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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49>‘인정욕망’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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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7-11 15:13 조회3,56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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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불행해”는 잘나가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 것


 
아프고 괴로우면 그때 비로소 세상과 타인이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앓는 ‘마음의 병’은 놀랍게도 그 반대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해!” “왜 사람들은 나만 미워할까?” 하며 오직 자신만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은 안중에 없다. 그만큼 타인의 삶에 무관심하다. 더 정확히는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윤리가 사라져 버렸다. 즉 ‘입장 바꿔’ 생각할 줄을 도통 모른다. 그 대신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겠다는 ‘인정욕망’은 하늘을 찌른다. “내가 제일 불행해”는 사실 “내가 제일 잘나가”고 싶은 욕망을 거꾸로 투사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청춘 남녀가 짝짓기를 할 때의 기준은 무엇인가? 외모든 직업이든 무조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해야 한다. 누군가 그랬다. 사랑이란 ‘무리 속에서 특이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특이성이란 어떤 가치로도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을 말한다. 하지만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것이라면 특이성도 고유성도 아니다. 쉽게 말해 남 좋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셈이다. 또 애정은 늘 과잉으로 표현해야 한다. ‘너는 나의 운명’ ‘그대 없인 못 살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등. 결정적인 순간에 내뱉어야 하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주고받는다. 왜냐고? 그래야 남들이 부러워하니까. 스킨십이나 프러포즈 역시 꼭 ‘남들 앞에서’ 해야 한다. 선상 이벤트, 서프라이즈 파티, 무슨 무슨 데이 등. 하여 연인들은 사랑 자체보다 온갖 행사를 뛰느라 바쁘다. 당연히 남들의 부러움을 사기 위해서다. 딱 그만큼이 행복의 지수니까. 이런!

양생의 차원에서 보면 이는 실로 치명적인 행위다. 성호르몬의 분비는 생명의 원천인 ‘정기신’ 가운데 ‘정(精)’에 해당한다. 정은 신장에서 만들어지고 또 거기에 저장된다.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신장은 물이고 겨울의 기운이다. 옹달샘이 수많은 사람에게 노출되면 어떻게 될까? 순식간에 말라버릴 것이다. 과잉표현과 이벤트는 바로 이 깊은 샘물을 마구 펌프질을 해서 써대는 꼴이다. 고이기도 전에 퍼내고 또 퍼내고. 결국 금방 말라버릴 것이다. 그때부터 갈증과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인정욕망이 막장 드라마로 바뀌는 지점이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남들의 시선이 사실 실체도 뭣도 없는 거품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내가 아무리 잘나간다 한들 남들이 나를 얼마나 기억해줄까? 나를 경멸하는 시선 또한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남들은 내게 깊은 관심이 없다. 따라서 찬사도, 비난도 다 허무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아느냐고? 역지사지를 해보라. 누가 아무리 예뻐졌다 한들 혹은 기막힌 프러포즈를 받았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잠깐 부러워하거나 질투를 하고 나면 그뿐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계속 그 시선을 붙들어두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리라.

그래서 인정욕망은 ‘늪’이다. 헤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 이 늪을 벗어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역지사지를 하면 된다. 즉 나를 미루어 타인을 보면 된다. 헌데, 나를 잘 모르겠다고? 그럼 나를 남을 대하듯 잘 탐구하면 된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연암 박지원)

 

(12. 6. 29.  동아일보)
고미숙 고전평론가

댓글목록

진아님의 댓글

진아 작성일

<p>나에 대한 탐구 꼭 필요한 것 같아요.^^ </p>
<p>내가 왜 그렇게 행동하고 왜 그렇게 말하고 왜 그렇게 화가 나고 왜 그렇게 기쁜지..</p>
<p>자기 자신을 알아야 늪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p>

양력 2024.4.19 금요일
(음력 202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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