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69>글쓰기와 자기수련 > 스크랩

스크랩

홈 > 자유게시판 > 스크랩

[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69>글쓰기와 자기수련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10-25 20:05 조회4,732회 댓글0건

본문

글쓰기는 지성의 훈련… 직접 써봐야 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 또 있겠는가?”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주도한 정조대왕의 말씀이다. 지존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공부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단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까지 한다. “첫째, 고전을 통해 진리를 배운다. 둘째, 탐구를 통해 문제를 밝힌다. 셋째, 호방하고 힘찬 문장 솜씨로 지혜롭고 빼어난 글을 써낸다. 이것이야말로 우주 사이의 세 가지 통쾌한 일이다.”(‘정조치세어록’)

그렇다. 이것은 ‘운명애(愛)’의 원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표상의 그물을 뛰어넘는, 역동적인 사유와 훈련이 필요하다. 자아는 물론이고 가족 혈연 국가 등으로 이루어진 표상의 장막을 벗어나 그야말로 우주적 인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고전의 바다’에 접속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 하필 고전인가? 인생과 자연,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극(상생과 상극)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 힘과 지혜를 길어 올리지 않고서 삶의 주인 되기란 가능하지 않다. 더 구체적인 이유도 있다. 정보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고독과 소외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엇보다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해 등.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고? 암송과 연극, 필사와 구술 등 고전의 입구에 들어서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런 과정을 밟아가다 보면 최후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가 바로 그것이다. 고전의 지혜와 나의 몸이 ‘화학적으로 융합되는’ 절정의 순간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쿵후를 배울 때 교재만 죽어라 읽어대는 이는 없을 것이다. 반드시 몸으로 직접 해봐야 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지성의 훈련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대중이 평생 지식인의 말을 듣고 그들이 쓴 글을 읽기만 한다면 그건 불평등한 배치다.

‘대중지성’이란 지식인이 대중의 흐름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자신이 ‘지성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읽고 암기하고 베끼고 한 다음엔 반드시 스스로 글을 써야 한다. 발산과 수렴의 동시성! 오행(목화토금수)의 모든 기운을 응집해야 하기 때문에 ‘개운법’으로도 최고다. 따지고 보면 글쓰기만큼 보편적인 활동도 없고 글쓰기만큼 원초적인 욕망도 없다.

붓다와 공자, 소크라테스와 예수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다 호모로퀜스(언어적 인간)였다! 춤이나 음악, 스포츠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진리를 구현하고자 했다는 뜻이다. 그 언어의 기록이 곧 고전이자 책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문명이 발달한다 해도 인간은 결코 ‘책’을 떠날 수 없다. 책이 없다면 삶도, 우주도 없을 것이므로. 우리 시대 대학이 위기에 봉착한 것도 글쓰기를 포기한 데에 있음을 환기하라.

물론 글쓰기는 어렵다. 당연히 스승과 벗이 필요하다. 스승의 도움과 채찍을 받고 벗들의 응원과 질투를 받으면서 쓰고 고치고 또 쓰고. 이토록 치열하면서도 매혹적인 과정이 또 있을까. 자기 구원으로서의 앎, 자기 수련으로서의 글쓰기. 과연 ‘우주 사이의 이 통쾌한 일’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그러니 모두 이 기막힌 행운을 결코 놓치지 말기를!

고미숙 고전평론가

(동아일보. 1210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양력 2024.4.19 금요일
(음력 2024.3.11)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