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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26>여성과 ‘그림자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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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5-08 14:18 조회3,2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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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우먼도 ‘아이와 남편’밖에 모른다


 

 
“우리 아이한테 어떤 고전을 읽히면 좋을까요?” 중년 남성들의 질문이 주로 공적이고 거시적인 것을 향해 있다면, 여성들의 질문은 대개 가족의 틀에 갇혀 있다. 고전의 스승들은 말한다. 자신을 구원하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혼자서 갈 수 있는 자만이 세상과 타인을 배려할 수 있노라고. 이것이 고전의 지혜이자 비전이라고 말하면 다들 깊이 수긍한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바로 저런 질문이 나온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여성들은 왜 모든 시선이 아이로 향하는 것일까? 왜 가족(혹은 모성)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을까?

보다시피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눈부시다. 단순히 직업적 측면만 말하는 게 아니다. 대학이든 인문학 광장이든 지성을 탐구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여성이 대세다. 이 정도면 ‘후천개벽’의 시대라 해도 좋을 지경이다. 그러니 참 이상한 노릇이다. 이렇게 지적, 사회적 활동의 장이 활짝 열렸는데도 여성의 욕망은 여전히 낡은 울타리 안에서 맴돌고 있다. 모성의 발현이라고 하기도 뭣한 것이, 이 가족의 범위에는 오직 ‘아이와 남편’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고모나 삼촌, 혹은 사돈의 팔촌이 포함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엄마, 아빠, 아이로 구성되는 가족 삼각형, 이것이 우리 시대 여성을 지배하는 세계다. 어떤 성취를 이루건 여성은 이 삼각형의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

물론 조선시대 여성한테도 가족이 삶의 터전이었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성인이 되면 남편에게, 노인이 되면 자식에게 의존해서 살았다. 대부분의 노동이 ‘힘과 근육’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여성은 생산성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가부장제의 굴레 속에서 지성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회적 진출이 원초적으로 차단됐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선조 여성의 삶은 결코 협소하지 않았다. 가족의 범위가 서너 대에 걸쳐 있었을 뿐 아니라 사돈의 팔촌, 이웃사촌까지 상하좌우로 연결돼 있었다. 또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에 의식주를 전방위적으로 담당하다 보니 여성의 자존감과 카리스마는 엄청났다. 하여,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그녀들은 ‘에로스의 달인’이자 ‘복수의 화신’이었다. 그야말로 ‘위풍당당 그녀들’이었다(궁금하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전집을 참조하라).




이에 비하면 우리 시대 여성의 현장은 참으로 협소하기 짝이 없다. 가족은 일촌 범위를 넘지 못한다. 모든 노동은 화폐로 대신하고, 관계는 교환과 계약 그 ‘너머’를 사유하지 못한다. ‘학교 없는 사회’로 유명한 교육혁명가 이반 일리히는 일찍이 현대의 주부 노동을 ‘남편의 임금 노동에 가려진 그림자 노동’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적확한 표현이다. 단지 주부 노동뿐 아니다.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부 노동에 비해 단지 화폐의 양만 늘어났을 뿐, 세상을 보는 시선이나 욕망의 배치에서는 별반 달라진 바가 없다.

이것이 과연 여성 해방의 비전인가? 가부장제가 타파되고 ‘후천개벽’이 되었다면 삶의 양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결국 아이와 남편의 그림자로 살아갈 뿐이라니!

고미숙 고전평론가
(동아일보, 12 . 5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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