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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와 우주]<35>정규직에 담긴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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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5-29 14:52 조회3,1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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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자체가 모든 삶의 기준이 된다니…


 

 


인간은 원초적으로 ‘프리랜서’다. 프리랜서로 태어나 프리랜서로 죽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직업이 정해져 있다면 그건 신분사회다. 알다시피 근대 이전에는 그랬다. 귀족과 노비, 혹은 ‘사농공상’의 구획이 엄격해 한번 농민으로 태어나면 대를 이어 농업에 종사해야 했다. 이건 실로 불공평하다. 농업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모순과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는 참으로 많은 대가를 치렀다. 그 덕분에 지금은 누구도 이런 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는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가 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최고 목표는 ‘정규직’이 됐다. 비정규직의 조건이 그만큼 열악하다는 뜻이겠지만, 그렇다고 정규직 자체가 모든 삶의 기준이 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몹시 불편하다. 어떤 일, 어떤 활동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정규직 그 자체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직업이란 단지 경제 활동일 뿐 아니라 생명의 정기를 사회적으로 표현하고 순환하는 행위다. 따라서 단순히 돈과 지위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가치들이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그런데 일의 종류나 성격은 불문하고 무작정 정규직이라니. 이건 그냥 “비정규직은 죽어도 싫어요”라는 절규에 가깝다. 이게 바로 ‘전도망상(顚倒妄想)’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노동의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누구도 남의 부림을 받으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도 ‘정규직 타령’을 하다보니 이 원초적 본능을 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더 ‘야무진’ 이들은 의사 변호사 교사 등 소위 ‘사자(字)’ 들어가는 직업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 담긴 욕망은 더 가관이다. 정규직은 언제 잘릴지 모르니 평생이 보장되는 직업을 갖겠다는 것이다. 의사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직업이고 변호사는 법을 집행하는 직업이며 교사는 사람을 키우는 직업이다. 한마디로 대중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정을 위해서 그걸 선택한다고? 대체 얼마나 불안하면 이런 지경에 이르는가?

하지만 잘나가는 정규직이든 ‘사자’가 들어간 직업이든 프리랜서의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다.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안전한 영토’는 없다. 우주의 원리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현대과학의 전언에 따르면 우주의 에너지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물질은 단지 4%에 불과하다. 24%는 암흑 물질이란다.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다. “암흑 에너지는 우주 총에너지의 무려 72% 정도를 차지하며 우주의 팽창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이석영, ‘빅뱅우주론 강의’) 요컨대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우주에 살고 있다. 그러니 개별 인생에도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존재하겠는가. 인간이 원초적으로 프리랜서라는 건 이런 이치에서다.

프리랜서는 말 그대로 ‘길 위의 인생’이다. 어떤 조직과 지위의 보장도 없지만 그렇기에 매순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 욕망과 능력의 일치! 그래서 자유롭다. 하여 난 늘 궁금하다. 정규직은 과연 자신 안에 이런 열망이 들끓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고미숙 고전평론가


 


(동아일보, 1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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