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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욕망의 굴레를 벗고 ‘게의 눈’으로 현실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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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9-13 09:17 조회4,3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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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억배 화백

내 서재 속 고전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이반 일리히 지음, 권루시안 옮김
느린걸음 펴냄(2013)

아주 오랜만에 영화를 두 편이나 봤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설국열차>. 솔직히 그다지 재미는 없었다. 대박영화라 기대치가 너무 높았나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위생권력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톡톡 튀는 대사들로 넘쳐났던 <괴물>에 비하면, 스토리 라인과 대사의 측면에서 너무 맨송맨송했다. 대신 나를 사로잡은 건 두 작품이 전하는 이념적 메시지였다. 블록버스터에서 재미는 못 보고 메시지를 읽다니, 이것도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알다시피,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간첩을 다룬 영화고 <설국열차>는 계급투쟁을 다룬 영화다. 냉전과 계급, 20세기를 지배한 거대 담론의 두 축이다. 소재가 소재인지라 영화의 3분의 1은 피 튀기는 액션 장면이다. 그것도 조폭들의 엉성한 난투극이 아니라 총기와 도끼가 난무하는 ‘피바다’에 속한다. 죽고 죽이고 또 죽고 죽이고…. 그러다 결국 주인공들이 다 ‘멸망’하면서 막이 내린다. 하지만 아주 역설적으로 두 작품은 냉전과 계급투쟁의 종언을 고하고 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간첩들의 꿈은 남도, 북도 아니다. 그토록 ‘위대한’ 전사로 키워졌건만 그들이 원하는 건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 <설국열차>는 한술 더 떠 제국을 박차고 나와 ‘땅을 밟고’ 사는 것. 그 대지에선 소년과 소녀, 그리고 북극곰이 공존한다. 허, 이렇게 허망할 데가! 고작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그토록 엄청난 ‘살육전’을 치렀단 말인가. 하기야 대자본을 투자하여 간첩공작과 계급투쟁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가치들의 덧없음을 증언하는 것일 테지만.

그렇다면 이제 이 비장하고 숭고한 표상들이 떠난 자리엔 무엇이 존재하는가? 제도와 서비스가 그것이다. 그것들을 추동하는 욕망의 수레바퀴가 상품과 화폐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디지털의 도래와 함께 이것은 삶의 전 영역을 망라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은밀한” 케어, 더 “위대한” 힐링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꿈꾼다. 자기 삶의 결정권을 완벽하게 헌납해 버린 것이다! 거대 담론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존재 자체가 버블이 되어버린 이 지독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와중에 이반 일리히를 다시 만났다.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반 일리히와의 인연은 멀리 대학시절(1980년대)로 소급된다. 야학 동아리를 통해 그의 사상을 접했는데, 그때 그의 책은 교육혁명의 대명사이자 마르크스주의로 가는 중간교량쯤으로 간주되었다. <학교 없는 사회>라는 그의 대표작은 <학교는 죽었다!>는 좀더 과격한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우리는 그 책을 시대적 요구에 맞춰 해석해 버렸다. 독재권력의 마수로부터 학교를 해방시켜야 한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학생들을 “의식화”시켜야 한다, 는 식으로. 공교육의 확산을 교육의 진보로 간주하는 이념 역시 거기에서 도출되었다. 물론 왜곡이었다. 하지만 그 왜곡을 알아차릴 틈이 없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마르크스주의가 ‘밀물처럼’ 들어오면서 이반 일리히는 빠른 속도로 잊혔다.

1990년대 중엽 이후 다시 마르크스주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동시에 공교육의 지반은 대폭 확장되었다. 학벌의 상향조정이 이루어졌으며 학교의 시설과 서비스는 눈부실 정도로 향상되었다. 그때였다. 일리히가 문득 떠오른 것은. 과연 이것이 그가 제시한 교육혁명의 내용이었을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일리히는 말한다. “학교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노예로 만든다.” 그리고 이런 속성은 “파시즘적이든, 민주주의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또는 대국이든 소국이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모든 나라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고로, 병원 수가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를 보여주듯이, 학교 수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요컨대, 그는 학교의 민주화와 평등을 주장한 게 아니라 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문제삼았던 것이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 <성장을 멈춰라!> <그림자 노동> 같은 저술들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책들은 거의 절판되고 말았다. 한국의 지성계와는 인연이 영 박하구나, 라고 생각하던 차에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가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이반 일리히는 학교 민주화가 아니라
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문제삼았다
어떤 집단 내에서 금기로 취급하는
개념이나 확신에 논쟁을 부채질했다

