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8>숟가락 교육법 > 스크랩

스크랩

홈 > 자유게시판 > 스크랩

[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8>숟가락 교육법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3-23 22:10 조회3,439회 댓글0건

본문

교육의 핵심은 몸을 쓰는 것…창발성도 그때 가능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입니다.” 2005년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황정민이 남긴 유명한 소감이다. 영상 작업에서 스태프의 노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부각해준 말이다. 하지만 배우도 고생스럽긴 마찬가지다. 겨울에 더위를, 여름에 추위를 표현해야 하고, 밤낮도 없고, 끼니도 제때 먹기 어렵다.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노동도 이런 노동이 없다. 그러니 배우가 ‘숟가락 하나 얹었을’ 정도면 스태프의 고생은 가히 상상하고도 남을 만하다.

여기에 비추어보면, 우리 시대의 교육은 명실상부한 ‘숟가락 교육법’이다. “나 고3이야! 이런 거 할 시간이 어딨어?” 그러면 상황 끝! 어디 고3만 그런가. 초중고교생 모두 그렇다. 왜냐면 모두가 고3 예비후보니까. 한마디로 입시생은 가족 안에서 제왕이자 특권층이다. 의식주의 어떤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청소와 요리는 물론이고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말곤 손가락을 쓸 일도 없다. 진짜로 숟가락에 밥을 담아 직접 떠먹여주는 부모도 적지 않다. 이동은 당연히 자가용으로 한다.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학원으로, 발이 땅에 닫기도 전에 어디론가 옮겨지는 ‘공중부양’족이 대부분이다. 청춘은 봄이고 나무라 했다. 나무가 땅의 지기를 받지 못하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뿌리가 약하면 열매를 맺기는커녕 꽃샘추위도 견디기 어렵다.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학교는 배움터라기보다 서비스 기관처럼 보인다. 입시 공부 말고는 다 면제다. 청소도, 체육도, 서클 활동도 점차 줄어든다고 한다. 지난해 큰 이슈가 됐던 급식 문제만 해도 그렇다. 무상이냐 아니냐 이전에 더 중요한 건 어떻게 밥을 먹는가이다. 학생들은 그냥 주는 대로 먹기만 하면 되는가? 왜 학생들은 생활과 윤리의 주체가 되면 안 되는가?(참고로 필자가 소속된 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선 주방의 윤리가 가장 ‘지엄’하다. 밥도 직접 해야 하지만 절대 남겨서도 안 된다) 동선으로만 보면 입시생은 예전의 귀족보다 호사스럽다. 육체노동 면제는 물론이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각종 제도적 서비스들을 받는다.

하지만 이게 과연 특권일까? 몸을 쓰면 마음이 쉬고, 몸을 쓰지 않으면 마음이 바쁘다. 그래서 오히려 집중력은 떨어진다. 지식의 습득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몹시 비효율적이다. 그뿐 아니다. 죽어라 스펙을 쌓은 다음, 회사에 들어가면 “현장 감각이 없다”는 지적을 받으며 ‘생활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사회적으로 봐도 이런 비효율성이 없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무엇보다 움직여야 한다. 특히 몸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생활의 현장’이 있어야 한다. 창발성이나 자율성도 그때 비로소 가능하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지도리(문지방)는 좀먹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동의보감)

미국 정보기술(IT)업계 엘리트들은 자녀를 인터넷이 전혀 안 통하는 학교로 보낸다고 한다. 그곳에선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한단다. 청소와 밭일은 물론이고 뜨개질에 요리까지. 교육의 핵심은 ‘몸의 능동성’에 있다는 걸 비로소 눈치 챈 것이리라. 봄이 만물을 키우는 원리도 이와 같다. 새싹들은 그야말로 ‘자기주도적으로’ 생존한다.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는다. 공부 또한 그러하다.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밥상을 차릴 수 있어야 한다. 공부가 ‘궁푸’(工夫의 중국어 발음. 지식을 몸으로 터득하는 것)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2012. 3. 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양력 2024.4.17 수요일
(음력 2024.3.9)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