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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과 목민관의 변주, 시공간을 뛰어넘어 ‘바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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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6-18 08:32 조회3,81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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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1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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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억배 화백

내 서재 속 고전

나는 자동차가 없다. 경제적 여건을 떠나 차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타고난 길치라 공간감각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비슷한 차원에서 나는 서재가 없고, 서재에 대한 욕망 역시 부재한다. 자동차와 서재가 뭔 관계냐 싶겠지만 서재 또한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라 조금만 넓고 우아해도 나의 국량으론 감당하기가 영 벅차다. 작업공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서재라기보다는 마루에 책꽂이 서너 개가 있는 데 불과하다. 물론 고전평론가로 먹고살려면 이 정도의 책으로는 어림없다. 내 책들이 대충 모여 있는 곳은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인문의역학연구소 ‘감이당’이다. 하지만 거기는 학인들이 세미나하고 강의하는 곳이지 나의 서재는 아니다. 결국 나에게 있어 서재는 공간이 아니라 활동의 명칭이다. 즉, 서재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읽고 쓸 수 있으면 거기가 곧 나의 서재다.

이런 생각이 몸에 배게 된 건 짐작하다시피 공동체 활동 탓이다. 대략 15년 전, 교수직을 포기한 이후부터 내 일상의 대부분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공부하는 공동체’니까 당연히 공동의 서재 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거기 사람들의 책이 모여든다. 내 것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것인!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적 공간에 대한 욕망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설상가상(?)으로 공동체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조직적 형태도 그렇지만 공간이동도 엄청 잦다. 그 와중에 수많은 책들이 어디론가 흩어져 버린다. 아니, 뒤섞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내 책은 사라지고 타인의 책이 내 손에 있는 식으로. 그런 일을 무시로 겪다 보면 책에 대한 소유욕도 점차 옅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있다. 책과 서재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면서 책의 스펙트럼은 엄청 넓어졌다는 것. 지금 우리 집 마루의 책꽂이를 보면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고전문학, 크리슈나무르티, 한의학, 해부생리, 신화, 자연과학, 루쉰, 이반 일리치 등등. 만약 낯선 이가 이곳을 탐문한다면, ‘대체 이 사람은 전공이 뭐야?’라고 버럭!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박학다식’과는 거리가 먼 나에게 어째 이런 일이? 사실 이 ‘잡다한’ 책들은 그간의 활동과 글쓰기의 경로를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독서인’은 아니다. 독서 자체를 즐기는 일이 거의 없다는 뜻에서 그렇다. 기억력이 나빠서 아무리 감동적인 책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아득해지고 만다. 따라서 나에게 독서란 활동의 일환이거나 아니면 글쓰기 작업의 토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읽은 다음에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세미나를 하다가 뭘 쓸지가 결정되면 그때부터 그와 관련된 독서를 하는 것, 이것이 나의 ‘지식사용법’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나의 텃밭이다. 밥과 관계와 활동을 한큐에 해결해주는 풍요로운 텃밭!

최근에 내가 한 작업은 ‘다산과 연암의 라이벌 평전’이다. 며칠 전 출간된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북드라망)라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해 12월12일(壬子)에 시작하여 4월16일(壬子)까지 꼬박 120일이 걸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연암과 다산의 저술들을 정리하고 이야기의 얼개를 짜고, 또다시 자료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고… 알다시피 두 사람은 18세기 지성사의 최고봉이다. 연암이 질적으로 문장의 절대경지에 도달했다면, 다산은 양적 방대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처음엔 둘의 내공에 압도되어 가위에 눌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북드라망 대표한테 포기하겠다고 했더니 “일단 지금 아는 만큼 쓰고 앞으로 2탄, 3탄을 연속해서 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밤에 문득 편안해졌다. 그 말이 단서가 되어 평전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된 것이다. 흔히 평전은 인생의 모든 사항을 망라하고, 동시에 그것들을 촘촘히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살아생전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결코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인가? 모든 정보를 다 모아놓으면 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모으는 순간 그것들의 의미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 또 설령 그것이 완벽하게 재현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지금, 여기’의 현장과 소통할 수 없다면! 하여, 나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총체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대신 생의 변곡점들을 입체적으로 연결하는 식으로. 퀼트 혹은 브리콜라주 기법이라고나 할까. 라이벌 평전이라는 콘셉트를 적극 활용한 셈이다.

