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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몸과 우주, 삶이 함께 가는 대칭의 향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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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12-02 09:07 조회4,1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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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억배 화백

내 서재 속 고전


동의보감 
허준 지음, 윤석희·김형준 옮김 
동의보감 펴냄(2005)
한권으로 읽는 동의보감 
신동원 지음 
들녘 펴냄(1999)
장면1 : 서울 관악구의 한 도서관에서 북콘서트를 할 때였다. 뮤지션들의 노래 공연에 뒤이어 간단한 이야기를 마치고 질문을 받는데, 열 살짜리 꼬마가 손을 번쩍 들었다. “수학과 과학은 답이 있는데, 왜 철학에는 답이 없어요?” 와~. 장면2 : 경기 군포시청에서 주관한 시민대학에 갔을 때였다. 아침 7시에 시작한단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계속 긴가민가했다. 이 어둑한 새벽에 대체 어떤 시민이 온단 말인가? 졸린 눈으로 시청에 도착했더니 웬걸! 시장, 부시장을 비롯하여 무려 2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자원방래하였다. 몇 년째 계속되는 행사라며 다들 태연자약하다. 장면3 : 국립극장에서 원일 감독의 지휘 아래 진행된 렉처콘서트. 수제천에서 판소리, 사물놀이까지 국악의 다양한 장르를 감상하면서 중간중간 강의를 진행하는 약간 파격적인 형식이었다. 공연의 리듬에 맞춰 얘기를 풀자니 감각의 전면적 재배치가 요구되었다. 침묵의 순간에 더 많은 에너지가 든다는 것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것이 올해 내가 길 위에서 마주친 특이한 현장들이다. 이 현장들이야말로 내게는 살아 움직이는 배움터이자 서재다. 각양각색의 연출자들이 등장하는 ‘움직이는 서재’! 그 속에서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통념의 전복을 체험한다. 이를테면, 장면1은 앎에 대한 열정은 원초적 본능에 속한다는 것을, 장면2는 제도권 내에서도 얼마든지 지성의 향연이 가능하다는 것을, 장면3은 앎의 표현 형식이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지를 등등. 길 위에선 이렇게 늘 예기치 못한 변주가 일어난다. 어쩌면 이 변주 자체가 길이요 공부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길이 열리기 위해선 고전이라는 ‘내비게이션’이 필요하다. 올해의 경우는 주로 허준의 <동의보감>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허준과 동의보감. 한국인의 대표적 상징에 해당할 만큼 익숙한 기호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드라마에 의해 구성된 판타지일 뿐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모두가 사랑하지만, 아무도 배우려 하지는 않는다, 는 것이 그 결정적 증거다. 나 역시 그러했다. 동의보감은 그저 오래된 전설일 뿐 ‘지금, 여기’의 현실과는 무관하다 여긴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인생은 반전의 연속이다. 40대 초반에 다가온 인생의 변곡점에서 문득, 동의보감을 만나게 되었다. 더 큰 반전은 이후 동의보감을 통해 나의 앎과 삶이 전면적으로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몸은 곧 우주다. 이 둘 사이를 관통하는 코드가 음양오행이다. 태극이 음양으로, 음양은 오행(목화토금수)으로, 오행은 다시 분화하여 60갑자가 된다. 이 리듬의 변주가 곧 4계절이자 24절기이며 72절후이다. 이 매트릭스 위에서 우리의 인생 또한 생로병사의 흐름을 밟아간다. 따라서 생명의 토대를 이루는 정기신(精氣神)과 오장육부 역시 우주적 기운의 ‘아바타’다. 간/담은 목(木), 심/소장은 화(火), 비/위는 토(土), 폐/대장은 금(金), 신/방광은 수(水). 이것들 사이의 관계망이 몸과 얼굴을 만들고 또 심리적 행로를 주관한다. 요컨대, 우주의 물리적 배치와 몸의 원리는 ‘나란히, 함께’ 간다. 천지와 상응해야만 이 우주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리듬은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다. 때론 어울리고 때론 어긋난다. 상생과 상극의 파노라마가 바로 그것이다. 이 생극의 이치를 터득하게 될 때 거기에서 바로 삶의 윤리적 비전이 나온다.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트라이어드(삼중주)!
