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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 <62>사주명리학-신비와 미신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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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8-29 21:06 조회4,6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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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길을 말해주는 사주명리학… 핵심은 ‘앎’



“평생 공부하고 글 쓰겠어요. 자식이나 직업, 이런 거엔 영 인연이 없구먼요.” 처음 역술원에 갔을 때였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생년월일시만 보고서? 이게 사주명리학에 대한 내 첫 경험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동의보감’ 잡병편을 공부하다가 마침내 사주명리학과 만나게 됐다. 잡병편은 오운육기(五運六氣·하늘은 다섯 가지 기운으로, 땅은 여섯 가지 기운으로 돌아간다)로 시작한다. 그걸 따라가려면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원리를 배워야 한다. 육십갑자를 사람의 인생에 적용하면 사주명리학이 된다. 아주 초보적인 내용을 배운 후 내 사주를 직접 뽑아보았다. 하, 이럴 수가! 내 팔자에는 소위 ‘조직운(관성)’과 ‘공부운(인성)’밖에 없다. 자식운도 없고, 직업운도 없다. 조직과 공부, 둘을 합치면 지식인 공동체가 된다. 뭐야? 이렇게 쉬운 거였어?

물론 육십갑자의 이치를 통달하려면 아주 높은 경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다 깨달은 후 ‘삶의 기술’로 쓰는 건 아니다. 한글의 원리를 다 터득한 다음 한글을 쓰는 게 아니고, 디지털의 오묘한 이치를 깨친 다음에야 스마트폰을 쓰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즐기고, 배운 만큼 쓰면 된다. 문제는 이 앎의 향유를 가로막는 마음의 장벽이다.

먼저 음양오행론 혹은 사주명리학은 도인이나 무속인의 전유물이라고 간주하는 습속이 있다. 이런 표상에는 이중적인 방식의 배제가 작동한다. 사주명리학을 고매하고도 신비로운 차원으로 여기는 것, 혹은 지식 이하의 저급한 술수로 취급하는 것. 신비 혹은 미신. 두 가지 모두 명리학을 ‘지식의 외부’로 축출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때 지식의 범주와 경계는 철저히 서구적 인식론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서구의 시선으로 다른 지역의 문화를 타자화하는 것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일종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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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라운 건 이렇게 신비와 미신 ‘사이’에 묶어 둔 뒤 그 핵심과 정수는 상류계급이 독점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재벌이나 정치가들 중에 역술가나 풍수가의 상담을 받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될까. 올해는 ‘선거의 해’다. 정치가들 못지않게 역술가들도 대활약을 펼칠 것이다. 초월적 신비의 산물이거나 허무맹랑한 미신에 불과하다면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자연의 이치 속에서 존재와 운명의 비의를 탐색하고자 한 인류의 노력은 아주 연원이 깊다. 에니어그램과 별자리, 수상과 관상, 풍수지리 등 인류가 고안해 낸 다채로운 운명론 가운데 사주명리학은 단연 독보적이다. 무엇보다 의학과의 긴밀한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음양오행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몸과 우주, 그리고 운명을 하나로 관통하는 ‘의역학’이라는 배치. 말하자면 가장 원대한 비전 탐구이면서 동시에 가장 실용적인 용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 가되 매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 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인생의 길을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앎’이다. 아는 만큼 걷고, 걷는 만큼 열린다. 신비와 미신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길 또한 거기에 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동아일보 12. 8.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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