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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쾌락과 윤리, 분리 말고 ‘동행’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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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5-20 11:36 조회4,0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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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릴레이 기고 생각하는 나라7·끝



쾌락은 창조적 삶 위한 원천
‘윤리적 훈련’과 나란히 갈때
억압도 금지도 아닌
자유와 행복을 위한
삶의 기술로서의 ‘자기 배려’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의 명기 황진이는 파격적인 행보로 유명하다. 그녀 진이의 당당함은 무엇보다 지적 열정과 편력에서 나온다. 토굴에서 10년 면벽을 했다는 지족선사를 한방에 무너뜨린 후, 진이는 화담 서경덕을 찾아간다. 그녀는 화담에게 동침을 요구했고, 화담은 기꺼이 허락했다. 밤새도록 갖은 유혹을 다 했건만 화담은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다음날 진이는 화담의 ‘제자’로 입문한다. 대하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장면이다. 대체 진이는 화담의 무엇을 ‘실험’한 것일까? 금욕주의? 혹은 도덕적 결벽증? 둘 다 아니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쾌락의 능동적 활용’에 가깝다. 당연히 거기에는 고도의 윤리적 수련이 요구된다. 도덕이 공공의 법칙에 대한 ‘내적 검열’이라면, 윤리는 어디까지나 ‘자기 배려’의 기술이다. 쾌락과 윤리의 간극 없는 일치가 가능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건 ‘판타지’거나 ‘미친 짓’이다. 모더니즘의 배치하에선 윤리와 쾌락 사이에 깊은 강이 흐르기 때문이다. 윤리를 따르자니 쾌락이 ‘울고’, 쾌락을 따르자니 윤리가 ‘우는’ 신파조의 이분법, 이것이 우리가 놓여 있는 자리다. 20세기 초 서구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된 이런 배치는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디지털의 유동성은 모더니즘이 탄생시킨 수많은 경계(국경, 성별, 세대 등)를 해체하고 있지만, 유독 이 분야만은 예외인 듯하다. 오히려 스마트폰의 도래와 더불어 어린이부터 청소년, 중장년에 이르기까지 쾌락과 윤리 사이의 골은 더 한층 깊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성은 ‘범죄’와 동의어가 되어 가고, 쾌락은 ‘중독’과 구별되지 않는다. 회식-알코올-게임이 중년 남성들이 밟는 ‘쾌락삼종세트’라면, 중년 여성들은 대책 없이 쇼핑-성형-유람의 코스를 전전한다.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성욕’인 건 말할 나위도 없다. 좀 썰렁한 유머지만, 요즘 중년 남녀의 트랜드는 ‘애인 만들기’라고 한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세 명쯤 있어야 앞서가는 거라나, 쩝! 노년층 역시 이런 배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노년기란 ‘지혜와 평정’의 시절이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 시대는 노년층에게도 성적 쾌락을 선사하지 못해 안달이다. 어불성설! 아무리 성욕을 누린다 한들 그건 회춘이 아니라 노추다. 한편으론 청춘을 어설프게 모방·표절한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론 노년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생의 기쁨’을 깡그리 무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렇듯 우리 시대는 쾌락의 능동적 활용에 참으로 무지하다. 무엇보다 쾌락의 전 과정을 상품과 화폐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쾌락에의 열망과 상품이 만나면? 집착과 중독을 향해 달려간다. 자본은 소유와 증식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상품의 레일에 들어서는 순간, 쾌락 또한 그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더 많이, 더 세게, 더 짜릿하게! 당연히 그것은 영혼을 잠식해 버린다. 그 결과 일상의 모든 활동이 ‘중독화’된다. 알코올, 게임, 쇼핑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문화활동을 비롯하여 심지어 힐링 및 영성 프로그램조차 중독의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중독이란 무엇인가? 쾌락의 근거와 이유를 전적으로 외부에서 구하는 것을 이른다. 그 전에, 휴식과 충전은 자신과의 온전한 소통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대인들은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우유주사 사태’가 잘 보여주듯이, 잠조차도 혼자 힘으로 이룰 수 없게 되었다. 휴식과 충전의 과정을 생략한 채 즐거움의 강도를 높이고자 할 때 쾌락의 오·남용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끌려가는 것, 그것이 곧 중독이다. 