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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5>질병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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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3-16 22:09 조회3,3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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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것도 삶의 일부…“질병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멜로적 고백으로 종종 회자되는 대사다. 하지만 그 아우라를 걷어내고 그냥 ‘있는 그대로’ 음미해 보라.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보살행으로도, 혹은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는 통속적 푸념으로도 들릴 것이다. 헌데, 멜로적 순정이든 보살의 아픔이든 중생의 하소연이든 핵심은 같다. 살아있는 한 누구나 다 아프다는 것.

이 우주에서 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란 없다. “형기가 갖추어진 다음에 아(아)가 생긴다. 아란 채(채)이고, 채란 병을 말하는 것으로 병이 이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아-채-병. 동의보감에 따르면 질병은 이 세 스텝을 밟는다. 아는 원초적 불균형을, 채는 피로가 누적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형기가 갖춰지면서 동시적으로 시작된다. 결국 질병이란 생명의 시원 혹은 우주의 발생과 더불어 탄생했다.

지구는 23.5도 기울어져 있다. 태양이 지나다니는 황도 역시 삐뚤삐뚤한 타원형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사는 우주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인 것. 우리의 몸 또한 그렇다. 많은 모순과 왜곡을 안고 있다. 특히 심장과 신장의 관계가 그렇다. 심장(화)과 신장(수)은 일직선이 아니다. 비스듬하게 어긋나 있다. 이 간극만큼 아픔과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요컨대, 아픔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아파야 산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다.

하지만 우리는 질병과 삶, 질병과 건강을 날카롭게 분리한다. 건강은 정상적인 것이고, 아프다는 건 비정상적인 상태라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상화해야 한다. 현대의학은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 헌데, 이렇게 정상 비정상의 관점으로 다루게 되면 질병은 곧바로 열등한 것, 불행한 것이 되어 버린다. 아프니까 열등하다, 아프니까 불행하다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건 어디까지나 현대의학과 자본의 기준일 뿐이다. 생명과 우주의 차원에선 아픈 것도 삶의 또 다른 과정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원초적으로 장애란 없다! 또 질병과 불행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질병은 생명의 능동적 전략이기도 하다. 아픔을 통해서만이 삶의 새로운 질서가 창조되기 때문이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생으로 이동하기 위한 관문일 뿐이다. 우주의 운행이 멈추지 않는 한 생명의 순환계에 끝이란 없다. 죽은 뒤, 우리의 몸은 다시 우주로 돌아갈 것이다. 혹은 바람이 되고 혹은 공기가 되고 혹은 전자파가 될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또다시 생명의 질료로 쓰이게 될 것이다. 요컨대, 삶과 질병, 삶과 죽음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병과 죽음이야말로 살아있음의 표징이자 생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다. 자본주의는 이런 이치를 거부하는 시스템이다.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도 질병도 죽음도 다 상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병을 몰아내고 죽음을 지연시키고자 한다.

아프지도 죽지도 않는 삶을 원하는가?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드라큘라가 되면 된다. 그러면 500년이고 600년이고 계속 살아갈 수 있다. 헌데, 드라큘라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는가? 죽는 것이다. 왜? 죽어야 사니까. 죽음이 있으매 삶이 있으므로.

고미숙 고전평론가

(2012.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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