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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48>상처도 스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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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6-28 08:45 조회2,9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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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상처 더 입힌다



환상 속의 어머니와 실제의 어머니는 다르다.


 

 

어렸을 적 잘 씻지를 않아서인지 자주 종기가 났다. 종기가 나면 몸살을 앓듯 끙끙 아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종기가 거의 없다. 온갖 백신으로 전방위적인 방어벽을 설치하기 때문. 그 대신 아토피라는 ‘괴질’을 앓는다. 10명 중 4명꼴이란다. 그런데 아토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소위 ‘상처(혹은 트라우마)’가 그것이다. ‘마음의 아토피’라고나 할까. 많은 이가 이 병을 앓고 있다. 남녀노소, 계급 고하, 학벌 차 등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상처 받은’ 존재로 규정한다. 이쯤 되면 상처가 곧 정체성이자 스펙인 셈이다.

더 놀라운 건 그 상처의 유래다. 정신분석이 그렇듯이 대개 그 시원은 유년기에 있다. 심지어 배 속의 태아 시절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자신의 삶이 이렇게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내용은 공통적으로 ‘애정결핍’, 특히 ‘모성결핍’인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 지금 이렇게 우울하고 무기력하다고? 이런 논리는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짜다. 삶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붙들어두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만약 10년, 20년이 넘도록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사건 자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내가 그 기억을 떠나보내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 지점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즉 ‘나는 왜 이렇게 슬픈 유년기를 보내야 했을까’가 아니라 ‘나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그 기억을 붙들고 있을까’ 하는.

어떤 비극도 시간이 지나면 전후좌우 맥락이 파악되는 법이다. 그걸 깨달으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가 그 기억을 계속 ‘동일한’ 방식으로 곱씹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미 그 기억은 원래의 사건과는 무관한 나만의 ‘자의식’이 된다. 자의식이 공고해질수록 외부와의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아주 역설적이게도 소위 상처받은 이들일수록 그걸 빌미로 타인에게 마구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그 대상 또한 엄마인 경우가 많다. 원인 제공도 엄마요, 한풀이 대상도 엄마인 것.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모성이 무슨 동네북도 아니고, 이렇게 툭하면 호출 대상이 되다니 말이다. 종기를 제거할 때는 인정사정 두지 말고 가차 없이 짜내야 한다. 그래야 뿌리가 뽑힌다. 마음의 종기 또한 마찬가지다. 상처의 언저리만 건드리지 말고 가차 없이 발본색원해야 한다. 그 온상은 보다시피 ‘모성’이다. 헌신과 배려, 희생과 자책감 등 모성을 둘러싼 이미지는 대부분 20세기 이후 권력과 자본에 의해 구성된 것들이다. 이 ‘만들어진’ 모성을 전제하는 한 모든 이는 결핍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중국 문학의 대가 루쉰은 한 잡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자애로운 엄마가 있는 것이 행복할지라도, 그렇다고 어미 없는 자식이 됐다 해서 전적으로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거꾸로 더욱더 용감하고 장애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남아로 자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삶은 결코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상처 또한 스펙처럼 쌓이고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 개의 길, 천 개의 고원’을 향해 열려 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동아일보, 12.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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