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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13>멜로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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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2-04-05 08:32 조회3,2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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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에 빠질수록 ‘기억’에 붙들려 감성과 지성 퇴행



MBC 제공


 
드라마 ‘해를 품은 달(해품달·사진)’의 히트 탓인지 대중문화계에 멜로가 한창 붐을 이루고 있다. 주지하듯이, 멜로는 ‘청춘의 에로스’에 대한 판타지다. 장르적으로 판타지라는 뜻이 아니라 ‘리얼리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좋게 말하면 판타지이고, 솔직히 말하면 ‘미망’에 가깝다.

‘해품달’을 예로 들어보자. 해를 품은 달을 사자성어로 말하면? 개기일식. 천지가 암흑 속에 빠져드는 시간이다. 첫사랑의 미혹 속에 천지가 다 깜깜해진다는 의미에서라면 이 제목은 아주 그럴싸하다. 한 나라의 제왕이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다면? 폭군이 될 징조다. 역사적으로 모든 폭군의 시대엔 ‘경국지색’이 있었다. 포사와 서시, 그리고 양귀비. 이 아리따운 여인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인해 천하는 도탄에 빠졌던 것이다. 이게 바로 ‘리얼리티’다. 그런 점에서 ‘해품달’의 마지막이 온통 피바람으로 장식된 건 당연지사다. 첫사랑을 지키기 위해 저토록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다니. 멜로는 참, 잔혹하다.

악당들이니 당연하지 않느냐고? ‘선과 악’ ‘적과 우리’를 선명하게 구분하는 이분법 역시 멜로의 미망 가운데 하나다. 삶은 결코 이분법이 아니다. 게다가 정치권력의 한복판에서 그게 가당키나 한가? 그래서 멜로에 빠질수록 감성과 지성은 자꾸 퇴행할 수밖에 없다. 멜로가 늘 기억에 붙들려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멜로가 그려내는 건 ‘지금 여기’의 사랑이 아니라 ‘그때 거기’, 다시 말해 오래전에 지나간 사랑의 이미지 혹은 그림자다. ‘해품달’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것 역시 작품 자체가 아니라 남자 주인공의 이미지였다. 부와 권력, 말끔한 외모에 지독한 순정, 그리고 남성적 카리스마까지.




그런 점에서 멜로가 에로스의 척도가 되는 건 실로 위험천만하다.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10대는 이미 신체적으론 *인이다. “여자는 14세에는 천계(天癸)가 이르러 월경이 때맞추어 나오므로 자식을 가질 수 있고, 남자는 16세에는 정기가 넘쳐흐르고 음양이 조화되어 자식을 가질 수 있다.”(동의보감) 이때야말로 에로스가 활발하게 분출되는 시기다. 그럼에도 학교에선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을 수 없다. 기껏해야 금지 아니면 회피다. 당연히 대중문화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헌데, 대중문화는 온통 ‘*시미’와 포르노 천국이다. 그런데, 멜로에선 정반대로 에로스가 철저히 봉쇄된다. ‘해품달’에서 보듯 두 남녀 주인공은 그토록 그리워하다 8년 만에 만나선 손만 잡고 잔다.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라니! 놀랍게도 저 20세기 초 이광수의 소설들에서부터 시작된 장면이다. 이것은 일종의 ‘성정치학’이다. 특히 여성들에게 ‘혼전순결’을 명령하는. 한편에선 성욕을 있는 대로 자극하고, 다른 한편에선 이토록 철저히 묵살해 버린다.

이런 분열증적 배치 속에서 ‘청춘의 에로스’는 왜곡되고 변형된다. 한 번도 그 생명력과 직면하지 못한 채 콤플렉스 아니면 변태의 온상으로 규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멜로는 함정이다. 사랑은 물론이고 삶조차도 잠식해 버리는!

고미숙 고전평론가
(12.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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