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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28>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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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5-15 08:31 조회3,3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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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은 생명의 원천이자 배경… 비교대상 안돼



 

 
나는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 깜짝 놀라셨으리라.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귀를 기울여 보시길. 앞서 살펴보았듯 가족은 ‘비밀의 정원’이자 ‘상처의 온상’이다. 그래서 그 상흔을 치유하기 위해선 역시 가족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통념이다. 비밀, 상처, 치유, 사랑, 그리고 가족. 이 낱말들은 거의 동의어처럼 붙어 다닌다.

언뜻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이 계열은 허점투성이다. 먼저 이 세상에 성인이 될 때까지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될까. 비근한 예로, 우리 부모님 세대는 사춘기가 되기도 전에 가장이 되고 열 식구 이상의 생존을 책임져야 했다. 상처로 치자면 이보다 더 큰 상처가 있을까. 하지만 그래서 더 자립적이 됐고 삶에 대한 자긍심 또한 높다. 그에 비하면 지금 세대는 사회적 배려는 물론이고 부모와의 관계 또한 훨씬 밀착된 편이다. 그런데도 상처가 끊임없이 파생된다면 그건 객관적인 정황이기보다는 정서적 배치의 산물에 가깝다. 즉 인생사의 고비마다 겪어야 할 갖가지 굴곡과 모순을 상처라는 프레임에 구겨 넣은 탓이라고나 할까.

이때 주로 동원되는 개념이 유년기의 무의식이다. 사람들은 마치 무의식이 모든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인 양 생각하지만, 그 또한 일종의 난센스다. “무의식은 기억에 저장됐다가 어떤 낱말을 통해 살아난다. 예를 들어 냄새를 맡거나 꽃 한 송이를 보면 그대는 당장 생각해낸다. 무의식은 창고나 저장고일 뿐인데, 우리는 그게 뭐 대단한 것이나 되는 양 호들갑스럽게 야단법석을 떤다. 그건 의식적인 마음만큼이나 하찮고 피상적인 것이다.”(크리슈나무르티, ‘두려움에 대하여’)

더 이상한 건 가족으로 인해 그렇게 상처를 받았다면 이후에는 가족을 벗어나 다른 관계를 구성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어째서 기어코 다시 가족이라는 틀로 귀환하려고 하는 걸까. 그것도 오직 일촌으로 구성된 ‘핵가족’으로. 예컨대, 요즘 스타들은 틈만 나면 ‘가족사랑’을 과시한다. 딸바보, 아들바보 등. 참으로 희한한 현상이다. 혈연이란 무엇인가? 유전자를 공유한 집합적 신체다. 곧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는 또 다른 ‘나’다. 말하자면 생명의 원천이자 배경에 해당한다. 그래서 ‘천륜’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과시하고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인정욕망’에 가깝다. 인정욕망은 결국 소유와 증식의 법칙에 종속된다. 남보다 더 많이, 더 강렬하게. 이렇게 비교의 레이스를 타다 보면 결국 사랑은 상품이 되고 만다. 하긴 백화점이나 은행이야말로 사랑이 넘치는 곳이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하루 종일 외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고객의 삶이 아니라 고객의 카드다. 이런 흐름에 휩쓸리다 보면 정말 ‘무의식적으로’ 사랑은 화폐화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 순간 사랑의 생명력은 종식된다.

비밀, 상처, 치유, 사랑, 그리고 가족. 이 계열의 결정적 함정이 여기에 있다. 그 은밀한 배후이자 종결자는 다름 아닌 화폐다. 그래서 하면 할수록 서로를 아프게 할 수밖에 없다. 훔치고, 속이고, 튀고. 남는 건 오직 상처와 원한뿐. 하여, 나는 절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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