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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行설水설]몸에 새겨진 ‘운명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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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1-23 17:21 조회4,2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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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MBC에서 방영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을 보노라면 물이 생명의 원천임을 사무치게 깨닫게 된다. 영하 50~60도의 혹독한 추위와 무시로 휘몰아치는 눈폭풍에도 불구하고 남극은 뭇생명의 모태이자 귀환처다. 물은 본디 그렇게 차다. 극도로 응축되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계절로는 겨울, 색깔로 표현하면 검은색이다. 임진년을 흑룡의 해라고 부르는 이치가 거기에 있다(임진년의 ‘진’은 용을, ‘임’은 바닷물을 의미한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아직은 임진년이 아니라 신묘년이다. 해서, 이번 달에 태어나는 아이는 용띠가 아니라 토끼띠다. 신묘년, 임진년 등 한 해를 60갑자로 명명하는 방식은 절기력에 속한다. 절기력은 태양력과 태음력을 결합한 역법으로 입춘이 기준점이다. 그러니까 흑룡띠의 아기가 태어나려면 음력 설날을 지나 입춘(2월4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양력, 음력, 절기력 등은 천지의 운행을 ‘절단, 구획’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다. 공식적으로는 양력이 대세이지만 음력과 절기력의 위세도 만만치 않다. 시공간이 밟아가는 가장 보편적인 리듬이 사계절이기 때문이다. 사계절을 잘게 나누면 24절기가 된다. 사계의 리듬은 항상적이지만 절기가 연출하는 강밀도는 늘 다르다. 매번 돌아오지만 늘 다르게 돌아온다. 차이와 반복, 그것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법칙이자 동력이다. 이 리듬과 강밀도는 사람의 몸과 인생에도 고스란히 투영된다. 요컨대, 시공간과 존재의 리듬은 함께 간다. 고대인들이 하늘의 별자리와 계절의 변화를 열렬히 탐구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천지를 알아야 사람을 알고 사람을 알면 곧 천지가 보인다는 ‘천인감응의 이치’를 일찌감치 깨우쳤던 것이다.


현대과학 또한 별을 탐구하고 지구의 나이를 측량한다. 유전자 암호를 해독하고 세포의 활동을 추적한다. 하지만 현대과학은 이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유전자와 별이 하나로 이어지는 ‘대칭성의 고리’를 애초에 차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헛헛하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생로병사의 비전을 탐구하는 길은 더할 수없이 빈곤한 탓이다. 이 화려한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도 온갖 점성술이 만개하는 건 이런 맥락의 소산일 터이다.

사주명리학 역시 동양의 대표적인 점성술에 속한다. 태어난 연·월·일·시를 구성하는 갑자의 네 기둥이 사주다. 네 기둥의 글자를 합하면 팔자, 그래서 사주팔자다. 물론 그 사상적 베이스는 ‘음양오행론’이다. 태아는 엄마의 자궁 안에서 단전호흡을 한다. 하지만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오는 순간 폐호흡으로 바뀌는데 그때 우주의 기운이 몸에 바코드처럼 새겨진다. 그래서 절기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태양이 황도 몇 도에 있었느냐에 따라 팔자의 ‘음양오행적’ 구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주팔자란 ‘몸에 새겨진 운명의 지도’인 셈이다.

팔자 혹은 운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당장 빈부귀천을 떠올린다. 부귀는 당연히 누리고 빈천은 무조건 피하고 싶은 욕망! 하지만 그런 마음 자체가 이미 ‘흉’하다. 생생불식하는 천지의 운행에 그런 ‘사심’이 통할 리가 있겠는가. 결국 욕망의 척도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모든 이의 팔자는 험궂을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시대는 거의 모든 이들이 자신의 팔자를 원망하고 한탄한다. ‘팔자타령’의 시대! 하지만 운명에 대한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건 타고난 존재의 리듬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보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 앎과 사랑은 하나다. 그렇게 운명을 사랑하는 힘이 생겨야만 비로소 팔자의 리듬과 배치를 바꿀 수 있다. 사주명리학에선 이것을 ‘용신’ 혹은 ‘개운법’이라고 한다. 원리는 당연히 순환이다. 막힌 것을 뚫고 넘치는 것을 덜어내는, 혹은 지나친 복은 덜어내고 겪어야 할 고생은 기꺼이 감내하는! 물론 이 모든 과정의 주체는 자신이다. 누구도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이 운명을 바꾸는 힘 또한 오직 자신의 심연으로부터 나온다. “자신을 구하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아가던 시대는 복되도다!”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 첫머리에서 한 말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 ‘길’이 끊어진 시대다. 통계와 수치가 길을 대신하고 그 길에는 ‘홈’이 깊게 파여 있다. 오직 소유와 증식을 향한 사다리만으로 이어져 옆을 볼 수도 전체를 볼 수도 없다. 하여, 타자의 삶을 대신 살아가고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니 다들 팔자가 사나울 수밖에. 하지만 우주적으로 볼 때 특별히 사나운 팔자란 없다. 팔자를 ‘사납게 해석하는’ 배치만이 있을 뿐. 그 맹목의 사다리를 걷어찰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의 진면목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팔자타령에서 운명애로!’ 사주명리학을 포함해 모든 점성술이 전해주는 공통의 메시지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지혜의 원천이기도 하다. 고로, 임진년에는 모두 바다의 정기를 품은 흑룡의 기운을 받아 ‘운명을 사랑하는 지혜’를 터득할 수 있기를!
(경향신문, 201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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