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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본디 꿈과 삶은 둘이 아닌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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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01-16 09:31 조회4,5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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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억배 화백

내 서재 속 고전

구운몽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민음사 펴냄(2003)
2014년 새해가 밝았다. 갑오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면 입춘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어쨌든 해가 바뀌는 시간이다. 시간은 늘 가고 온다. 한데 왜 이맘때의 시간들은 남다르게 다가올까? 1년이라는 마디가 주는 감회 때문이리라. 시간은 무심하게 흐를 뿐인데, 인간은 그 흐름에 리듬을 부여하고 또 이름을 붙인다. 12개월, 24절기, 72절후. 이런 단위들이 모여 1년이라는 시간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인생과 역사를 헤아리는 좌표를 삼는다. 그래서인가. 평소엔 별생각이 없다가도 해가 바뀔 때쯤이면 문득 장탄식이 쏟아진다. ‘아니 벌써’ 혹은 ‘아 세월의 덧없음이여!’와 같은.
하지만 이런 탄식에는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만약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팍팍한 세월 안에 꼼짝없이 갇혀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의 무상함은 아쉬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처가 아닐까.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뭔가 더 얻고 누릴 것이 있는데, 마치 세월이 그걸 해체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물론 이율배반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누릴 수 없으므로. 그럼에도 이런 식의 이율배반을 포기하지 않는 건 시간의 서사를 거부하면서 욕망은 극대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삶의 서사에서 일탈한 욕망, 그것은 쾌락의 법칙에 종속되어 버린다. 우리는 지난 10여년 동안 그것을 일러 ‘꿈’이요 ‘희망’이라 불러 왔다. 그리고 이 꿈의 질주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다다익선! 그렇다면 대체 얼마의 부가 있어야 만족하게 될까? 그 부로 대체 무엇을 누리고 싶은 것일까? 또 그렇게 한바탕 즐기고 나면 과연 세월의 덧없음에서 자유로워질까? 오랫동안 잊고 있던 <구운몽>을 다시 읽게 된 건 이런 맥락에서다.
<구운몽>은 조선 숙종 때의 문호 서포 김만중이 쓴 고전소설로 낭만주의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한명의 사내와 여덟명의 여인이 펼치는 일장춘몽을 다루고 있다. 형산 연화봉에서 설법을 하던 육관대사 밑에 성진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외모도 비범하고 총명과 지혜가 뛰어난 소위 ‘엄친아’였다. 춘삼월 호시절에 대사의 심부름을 다녀오던 중 외나무다리에서 팔선녀와 마주친다. 한명도 아닌 무려 8명의 미인을 만났으니 어떤 사내인들 마음이 동하지 않으리오. 한번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도로아미타불, 그 즉시 지상으로 떨어져 양소유로 태어났다. 팔선녀도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이어지는 8가지의 로맨스! 이게 소설의 기본 줄거리다. 아마 생각만 해도 가슴들이 뛰시리라. 가는 곳마다 자신을 기다리는 여인들이 있고, 이들은 한결같이 양소유에게만 몸과 마음을 허한다. 선녀들은 눈부신 외모에 가무와 시, 거문고와 검 등 온갖 재능의 화신들이다. 양소유의 카리스마야 말할 나위도 없다. 과거급제는 ‘떼논 당상’에 문무 겸비로 난리를 간단히 제압하고 오랑캐와의 전쟁도 거뜬히 해결해낸다. 승상의 지위에 오른 것은 물론 두명의 공주를 아내로, 여섯명의 낭자를 첩으로 삼는 쾌거(?)를 이룬다. 일부다처제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차지한 셈이다. 김만중의 또 다른 고전 <사씨남정기>가 보여주듯 혹시라도 처첩갈등이 연출하는 막장 드라마는 없을까? “두 공주와 여섯 낭자의 단란한 즐거움이, 마치 고기가 물에서 노닐며 새가 구름 위를 날듯이 서로 따르고 서로 의지하여 형제 같았다. 더욱이 소유의 애정이 고르니 모든 낭자의 부덕이 온 집안의 화기를 이루었다.” 와우~ 대박! 자, 이젠 누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리는 부귀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엄청난 대저택에 화려한 파티. 대규모의 풍류와 사냥, 한마디로 오감의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양소유가 지는 해를 보며 
옥퉁소 한 곡조를 부른다 
저 높은 산정의 욕망의 심연 
구운몽은 ‘꿈의 고고학’이다
허무한 건 삶이 아니다 
부귀영화에서 깨어날 수 있다면 
특이한 꿈들이 꿈틀거릴 것이다 
꿈들의 향연, 그것이 인생이다
