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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25>중년 남성을 위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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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5-08 14:11 조회3,5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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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男이여, 허심탄회하게 사람들과 교류하라”



 

 


“그렇게 해서 세상이 언제 바뀌죠?” 프리랜서인 나의 주 생업은 강연과 집필이다. 강연의 키워드는 주로 고전의 지혜, 앎과 삶, 공동체와 비전 등이다. 강의를 마치면 종종 앞에 든 것과 같은 질문을 듣게 된다. 앎이니 공동체니 하는 말들이 왠지 개별적이고 자족적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흥미롭게도 질문의 주체는 거의 중년 남성이다. 그 진정성과 의도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질문은 틀렸다.

무엇보다 이 질문에는 집단과 개인, 거시와 미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날카롭게 분리하는 이원론이 전제돼 있다. 전자는 큰 것, 후자는 작은 것. 그래서 일단 큰 것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대중, 지배적인 구조, 집단적 시스템 같은 것들이 항상 우위에 있고, 실존적 자유나 공동체적 연대 같은 건 하위에 속한다. 지난 100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한 정치적 논법이자 인식론적 기저다. 하지만 20세기와 더불어 종언을 고한 논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프레임에서는 결코 사회도, 개인도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이런 구획을 고수하는 한, 부분은 언제나 전체의 일부일 뿐이다. 즉 개인은 사회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그리고 결론은 늘 뻔하다.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은 희생돼야 한다. 또 공적인 것을 위해 사적인 것은 묵살돼야 한다. 양적 척도가 지배하면 비교를 통해 우열이 나누어지고 그 레이스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크고 강한 것에 대한 의존성을 키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두려움을 양산한다. 아주 역설적으로 국가와 사회, 조직이 발전할수록 그에 대한 개인의 의존성과 두려움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그래서인가. 중년 남성들은 조직과 지위를 벗어나 타자들과 허심탄회하게 교류하는 데 몹시 서툴다. 모든 경계들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이 디지털 시대에는 참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장벽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부분과 전체를 나누는 이분법을 해체해야 한다.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개체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개체와 사회가 본질적으로 연동되어 있음을. 고로 실존적 해방과 사회적 변화는 매개 없이, 즉각적으로 이어진다. “그대의 의식이 이 경이로운 지상에 살고 있는 다른 모든 인간들과 함께 나눠 가진 것이란 걸 안다면 삶의 방식 전체가 바뀔 것이다.”(크리슈나무르티,‘두려움에 대하여’) 요컨대 자신을 대면하는 일과 타자와 공명하고 집합적 리듬을 만들어가는 일은 결코 분리돼 있지 않다. 동시적으로 함께 간다.

이 동시성을 탐구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최근 곳곳마다 인문학의 광장이 활짝 열렸다. 하지만 그 광장의 주역은 여성들이다. 중년 남성들의 자리는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수량과 비교를 척도로 하는 사고방식, 그리고 집단의 권위를 벗어나 타자들과 교류하기를 꺼리는 습속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문득 ‘중년 남성을 위한 인문학’이라는 기획이 떠올랐다. 중년 남성들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탐구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그것이 낡고 오래된 이분법에서 벗어나 존재와 세계의 근원적 일치를 터득하는 깨달음의 장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고미숙 고전평론가


 


(동아일보, 12.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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