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21>길은 ‘사이’에 있다! > 스크랩

스크랩

홈 > 자유게시판 > 스크랩

[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21>길은 ‘사이’에 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4-24 14:38 조회2,997회 댓글0건

본문

시민들 주인의식 가져야 공동체가 행복하다


 

 
한 ‘기적의 도서관’에 갔다가 경험한 일이다(‘기적의 도서관’은 지방자치단체와 민간단체가 협력해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을 짓는 사업을 말한다). 도서관이 다 그렇지만, 그 도서관은 특히 아름다웠다. 아늑한 산세에 둘러싸인 주변 경관은 말할 것도 없고, 건물 내부의 인테리어는 소박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였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직원들이 “(아이들이 보고 난) 책을 정리하느라 아주 고달프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랐다. 책은 읽은 사람이 스스로 정리하는 게 아닌가. 또 아이들이라면 부모가 그렇게 하게끔 지도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공간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윤리적 수준은 이토록 초라하다니.

자, 한번 곰곰이 따져보자. 그렇게 멋진 도서관을 짓기까지는 돈도 돈이지만 엄청난 노고와 정성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비용과 수고를 기꺼이 감내한 이유는 무엇일까? 도서관이 단지 책을 관리하고 시험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책이 서로 어우러지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아가 책을 통해 모두가 자기 삶의 탐구자이자 주인이 되는 길을 열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기적의 도서관’이라고 이름 한 것 아닌가.

사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당장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가 ‘도서관’이라는 공간의 주인이 되면 된다. 주인이란 무엇인가? 누군가의 배려를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배려하는 존재다. 그런데 자기가 본 책조차 스스로 정리하지 않는다니. 마구 어질러 놓아도 누군가가 치워 줄 거라고 믿는 건, 굉장히 당연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소외의 극치다. 주체도 대상도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뒤에 도서관장님이 덧붙인 말씀, “일본에 도서관 시찰을 갔는데, 겉에서 보면 아무 특징이 없는 거예요. 근데, 딱 하나 다른 게 거기에선 어른이건 아이건 책을 스스로 정리하더라고요. 몹시 부러웠죠.”


예전에 공공기관은 몹시 권위적이었다. 시민 위에 군림하면서 명령하고 통제했다. 그때가 계몽의 시대라면 지금은 바야흐로 서비스 시대다. 백화점과 은행 같은 민간단체뿐 아니라 국가행정조차도 서비스가 되어 버렸다. 시민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제공해준다.(또는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럼에도 소외가 극복된 것 같지는 않다. 계몽의 배치와 마찬가지로 서비스 또한 주체와 대상을 고착시키는 탓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좋은 시설도 사람들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스스로를 주인이 아니라 소비자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서비스와 욕망의 악순환!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그야말로 새로운 윤리적 실험이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 사람과 책, 사람과 제도, 그 ‘사이’를 탐구하는!

열하로 가는 머나먼 여정, 생애 처음 압록강을 건너면서 연암은 묻는다. “그대, 길을 아는가?”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길은 저 강과 언덕 사이에 있다.” ‘사이’란 중간도 아니고 평균은 더더욱 아니다. 이항대립을 벗어나 제3의 길이 생성되는 현장이다. 아니, 생성 그 자체가 길이다. 정치 또한 그러하다. 정치는 계몽과 훈육이 아니다. 서비스와 봉사 또한 아니다.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자기 삶과 현장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그것이 바로 ‘기적’이고, 이 기적을 구현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12. 4. 2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양력 2024.4.18 목요일
(음력 2024.3.10)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