우주의 배치와 몸의 원리는 
때론 어울리고 때론 어긋난다 
이 생극의 이치를 터득할 때 
삶의 윤리적 비전이 나온다
허준의 동의보감 서문을 보면 
주어가 의사가 아니라 환자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치유할 길을 열고자 한 것이다 
삶을 ‘통째로, 오롯이’ 살려는 
욕망이 지금 꿈틀거리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새로운 경계였다. 그동안 내가 학습했던 서구 지성의 프레임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었다. 20세기 이후 도래한 서구 지성(혹은 근대성)은 기본적으로 천지와 인간 사이의 단절을 전제로 한다. 주체와 객체는 날카롭게 분리되었고 그와 더불어 자연은 리듬과 강밀도, 이치와 원리를 박탈당한 채 오로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 결과가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테크놀로지다. 하지만 자연과의 단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도 끊어버렸을 뿐 아니라 다시 한 개인의 실존도 분리시켜버렸다. 예컨대, 생리적 현상은 병원에 맡기고, 지적 훈련은 교육기관에, 영성의 탐구는 종교제도에 복속시키는 식으로. 하여 정보들은 넘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그저 아득할 따름이다. 그래서인가. 다들 아프고 또 우울하다. 그럴수록 의학과 병원의 시스템은 더욱 비대하고 정교해진다. 동시에 의학에 대한 심리적 장벽 또한 높아만 간다. 나 역시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누구나 의학을 공부해도 되는 건지를. 지식의 횡단을 높이 외치고 미셸 푸코를 통해 임상의학과 생체권력의 긴밀한 결탁관계를 배웠으면서도 의학은 어디까지나 전문가의 몫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의사와 환자, 전문가와 대중 사이의 견고한 장벽에 스스로 갇혀 있었던 것이다.
동의보감의 의학적 배치는 전혀 다르다. 허준은 <동의보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환자가 책을 펼쳐 눈으로 보면 허실·경중·길흉·사생의 조짐이 거울에 비친 듯이” 드러날 것이라고. 주어가 의사가 아니라 환자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즉, 동의보감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열고자 한 것이다. 우리에겐 퍽 낯선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건 실로 당연한 바이기도 하다. 왜냐고? 의학이란 본디 그런 것이므로.
의학에 대한 전제가 바뀌면서 앎의 경계 또한 무장해제되어 버렸다. 생각해 보라. 몸과 우주 사이엔 모든 지식이 다 포함된다. 유불도와 문사철은 물론이려니와 생물학과 양자역학, 인류학 등등. 그 어떤 분야든 ‘나’라는 존재와 무관할 수 없고 또 ‘나’에 대한 탐구는 당연히 이 세계의 이치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대칭성 인류학>에서 이것을 “고도의 유동적 지성”이라고 명명했다. 사실 21세기는 이분법적 분절이 종식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디지털의 도래와 함께 신체와 도구, 마음과 인터넷, 개인과 집단 사이의 경계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마땅히 자연으로 ‘통하는’ 길도 열려야 하지 않을까. 인간과 문명, 그리고 자연, 그 사이에서 펼쳐지는 ‘대칭의 향연’, 21세기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라면 바로 이것이 아닐지.
올해는 동의보감 편찬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400년 시간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의 마음의 지도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더는 파편적인 정보더미 속에서 성공이라는 허깨비를 향해 달려가기보다 삶을 ‘통째로, 오롯이’ 살아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 서두에서 밝힌 저 경이로운 현장들이 가능했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덧붙이면 동의보감을 만난 이후 내가 있는 공동체에 대한 나의 비전도 사뭇 달라졌다. 지금 내 일상의 모든 것은 감이당(&남산강학원)에서 이루어진다. 감이당의 모토는 다음 네 가지다. 1. 도심에서 유목하기. 2. 세속에서 출가하기. 3. 일상에서 혁명하기. 4. 글쓰기로 수련하기. 도심과 유목, 세속과 출가, 일상과 혁명, 이 단어들은 가까이하기엔 조금 먼 개념들이었다. 이것을 취하면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여긴 탓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식의 분절은 부질없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건 ‘삶의 새로운 형식’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 이항대립들을 거침없이 가로질러야 한다. 도심 어디서건 텐트를 칠 수 있어야 한다. 영적 지혜는 제도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 세속적 윤리와 뒤섞여야 하며, 혁명은 거대 정치의 장에서 탈주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삶의 기술’로 전환되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매일매일이 생성과 소멸, 증여와 순환이 될 수 있는 길! 이 길 위에서만이 자본과 권력을 향한 진격을 멈추게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드시 구체적인 수련과정이 필요하다. 글쓰기가 바로 그것이다.
고미숙 고전학자
글쓰기만큼 신체적 공력이 요구되는 일이 또 있을까. 글쓰기는 고도의 지성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가장 야생적인 활동이기도 하다. 하여, 글쓰기가 가능하다면 누구든 자유인이 될 수 있다. 글쓰기는 밥을 부르고 친구를 부르고 스승을 부른다. 밥과 우정과 지성이 마주치는 경계, 거기가 바로 천지인이 감응하는 ‘자유의 새로운 시공간’이다. 이름하여 몸과 우주의 정치경제학! <동의보감>이 내게 준 사상적 선물이다.
고미숙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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