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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43>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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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6-19 18:49 조회3,710회 댓글2건

본문

더부살이 가능하면 거기가 곧 마을… 삶의 불안 없어



 

 


마하트마 간디. 비폭력의 상징이자 위대한 영혼으로 추앙받는 이가 설파하는 진리는 극히 단순하다. 스와라지, 자치가 곧 그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힘으로 노동하고, 그 노동의 힘으로 정신적으로 자립하고, 그 자립하는 정신들이 상호호혜의 관계를 맺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이상적인 꿈. 그걸 위해서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나 대량 생산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오히려 다양한 수공업들이 리바이벌되는 작은 ‘마을들’의 연합. 간디가 꿈꾼 인도의 미래였다.”(‘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바야흐로 글로벌리즘의 시대다. 동의하든 않든 전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이 흐름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나는 세계가 거대한 제국으로 흡수 통합되는 것.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예견한 ‘디스토피아’가 그것이다. 또 하나는 국경과 인종, 문화와 풍속, 가족과 혈연의 경계를 넘어 마을 단위로 헤쳐모여 하는 것. 작은 마을들의 연합으로서의 지구촌. 간디의 비전과 지혜를 되새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을은 공동체의 최소 단위다. 마을을 움직이는 동력은 제도나 시스템이 아니다. 자치와 자율이다. 전자가 경제적 자립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윤리적 주권에 대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구현되는 방식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 하나의 사례가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연구실인 ‘남산강학원&감이당’이 그것이다. 연구실에는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공존한다. 출신 지역도 제주도, 문경, 청주, 춘천 등 전국적이다. 이들은 숙식을 연구실에서 해결한다. 연구실 주방의 밥값은 2000원이다. 요리는 돌아가면서 한다. 2000원으로 어떻게 유지되느냐고? 그 비밀은 ‘선물의 경제학’에 있다. 전국 각지에서 쌀과 과일, 반찬 등이 무상으로 들어온다. ‘사람과 공부가 있는 곳엔 밥이 온다’는 이치를 실감하기에 충분하다.






다음으로 숙식은 다양한 방식의 공동주택으로 해결한다. 9인 이상이 함께 사는 기숙사형 공동주택도 있고, 3∼4인이 함께 거주하는 공동주택도 있고, 혹은 가까운 고시원에 개별공간을 얻는 방식도 있다. 집은 최소한의 휴식만 가능하면 된다. 공부하고 활동하고 노는 것들이 모두 연구실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숙박에 드는 비용은 16만 원에서 20만 원 사이. 이렇게 해서 연구실 식구들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서 1달 40만 원에 의식주를 해결한다.

그 비용도 스스로 해결한다. 자립의 토대는 고전과 글쓰기다. 고전의 텃밭을 일궈 글을 쓰고 그것을 세상에 소통시킴으로써 경제 활동을 한다. 부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돈 때문에 삶이 소외되는 경로를 밟지는 않는다. 아는 만큼 글을 쓰고 버는 만큼 누리면 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게 살면 불안하지 않느냐고? 놀랍게도 전혀 불안하지 않다. 정규직들은 빚과 불안을 안고 살지만, 우리 연구실의 백수들은 빚도, 불안도 없다. 이게 더부살이의 힘이다. 더부살이가 가능하면 거기가 곧 마을이다. 우리는 믿는다. 마하트마 간디가 설파했듯이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진리를.

고미숙 고전평론가
(2012. 6. 15 )
댓글목록

곰숙님의 댓글

곰숙 작성일

<p>위에 인용된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는 문탁(이희경) 여사가 서울신문에 쓴&nbsp;글임. 신문 편집 과정에서 생략되어 버렸음. 쳇! </p>

