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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57>‘폐경’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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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7-26 13:35 조회3,8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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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공포서 벗어나야 ‘새로운 인생’ 시작할 수 있다




여성의 몸에서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폐경은 그렇기에 축복이다. 가을날 낙엽으로 하트 문양을 만드는 사람들. 동아일보DB


 


 

폭염과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도 시간은 흐른다. 절기상으로 보면 이번 달은 여름의 마지막 달이다. 사실 여름은 이미 지났다. 근데 왜 이렇게 덥냐고? 대지가 지난 두 달 동안 흡수했던 열기를 복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사람의 몸에는 여름이 한창이지만 하늘은 이미 가을을 준비하고 있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과정을 ‘금화교역’이라고 한다. 금(金)은 가을, 화(火)는 여름. 금화교역이란 금기와 화기가 교체된다는 뜻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과정은 비교적 완만하다. 하지만 여름에서 가을은 그렇지 않다. 뜨겁던 열기가 졸지에 숙살지기(肅殺之氣·쌀쌀하고 매서운 가을의 기운)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주의 대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여성의 몸에도 금화교역의 시간이 있다. 폐경기가 곧 그것이다. 보통 49세 전후해서 시작된다(남성의 경우는 64세 전후로 조금 늦다).

초경이 봄, 곧 청춘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면, 낳고 기르는 여름은 중년에 해당한다. 여름은 짧다. 여름이 길다면 지구는 열기로 가득 차 마침내 폭발하고 말 것이다. 여성의 몸도 마찬가지다. 여름의 열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몸 안에 있는 피는 모조리 연소되고 말 것이다. 또 하나 월경을 한다는 건 가임기라는 뜻인데, 그것이 무작정 길어진다면 그게 과연 축복일까. 임신은 탄생의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런데 50대 이후에도 계속 임신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면, 여성의 일생은 꽁꽁 결박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폐경이란 실로 축복이다. 임신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인생의 새로운 단계를 맞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지만 여성들은 폐경을 몹시 두려워한다. 더는 ‘여자구실’을 못할 거라는 인식이 앞서서다. 이때 여자구실이란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성이다. 이상한 노릇이다. 왜 여성은 나이가 들어서도 ‘성적 욕구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일까. 또 삶의 성취나 자존감의 기준을 왜 대부분 ‘남성의 구애’라는 틀에 묶어두는 것일까. 이 틀만 벗어던질 수 있다면, 폐경기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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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기 이후 여성성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아주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넓고 깊게 고양된다. 무엇보다 가족과 혈연의 틀을 벗어나 공동체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원시 문화에서 폐경기의 여성들은 ‘지혜의 피’를 보유하는 존재로 간주됐다. 따라서 월경을 하는 여성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지닌다고 여겨졌다. 부족의 모든 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운명과 미래에 대한 예지력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때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런 식의 문화는 사라지고 말았다. 여성성은 오직 가족과 성욕으로 ‘영토화’됐다. 그와 더불어 여성의 지혜는 침묵, 봉쇄돼 버렸다. 폐경기를 두려워하고 지연시키려는 욕망은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가을은 수렴의 시간이자 동시에 수확의 시간이다. 여름의 화려한 열기가 사라진 터전에서 지혜의 열매를 거둬야 한다. 그것은 결코 봄과 여름에는 가능하지 않다. 오직 가을에만 가능한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가을은 우주의 대혁명이자 동시에 지혜의 대향연이다. 이 혁명과 향연에 기꺼이 참여할 수만 있다면, 폐경은 곧 축복이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동아일보. 12.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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