태생과 체질의 차원에서 보자면, 연암은 물이고, 다산은 불이다. 두 사람의 일생은 물과 불의 흐름을 고스란히 체현해냈다. 물은 매끄럽게 흐르고, 불은 격렬하게 솟구친다. 그 사상적 결정판이 <열하일기>와 <목민심서>다. 열하일기는 1783년, 연암의 나이 47살, 한창 생이 무르익은 시점에서 나온 연암사상의 결정판이다. 목민심서는 1836년, 다산이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던 바로 그해에 완성된 걸작이다. 마치 목민심서를 쓰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유배지에서 보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산과 목민심서는 혼연일체다. 열하일기는 이미 ‘리라이팅’의 경험이 있으니 그렇다 치고, 문제는 목민심서였다. 그 박학과 파토스가 경이롭긴 했지만 도무지 친숙해지지가 않았다. 특히 목민관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히 기록하고 또 거기에다 주석을 나열하는 식의 글쓰기가 나로서는 영 불편했다. 근데, 놀랍게도 열하일기와 나란히 탐독을 하니 아주 흥미로운 평행선이 그려졌다. 예컨대 열하일기는 중원이라는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시간적 변주를 꾀한 책이다. 그에 반해 목민심서는 시간적 변화를 따라가지만 매 순간의 공간적 배열이 더 두드러진다. 연암은 길 위에서 이용후생을 탐구했다면, 다산은 강진이라는 유형지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목민관의 소명을 재현해냈다. 즉, 연암이 유목민이라면 다산은 목자(牧者)다. 나아가 목민심서가 20세기적 지식의 결정판이라면, 열하일기는 21세기, 곧 고도의 유동적 지성과 접맥되는 텍스트다. 이런 식으로 대쌍들을 찾다 보니 애초의 강박에서 벗어나 오히려 작업을 즐길 수 있었다.

120일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매일 일정한 리듬과 강밀도를 유지해야 한다면, 참으로 긴 세월이다. 이 시간의 장벽을 통과하려면 체력의 안배가 핵심이다. 오버해서도 안 되고 늘어져서도 안 된다. 그렇게 긴장과 이완의 변주 속에서 작업을 마칠 즈음, 조용필 19집 <헬로>(Hello)가 나왔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반미주의자’다. 미적인 것, 예술에 문외한이라는 뜻이다. 고전평론가니까 당연히 미술이나 건축, 음악 등에 조예가 있으리라 여기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분들은 나의 몰취미와 교양없음에 큰 상처를 받곤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예술을 즐길 안목도 재주도 완전 꽝인 것을. 이 또한 앞에서 말한 공간감각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라는 인간은 오직 읽고 쓰는 것 말곤 살아갈 방도가 없는 셈이다. ‘그렇게 살면 너무 무미건조하지 않나?’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의 감수성을 채우는 건 조용필만으로 충분하다고. ‘충전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면 난 늘 조용필을 듣는다. 한데, 이번에는 그가 청년이 되어 돌아왔다. 청춘을 탐하거나 흉내 내지 않고, 기꺼이 청년들에게 배우고 그럼으로써 어떤 청년도 흉내 낼 수 없는 진정 특이하고 발랄한 청춘의 귀환! 나 같은 문외한까지도 ‘바운스 바운스’ 하게 만드는 이런 새로움과 열정이 어떻게 가능할까? 인터뷰에서 조용필이 한 말. “열심히 부딪혀야 한다. 내 머리가 깨지든 바위가 깨지든 벽이 깨지든.” “미래로 가야 하니 과거의 저를 버릴 수밖에 없었죠.” “외롭다고 생각하는 
고미숙 고전학자
건 오히려 자신 없고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오, 이건 음악뿐 아니라 모든 공부의 원리가 아닌가. 그렇다. 이 천지간에 새로움이란 배움의 열정밖에 없다. 그리고 배움이란 자신과의 부단한 대결이다. 자신을 넘어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곧 길이요 도(道)다. 다산과 연암이 지성과 글쓰기를 통해 보여준 그 길을 조용필은 노래를 통해 내게 들려주고 있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서재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대신 나는 내가 다니는 모든 길을 서재로 삼고 싶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수많은 다산과 연암 ‘들’을 만날 것이다. 매 순간 다르게 변주되는 조용필의 노래로 내 감수성을 충전하면서 말이다.

고미숙 고전학자

(한겨레 신문. 13. 0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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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心이님의 댓글

無心이 작성일

"나의 감수성을 채우는 건 조용필만으로 충분하다고. ‘충전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면 난 늘 조용필을 듣는다" 에 절대공감. 글의 핵심은 이게 아닌 것 같은데....전 이 구절이 젤 맘에 들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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