그런 점에서 중독은 자기 소외의 극치에 해당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깊은 절망감이 수반된다. “쾌락을 되풀이하고 영속화시키려고 발버둥칠수록 쾌락은 고통으로 변한다.”(크리슈나무르티) 절망은 고통을 낳고, 고통은 폭력을 불러온다. 타인을 공격하거나 자신을 파괴하거나. 쾌락의 오·남용이 아주 종종 범죄나 질병으로 이어지는 건 이런 맥락이다.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진단과 분석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 가해/피해, 상처/치유, 분노/연민, 개인/사회 등 예의 이분법적 패턴을 더 한층 고조시킬 따름이다. 그 결과 소위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의 수위는 점차 높아지고, 피해자(혹은 중독자)에 대한 시스템은 날로 복잡해진다. 당연히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과 법으로는 결코 윤리적 자발성을 끌어낼 수 없는 탓이다. 실제로 처벌의 강화에도 범죄는 날로 늘어나고, 힐링의 범람에도 트라우마는 더더욱 번성하고 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이런 악순환은 일종의 ‘자업자득’에 다름 아니다. 우리 시대가 표방하는 삶의 코스는 전적으로 외부의 척도에 맞추어져 있다. 학벌·취업·결혼으로 이어지는 성공의 레이스에 과연 자신의 내적 동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있는가? 단연코 없다! 인간은 안과 밖,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의 교집합이다. 따라서 어느 한쪽만으로는 결코 충만감을 느낄 수 없다. 고로, 아무리 사회적 성취를 이룬다 해도 ‘생의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누리는 척! 할 뿐이다. 그 거짓된 행복에서 싹트는 것이 바로 권태다. 또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곧 ‘변태’다. 변태란 단지 포르노그래피를 뜻하는 게 아니라 쾌락의 극단적 남용을 통칭하는 말이다. 권태 아니면 변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봉착할 수밖에 없는 가장 불행한 이분법이다.

그럼 이 늪에서 벗어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쾌락과 윤리 사이의 깊은 단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된다.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 계보학적으로 따져보면, 20세기 이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고 쾌락의 문제는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한 데서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주지하듯이 동양 사상에선 본성을 탐구하는 것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 즉, 자기를 알아가는 것과 우주적 원리를 터득하는 것이 대칭적으로 연동되어 있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그리스 시대 역시 정치가가 되기 위해선 자기 배려의 윤리가 필수적이었다. 타인을 통치하기 위해선 먼저 자신의 내적 충동과 욕망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의사는 철학자다’, ‘건강과 지혜는 하나다’ 등의 테제가 나온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에 반해 우리 시대는 ‘자기 배려’의 윤리가 철저히 결락되었다. 예컨대 청소년 시절은 에로스적 충동이 흘러넘치는 시기다. 그야말로 쾌락의 용법을 익힐 수 있는 적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는커녕 학교는 에로스 자체를 원천봉쇄해 버린다. 그런가 하면 청소년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주어지는 문화상품은 오직 ‘섹시 코드’뿐이다. 섹시함에서 시작하여 섹시함으로 끝나는, 섹시미의 범람! 공적 장에선 묵살되고, 문화적 장에선 있는 대로 성적 충동을 부추기고. 이런 시추에이션 자체가 변태적이지 않은가. 청년기를 지난 이후에도 이런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생로병사의 어느 과정에도 쾌락과 윤리를 동시적으로 사유하고 훈련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솔직히 앞으로도 제도적 차원에서 이런 식의 탐구의 장이 마련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기에는 우리 사회의 뚝심과 열정이 너무 빈약한 느낌이다. 하여, 그걸 기대하느니 차라리 각자의 현장에서 ‘지금 당장’ 자기 몸과 욕망에 대한 능동적 탐구를 시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했듯이 우리 몸은 각종 힘들의 각축장이자 능력의 경연장이다. 쾌락은 이 잠재적 힘들을 활용하여 기쁨을 생산해내는 행위다. “우리는 욕망들을 지닌 채, 새로운 형식의 사랑, 새로운 형식의 관계,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진행해야 한다.”(푸코) 그렇다. 쾌락은 창조적인 삶을 위한 원천이다. 따라서 윤리적 훈련과 ‘나란히, 함께’ 가야 한다. 억압도 금지도 아닌 자유와 행복을 위한 삶의 기술로서의 ‘자기 배려’, 또 그것에 수반되는 지적 향연! 진이와 화담이 도달한 경지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고미숙 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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