앞칸을 향해 달려갈 게 아니라
옆문을 부수고 나가야 한다
이반 일리히를 추동했던 그 원천
‘게의 눈’을 확보해야 할 때다

이 책은 1978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일리히가 여러 단체에서 한 강연 기록을 모은 것이다. “강연마다 저는 그 집단 내에서 분명 금기로 취급할 바로 그 개념이나 인식 또는 도덕적 확신에 논쟁을 부채질하는 것을 저의 임무로 보았습니다. 매번 저는 그 모임에서 내건 그해의 구호를 비아냥거렸습니다.” 헐, 이런 무모한 연사를 봤나. 그는 신부였다. 성직자가 평화를 선사하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다니, 이보다 더 불온할 순 없다.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글이 ‘간디의 오두막’이다. “간디가 살았던 이 오두막보다 더 큰 곳을 원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과 생활방식이 초라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살아 있는 자아를 죽어 있는 구조물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그의 사상적 탐사는 평화와 고요, 경제학과 축복, 부정가치와 엔트로피 등 전방위로 펼쳐진다. 투명하게 심오하게!

 

이번 저서에서 주목할 바는 다름 아닌 ‘과거라는 거울’이다. 근대적 표상의 근저를 파헤치기 위해 그는 12세기 중세의 교회를 탐구한다. “저는 앞으로 걸어가는 시선으로 과거의 순간을 쳐다보지 않으려 하며, 게와 같이 뒷걸음질치는 시선으로 현재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는 것, 하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 “더할 나위 없이 자명한” 전제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탐사하는 것. 이것이 일리히의 독특한 계보학이다. 그의 도발적 전언 몇 가지. 1949년 1월10일, 개발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후 “인간은 곤궁에 빠진 동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결핍을 느끼는 것이 곧 배움이 되었다, 할머니는 가정의 맥락에서 축출되어 경제적 노인, 곧 “자기 침대 속에 입원된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또 언어는 아주 비싼 상품이 되었고, 물은 영혼의 유동성을 비춰주는 거울에서 한낱 H2O로 전락하여, 들어올 때는 상품으로 나갈 때는 폐기물이 되어 버렸다, 하여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류가 역사상 가장 무기력한 인간”이 될 것이다 등등. 게다가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기독교의 왜곡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중세의 교회는 “오늘날의 서비스 내지 복지국가가 성립되는 기초이며, 이 개념이 없다면 복지국가는 생각할 수 없”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인이라는 토착 개념이 밀려나고 그 자리에 목사의 보살핌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삶이 들어앉는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언급했듯이, 일리히는 신부이고 뛰어난 학자이며 교육운동가였다. 하지만 그는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았다. 교황청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스스로 사제직을 버렸고, 대학의 부총장을 역임했지만 거리에서 교육운동을 조직했다. 또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라는 ‘대안대학운동’을 조직했지만 10년 만에 자진 해산을 선언하고 다시 길 위에 나섰다. 만년에 종양으로 고통받았지만 수술을 거부하고 침술과 아편, 자기수양 등으로 20년 이상을 버텨냈다.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서 비난과 경멸을 받았지만 그 자신의 표현을 따르면 그는 단지 “헐벗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실천했을 뿐이다.

영화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자. 간첩이 꽃미남에 달동네 바보가 되고 계급투쟁의 대단원에 북극곰이 출현하는 영화를 보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거대제국을 해체하는 건 또다른 반대항이 아니라 목표도 중심도 없는 분자적 흐름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흐름을 주도한 건 일상(혹은 생명), 그리고 디지털이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건 디지털의 유동적 바다와 그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야생적 신체다. 앞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옆문을 부수고 나가 두 발로 땅을 딛고 북극곰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그것은 꼬리칸만이 아니라 모든 칸에 있는, 모두의 운명이다. 그 운명과 맞짱을 뜨려면? 무엇보다 제도와 서비스, 욕망과 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의 자율성과 창조력을 길어올려야 한다. 이반 일리히로 하여금 가장 급진적인 사유를 하도록 추동했던 그 원천, 곧 ‘게의 눈’을 확보해야 할 때다.  고미숙 고전학자  (2013. 9. 8)
고미숙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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