박장금님의 댓글

박장금 작성일

<p>문탁샘이 서울신문에 쓰신&nbsp;간디글을 퍼옵니다. 읽으소서~^^</p>
<p>&nbsp;</p>
<p>[<strong><span style="COLOR: #3a32c3">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9)‘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span></strong></p>
<p class="title_sub"><strong><span style="COLOR: #3a32c3">물질문명 넘어선 삶에서 인도의 ‘길’을 찾다</span></strong></p>
<p class="title_sub"><strong></strong>&nbsp;</p><strong>
<p><strong>간디! 흔히 ‘인도 독립의 아버지’, ‘힌두의 성자’라고 불리는 ‘위인’. 그러나 청년 시절의 간디는 조혼이나 카스트 제도를 부끄럽게 여겼고, 육식을 금지하는 힌두교 전통을 낙후된 것이라 생각했던 식민지의 젊은 문명론자였다. 그가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인도의 대개혁을 위해 성심을 다해 일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당연한 일. 이 촌뜨기 식민지 유학생은 식민 본국에 도착하자마자 ‘영국 신사’의 꿈을 꾸면서 새 옷을 맞추고, 실크 모자와 야외복과 고급 넥타이를 사고, 그것도 모자라 댄스와 프랑스어와 웅변술과 바이올린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빠진다. 물론 이런 부박한 충동은 금세 극복되었다. </strong><br /><br /><!-- 포토 시작 --></p>
<p class="title_sub">&nbsp;<br /><br /><!-- 포토 시작 --></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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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align="middle" sizcache="0" sizset="10"><!--포토 하단 광고--><!--포토 하단 광고--></td></tr></tbody></table></div>
<p><!-- 포토 끝 -->그렇다고 ‘문명=개혁’에 대한 간디의 이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간디는 귀국 후 집안에서 자녀에게 체조 교육을 시키고, 음식을 개량하고 의복을 서구화했다. 그에게 영국은 문명과 이성의 대명사였고, 인도는 교화시키고 개혁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식민지 엘리트 청년은 스스로를 위대한 대영제국의 신민으로 인식하고 있었다.<br /><br />그러나 바이샤 계급 출신으로 인도 사회에서는 흔하디 흔한 ‘식료품상’이란 뜻의 ‘간디’란 이름을 가진 이 청년은 변호사 자격을 따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개업하기가 어려웠다. 집안의 꿈이었던 정치 관료로 출세하기란 더 난감해 보였다. 간디는 스물넷에 ‘잘나가는 변호사’를 꿈꾸며 남아프리카로 떠난다. <br /><br />안타깝게도 날선 바지에 영국식 양복을 입은 변호사도 그곳에선 ‘갈색 피부’에 불과했다. 1등석 차표를 지녔지만 “같이 못 타고 가겠다.”는 백인의 말 한마디에 강제로 끌려나와 낯선 기차역에 버려진다. <br /><br />최초의 충격! 그랬다. 간디는 당시 남아프리카에 5만명가량 존재했던 이주노동자, ‘쿨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쿨리들의 구심점이 되어 버린 간디. 이제 스물여섯 살 청년 간디는 ‘쿨리’들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는 ‘인권 변호사’가 되었다. 결국 남아프리카의 나탈에서 인도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정치가, 혁명가의 삶을 살게 된다. 이후 간디는 23년간 남아프리카에서 그리고 귀국 후 조국 인도에서 죽을 때까지 정치 지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br /><br /><!-- 포토 시작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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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photo_caption"><span class="KLexceptTag">▲ 물레로 실을 잣고 있는 간디의 생전 모습.</span> </td></tr></tbody></table></div><!-- 포토 끝 -->
<p><br /><br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에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대영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전국적인 정치 지도자가 자신이 해 왔던 것은 정치적 실험이 아니라 “정신적 실험”이며 ‘모크샤’(자기 구원)를 향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p>
<p>&nbsp;</p>
<p>물론 징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학창시절에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기억이 없다.”거나 도둑질을 했을 때 깊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속죄를 했다는 식의 자기 성찰은 진지하다. 그러나 이런 특징을 모든 위인이나 성인의 특징이라고 말해버리면 간디는 그냥 ‘본투비(Born to be) 성인’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간디의 삶은 그런 게 아니었다. 매번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낯선 상황, 낯선 사건에 놓였고, 매번 그 현장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영국에 협력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같은 정치적 문제에서부터 육식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같은 일상적인 문제에까지 간디에게 쉬운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br /><br />처음에 그는 책을 통해서 진리의 길을 발견했다. 그가 자발적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유학 시절에 읽었던 책들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시절 이후 그가 생산해야 하는 진리의 길은 매번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었던 투쟁의 한복판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놀라울 정도의 윤리적 감수성으로 매번 창조적인 ‘진리 실험’을 한다. 