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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30>연애와 우정이 공존 불가능하다는건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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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5-20 11:48 조회3,79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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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정치학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을 이룬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100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래된 옥으로 축을 만들어 가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놓고 서로 마주 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이덕무 ‘선귤당농소’)

이덕무(1741∼1793)는 18세기 ‘지성사’의 축이었던 ‘연암학파’의 일원이다. 이 글은 연암학파가 토해낸 수많은 ‘우정론’ 가운데서도 절창에 속한다. 우정이 이렇게 지순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니. 하지만 현대인들이라면 문득 이런 의혹에 휩싸일지도 모르겠다. 이게 정말 가능해? 혹시 동성애 아냐?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우리 시대 감정교육의 수준이다. 현대인들에게 열정의 파토스란 이성애든 동성애든 오직 성적 욕망을 전제로 한 관계뿐이다. 하여 우정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는지, 얼마나 존재의 심연을 뒤흔들 수 있는지를 감히 짐작조차 못한다.

하지만 근대 이전만 해도 우정이 훨씬 더 보편적인 감정이었다. ‘삼국지’, ‘수호지’, ‘임꺽정’ 등 고전들의 테마는 하나같이 우정과 의리였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우정은 결코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중국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홍루몽’은 그야말로 ‘여인천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아름답고 개성 넘치는 여성들이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주인공 가보옥은 남성이지만 이 여인천하를 이끄는 구심점이자 여성보다 더 여성성을 구현한 존재다. 한 여인을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다른 모든 여인들과도 깊은 교감을 나눈다. 여성들 또한 남성을 둘러싼 쟁투에 골몰하지 않고, 세대와 계층을 넘어 우정의 향연을 펼친다. 그녀들의 우정은 비단결처럼 부드럽지만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치열하다. 기꺼이 목숨을 던질 정도로.



그럼 우리 시대는 어떤가? 보다시피 우정은 삶의 지평에서 증발해 버렸다. 친구나 의리 같은 말은 조폭영화에서나 접하는 ‘사어(死語)’가 됐다. 대신 그 자리를 연애와 성이 차지해버렸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연애와 우정은 절대 공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유치한 편견에 불과하다. 사랑과 우정은 그렇게 양적으로 배분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둘은 서로 다른 힘의 벡터이자 에너지 장이다. 만약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삶은 한없이 초라해질 것이다. 실제로 우리 시대의 사랑이 삶을 잠식하는 ‘블랙홀’이 되어버린 것도 바로 우정이라는 배경을 잃어버린 탓이다.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우정이 되살아나는 길은 진정 없는 것일까? 연애와 성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려면, 혹은 가족이 ‘타자들의 공동체’가 되려면, 무엇보다 우정과 신의라는 가치의 복원이 절실하다. 그런 점에서 우정은 윤리적 덕목을 넘어 정치적 명제에 해당한다. 실제로 새로운 시대에는 늘 ‘우정의 정치학’이 출현했다. 18세기 연암학파가 그러했고, 스피노자와 니체, 이탁오 등 세계 지성사의 이단아들은 모두 낡은 사유를 전복하는 무기이자 시대적 화두로 우정을 제시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고미숙 고전평론가


 


(동아일보. 12. 5. 12)

댓글목록

곰숙님의 댓글

곰숙 작성일

<p>원 제목은 &lt;우정의 정치학&gt;이었는데.... 대체 왜 이렇게 길고 아리송한 제목으로 바뀌었는지 참 아리송~ 합니다. ^^ </p>

양력 2024.3.29 금요일
(음력 202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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