하긴 우리 시대의 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값비싼 술과 기름진 음식,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사내). 그들과 함께 즐기는 각종 이벤트!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주.색.잡.기다. 요컨대, 주색잡기를 맘껏 누릴 수 있는 것. 이것이 꿈을 이룬 뒤에, 곧 성공의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체적 일상이다.
그런 점에서 <구운몽>은 ‘꿈의 고고학’이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은 부귀공명을 꿈꾼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뭔가 그럴싸하게 보인다. 그래서 그 심층을 더 파고들어가야 한다. 그러고 나면 뭐 어떻게 사는 건데? ‘산정은 심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 높은 산정까지 오르게 한 욕망의 심연을 탐사하는 것, 그것이 고고학일 터. <구운몽>의 인물들은 바로 우리가 원래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아주 리얼하게 보여준다. 누리고 누리고 또 누리고…. 그다음엔? 노년에 이른 어느 해, 팔월 열엿새 생일날, 잔치의 흥과 웃음이 절정에 이른 순간, 양소유가 문득 지는 해를 보며 옥퉁소 한 곡조를 부른다. “퉁소 소리 몹시 서글퍼 마치 애원하는 듯, 그리워 흐느끼는 듯, 하소연하는 듯하여 모든 미인의 가슴이 또한 미어지는 듯 처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한숨을 길게 쉬었다.” 대체 왜? 늙어서? 죽음이 임박해서? 한마디로 인생무상! 덧없는 세월 속에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니, 그 어찌 안타깝고 허전하지 않으리오.
허, 참 이상하다. 이렇게 많은 것을 누린 사람도 결국엔 인생무상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부귀공명도 세월의 덧없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인가? 그토록 지고한 쾌락도 이 무상감 앞에선 한낱 먼지에 불과하단 뜻인가? 그렇다. 여기가 바로 <구운몽>의 하이라이트다. 부귀를 이루기 위해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희생시킨다. 청춘도 휴식도 우정도 지성도. 그런데 그 부귀의 절정에는 무엇이 있는가? 주색잡기와 인생무상! 허, 이런 허무할 데가! 그럼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 쾌락이라도 실컷 누리고 싶다고. 지난 10년 동안 버블경제가 사람들의 영혼에 심어준 한바탕 꿈이다. 그런데 잠깐! 이 명제에는 아주 치명적인 모순이 담겨 있다. 인생과 쾌락을 등가화해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모두가 부귀와 쾌락을 향해 달려가다 보니 삶이 오직 그것뿐이라는 전도망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외쳐댄다. 인생은 허무하다고, 세상은 참으로 덧없다고. 하지만 덧없는 건 인생 자체가 아니라 부귀공명과 쾌락의 꿈이 아닐까?
사실 현대인들은 양소유보다 더 큰 부귀영화를 누린다. 문명의 고도화로 일상의 모든 것을 기계가 다 해결해줄뿐더러 스마트폰 안에 들어가면 화려한 스펙터클, 감미로운 음악, 박진감 넘치는 게임, 섹시한 가무 등 양소유가 부귀의 절정에서 누렸던 것들이 다 있다. 그런데 왜 만족함이 없는가?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에서 그것을 이루고 싶어서? 그렇다면 우리 시대 부유층들은 다 구원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가 않다. 양소유가 그랬듯이 엄청난 부귀와 쾌락을 누리는 이들 역시 존재의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허무함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곧 부귀와 쾌락의 숙명이다.
쾌락의 절정에서 깊은 허무와 마주한 양소유는 다시 성진으로 돌아간다. 성진은 말한다. 이제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고. 이어지는 육관대사의 호통. “네가 꿈과 세상일을 나누어 둘로 갈라보니 네 꿈이 아직도 깨지 못하였도다.” 이건 또 뭔 반전인가? 삶과 꿈이 다르지 않다고? 보통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고 할 때 여기서 ‘꿈’은 삶을 온통 부정하는 벡터가 된다. 불교가 종종 허무주의로 간주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도 밝혔듯이 허무한 건 삶이 아니라 쾌락에 종속된 그 헛된 망상들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꿀 수 있는 꿈은 실로 무한하다. 부귀영화라는 꿈에서만 깨어날 수 있다면 아주 특이하고 생생한 꿈들이 꿈틀거릴 것이다. 서로 다른 꿈들의 향연, 그것이 곧 인생이다. 삶과 꿈이 둘이 아니라는 건 이런 의미이리라.
고미숙 고전학자
갑오년은 푸른 말, 곧 ‘청마’의 해다. 간지력에서 ‘갑’은 새로운 10년의 출발을 의미한다. 지난 10년을 지배한 헛된 꿈과 망상은 가차없이 흘려보내고 아주 낯설고 새로운 꿈의 형식을 창조할 때다. 세월의 흐름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을 그런 꿈들로 매일매일 인생의 ‘진맛’을 누리시길!
고미숙 고전학자

(한겨레, 2014.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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