소위 ‘비폭력 불복종’이라고 불리는 ‘사티아그라하’ 역시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br /><br />따라서 ‘사티아그라하’는 단순한 정치적 불복종, 지문찍기를 강요하는 영국 지배에 대한 정치적 저항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정신적 고결함을 파괴하며, 인간 관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폭력에 대한 불복종이었다. 그것은 영국을 향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맹세’이기도 했다. 나부터 한없이 고귀해지겠다는, 나부터 한없이 낮아지겠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맹세.<br /><br />간디의 진리 실험이 더해질수록 그는 유명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삶은 점점 더 간결해졌다. 그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만큼만 입었으며(윈스턴 처칠은 그가 “반쯤 벌거벗은 몸으로 총독 궁전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자 기절초풍하며 “경악스럽고 역겹다.”고 했다), 가장 비천한 불가촉천민이 하는 일, 청소나 똥 푸는 일을 했다. <br /><br />그러나 그런 일들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간디의 아내는 때때로 절망하고 울부짖었으며,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났다. 맏아들은 마치 아버지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말썽을 피우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명하고 단호했다. 비록 때때로 좌절하고 비틀거렸지만 그는 단 한번도 ‘사티아그라하’, 모든 폭력과 지배에 대한 그 위대한 불복종을 멈춘 적이 없다. <br /><br />간디의 물레! 그건 간디의 상징이고, 인도 독립의 상징이고, 나아가 모든 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해서 진부하기조차 한 물레! 그러나 간디의 물레, 그것은 단순한 ‘국산품 애용’ 운동이 아니다. <br /><br />흔히 자치로 번역되는 ‘스와라지’ 역시, 단순한 정치 체제를 일컫는 말은 아니다. 그건 사람들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 인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형제, 자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나아가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정신적 힘을 의미했다.<br /><br />도대체 인도가 왜 식민지가 되었는가. 물론 동인도회사의 지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히 그것 때문인가. 그 이면에는 돈을 벌기 위해 인도로 들어온 영국 상인만큼 단숨에 돈을 벌고자 했던 인도인의 욕망과 협력이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인도인의 마음에 뿌리박힌 영국 문명에 대한 동경, 물질과 화폐에 대한 욕망. 독립과 해방은 영국 통치가 끝나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영국적 삶의 방식 전체, 근대 문명 전체가 종식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br /><br />따라서 ‘물레’는 도구가 아니라 비전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 힘으로 노동하고, 그 노동의 힘으로 정신적으로 자립하고, 그 자립하는 정신들이 상호호혜의 관계를 맺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이상적인 꿈. 그걸 위해서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나 대량생산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오히려 다양한 수공업들이 리바이벌되는 작은 마을들의 연합. 간디가 꿈꾼 인도의 미래였다.<br /><br />마을 스와라지에 모든 사람이 환호와 갈채를 보냈을까. 아니다. 타고르는 ‘실을 잣고 천을 짜는 것’이 과연 한 민족의 구루가 전하는 메시지로 적절한가에 대해 간디에게 물었고, 간디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고칼레조차 간디의 ‘스와라지’ 이상을 어리석은 짓이라 비웃었다. <br /><br />간디는 대답했다. “나는 원시적 방법 자체를 위해 원시적 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시적 방법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는 것은 이 방법 말고는 할 일 없이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 마을 사람에게 일자리를 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덧붙인다. “한 걸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네.”<br />절대적 빈곤 속에서 술과 아편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존심과 고결함을 돌려주는 일. 상호 의존과 형제애를 일상에서 실감하는 일. 노동과 명상과 섬김이 함께하는 마을에서의 삶! 그건 어떤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간디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인도의 비전, 아니 인류의 비전이었다.<br /><br />1947년 의회를 통과한 인도독립법령에 따라 8월 15일 영국의 인도 지배가 종식되었다. 어찌 보면 간디의 이상이 실현된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립의 날, 그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독립은 온갖 적대와 폭력 속에서 힌두와 이슬람이 결국 결별을 하는 분단 인도가 탄생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br /><br />뿐만 아니다. 평생 간디를 추종했고 간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네루는 간디의 스와라지 이상을 버렸다. 그는 중공업을 기반으로 한 ‘발전된 인도’를 열망했다. 간디의 머리에는 타고르의 시가 떠나지 않았다. “혼자 걸어가라!” <br /><br />간디는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얼마 못가 암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투비 성인’으로 출발하지 않았지만 위대한 영혼’으로 잠들었던 간디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간디의 출발점에 다시 서고 있는 게 아닐까. 혁명의 길과 구원의 길이 다른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br /><br />이희경 문탁네트워크 연구원<br /><br /><!-- 본문 뉴스캐스트(오른쪽) :: start --></p>

양력 2024.3.29 금요일
(음력 202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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