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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32>‘안정’이라는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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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5-22 13:39 조회3,5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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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이 높을수록, 직장이 좋을수록 안정은 없다


 

 


청년 1호: 그는 서울대 법대 졸업예정자다. “졸업하면 뭐 할 거야?” “공기업에 들어가야죠.” “왜?” “그래야 안정적이니까요.” 여자 1호: 그는 직장에 다니는 미혼 여성이다. 연애 중이지만 심리적으로 늘 불안하다. 긴 고민 끝에 그녀는 이렇게 결정했다. “올해는 어떻게든 결혼을 해서 긴 방황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요.” 이들에 따르면 공기업과 결혼이야말로 안정의 보증수표다. 아, 물론 그 전에 학벌이 있다.

이 과정을 한 번에 보여주는 예화가 있다. 한 여고에서 필자와 학생들이 나눈 100% 실제 대화다. “아직도 하루에 열두세 시간씩 수업을 받다니,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대학에 가려고요.” “대학은 왜 가는 건데?” “취업해야죠.” “취업하면?” “돈을 벌어야죠.” “그 다음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죠.” “그 다음엔?” “다시 아이를 교육시켜야 돼요.” 처음엔 당당했다. ‘당연한 걸 왜 묻지?’ 하는 식으로. 그러다 점점 뒤로 갈수록 학생들의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마지막엔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10년, 20년 후 자기 아이들도 이 자리에 앉아 이런 대답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기가 막혔던 것이다. 아무리 안정을 원하기로 영원히 이런 쳇바퀴를 돌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이렇듯 우리 시대의 화두는 단연 ‘안정’이다. 학벌 불문, 세대 불문, 지역 불문, 이구동성으로 안정, 안정을 외쳐댄다. 하지만 보다시피 안정을 향한 이 질주는 불안하기 그지없다. 일단 이 레이스에는 도달 지점이란 것이 없다. 정상이 저기인가 보다 하고 정신없이 달려가 보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어떤 성적, 어떤 직업을 확보하면 “이제 됐어, 이젠 정말 안정을 찾았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성적이 높을수록, 직장이 좋을수록 안정은 없다! 결혼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 시대의 결혼은 가장 ‘불안정한’ 코스다. 부부관계를 지키는 것도, 부모 자식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참으로 어렵고 또 어렵다.



이것은 비단 경제구조만의 문제는 아니다. 디지털 문명은 모든 고정된 것을 연기처럼 날려버린다. 국경, 인종, 성, 계급 등 20세기를 지배했던 모든 경계들을 가차 없이 해체하면서 전 지구적 유동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디지털 문명이다. 이런 문명적 조건 안에 살면서 안정을 희구한다는 건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더 근원적인 이유도 있다. 우주는 상생과 상극의 매트릭스다. 즉 상생은 상극으로, 상극은 또 상생으로 끊임없이 변전한다. 우리 몸의 오장육부 역시 생극의 경연장이다. 예컨대 간(목)은 심장(화)을 생하지만(木生火), 신장(수)은 심장을 극한다(水克火). 간은 심장의 순환을 도와주지만, 신장이 그것을 제어해주지 않으면 심장의 불은 제멋대로 타오른다. 요컨대 우주건 몸이건 한순간도 안정된 상태로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가장 안정적인 상태는 죽음이다. 설마 죽음이 목표인 건가?

그리고 더 결정적인 사항 하나. 학벌, 직업, 결혼 등 안정을 보장해줄 거라고 믿는 이 세 개의 코드를 지배하는 ‘숨은 신’은 화폐다. 왜 공부를 하는가? 왜 정규직이 필요해? 왜 결혼을 하지? 이 모든 물음의 답은 ‘돈’이다. 하지만 세상에 돈만큼 불안정하고 돈만큼 변덕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고미숙 고전평론가


 


(동아일보, 12.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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