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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56>여성성과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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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7-24 13:13 조회3,8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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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는 어떤 역경속에서도 생을 경쾌하게 변주시킨다




만화가 오영 씨의 작품 ‘모나리자의 미소’.


 

“당신은 평생에 과거 한번 보지 않으면서 글은 읽어 뭣하오?” “내가 아직 글을 못다 읽었소.” “그러면 장인바치(물건 등을 만드는 사람을 낮추어 부르는 말)질이나 해보지요?” “그건 본디 배운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소?” “그러면 장사라도 하시구려.” “딱한 말이오. 밑천 없는 장사를 어떻게 하겠소?” “그래! 밤낮없이 글을 읽어 배웠다는 것이 고작 ‘어떻게 하겠소?’란 말뿐이오? 장인바치질도 못한다, 장사도 못한다, 그러면 도적질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오?”

‘허생전’의 한 대목이다. 몰아붙이는 쪽이 아내고, 몰리는 쪽은 허생이다. 허생의 아내라면 ‘내조의 여왕’일 것 같은데, 보다시피 좀 거칠다. 한마디로 ‘입심’과 ‘뚝심’이 장난이 아니다. 그 덕분에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통쾌하다.

아줌마라서 그렇다고? 그럼 이런 캐릭터는 어떤가. 18세기 조선의 어떤 마을에 마흔이 넘은 노처녀가 있었다. 게다가 이 처녀는 곰보에 한쪽 눈이 먼 데다 귀도 먹었다. 요즘이라면 ‘트라우마(상처)’덩어리겠지만, 그렇기는커녕 당당하기 짝이 없다. “내 얼굴 얽다 마소 얽은 구멍에 슬기 들고.” “한편 눈이 멀었으나 한편 눈은 밝아 있네.” 그러니 그 나이에도 혼인에 대한 야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내 서방을 내가 선택하지 남다려 부탁할까”라며.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마침내 맘속으로 점찍어둔 김 도령과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한데 소원을 성취하고 나자 눈이며 귀가 다 밝아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뿐만 아니라 그 나이에 쌍둥이 옥동자까지 낳았다. ‘노처녀가’라는 작품의 줄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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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 이 정도면 진정 ‘사랑의 달인’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욕망에 충실하며, 관습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행복하게 살아라’라는 존재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가능했던 건 그 노처녀의 유머 덕분이다. ‘유머의 기예’를 터득한 이들은 결코 자신의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지독한 상황에서도 그 지독함에 휘둘리지 않고 생을 경쾌하게 변주한다.

여성성이라고 하면 ‘희생과 헌신’이라는 미덕을 환기하곤 한다. 어불성설이다. 희생과 헌신이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만약 ‘맹목적’인 것이라면 마땅히 멈춰야 한다. 맹목은 그 어떤 경우에도 구원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반대로 그 선택이 스스로 한 것이라면 그것은 더는 희생과 헌신이 아니다. 다만 자기 삶을 실현한 것일 뿐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모성이든 혹은 인류애든.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이치를 망각하거나 외면한다. 하여 굳이 희생과 헌신이라는 덕목을 강조하고 한술 더 떠 그것이 얼마나 수난과 불행으로 가득한 것인지를 강조하는 데 익숙하다. 슬플수록 더 아름답고 더 가치 있는 삶이라는 듯. 하지만 불행을 위해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생명의 본질은 비극이 아니라 ‘명랑함’이다. 여성성은 특히 그렇다. 여성성은 원초적으로 생명의 매트릭스와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 안에서 생명의 리듬을 찾아내고, 그걸 통해 사회적 표상과 통념을 날려버리는 능력, 그것이 곧 유머요, 명랑함이다. 그러니 여성성을 발휘하고 싶다면 모름지기 이 ‘유머 본능’을 되살릴 일이다. 허생의 아내처럼! 또 ‘노처녀가’의 노처녀처럼!

고미숙 고전평론가


 


(동아일보. 1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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