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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14>청춘, 에로스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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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4-12 09:02 조회3,5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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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는 ‘이팔청춘’이 누려야할 최고의 특권



 
‘동의보감’에 따르면 여성의 생체주기는 7단위로 변화한다. 7세, 14세, 21세…. 14세에 초경을 하고 49세에 폐경이 된다. 남성은 8단위다. 8세, 16세, 24세…. 16세부터 남자가 되고 64세가 되면 생식력이 그친다. 요컨대 여성은 14세, 남성은 16세부터 성인이다. ‘이팔청춘’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20세기 전만 해도 모두 이팔청춘에 혼례를 올렸다. 춘향이나 이몽룡 같은 ‘연애의 달인’들만 그런 게 아니라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도, 심지어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도 이 나이에 혼인하고 아이를 낳았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이팔청춘은 고사하고 서른은 넘어야, 심지어 마흔이 가까워서야 비로소 혼인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마흔이면 ‘불혹’이다. 불혹 즈음에 혼인을 하다니 실로 어이없는 상황이다.

그럼 지난 100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먼저 교육 기간이 엄청나게 길어졌다. 대학은 기본이고 석·박사에 해외유학까지. 취업의 기준 또한 까다로워졌다. 정규직에 연봉이 4000만∼5000만 원은 돼야 한다. 학벌과 연봉, 소위 스펙에 대한 요구가 커질수록 청춘의 에로스는 지연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참 이상하다. 문명이 발달하면 삶이 더 여유로워져야 하지 않나? 혼인적령기가 늦어지는 건 그렇다 치자. 청춘의 목표가 단지 결혼은 아니니까. 그 대신 청춘의 에로스를 발산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더더욱 협소해졌다. 그렇다고 생체주기가 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영양 과잉으로 ‘성적 조숙증’이 늘어나는 추세다. 결국 생리적으로는 조숙해지는데 정신적 사회적 연령은 한없이 느려지고 있는 셈이다. 문명과 자연 사이의 엄청난 간극과 소외! 여기가 바로 번뇌와 망상이 발생하는 원천이다.




에로스는 절대 ‘터부’의 대상이 아니다. 에로스야말로 생명의 자연스러운 발로이자 표현이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것 역시 에로스다. 우리는 모두 에로스의 산물임을 환기하라. 성교육의 핵심은 바로 이 에로스의 역동성을 알려주는 일이다. 아울러 에로스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다. 거기에는 방향도, 목표도 없다. 어디로 튈지, 무엇과 접속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이 카오스적 흐름 앞에서 멜로적 순정 따위는 애초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아주 이중적이다. 성을 상품화하는 데 골몰하면서 겉으로는 지독하게 내숭을 떨어댄다. 쉽게 말해 멜로와 포르노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는 셈이다. 에로스의 잠재력 혹은 역동성과 마주하려면 무엇보다 이 ‘분열적 배치’에서 탈주해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에로스가 결코 사랑과 성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철학을 라틴어로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고 한다. 소피아는 지혜, 필로스는 사랑이다. 곧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 또한 에로스적 충동에 연원한다. 지성보다 더 ‘에로틱한’ 것은 없다! 같은 이치로 사람이든 관계든, 혹은 사물이든 어떤 것과도 강렬하게 접속할 수 있는 생명력, 그것이 곧 에로스의 향연이다. 이팔청춘이 누려야 할 최고의 특권이기도 하다. 푸코는 말한다. “성은 숙명이 아니다. 성은 창조적인 삶을 위한 가능성이다.”(‘성, 권력, 정체성의 정치학’)

고미숙 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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