕망을 스스로 조절하는 ‘자기배려의 기술’에 다름 아니다.

누구나 체험하듯이, 에로스는 ‘순수’하지 않다. 지각불가능하고 예측불가능한 일종의 ‘카오스’다. 이 카오스와 마주하는 것이 사춘기다. 이때 자기조절의 기술을 닦지 않으면 성에 대해선 영원히 소외된 주체로 남을 수 있다.

금지는 억압을 낳고, 억압은 폭력을 낳는다. 그리고 폭력보다 더 무서운 건 순결에 대한 강박증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훼손시키는 무의식적 기제이기 때문이다. 이 표상이 해체되지 않는 한 이 악순환의 고리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여, 이제는 성에 대한 ‘리얼하고도 유쾌한’ 탐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즉, 충동에 끌려다니지도 않고 욕망을 억압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배려의 기술’을 터득해야 할 때다. 요컨대, 에로스에도 ‘쿵후’가 필요하다!

 

경향신문, 201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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