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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혁명과 영성이 마주쳐 욕망을 끊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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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02-25 18:35 조회4,0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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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억배 화백

내 서재 속 고전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김은지 옮김, 청어람미디어(2013년)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김은지 옮김
청어람미디어(2013년)

“인간 자체가 쓰고 버려지는 소비재로 간주되고 있다. 인간이 쓰고 버려지는 존재가 된 문화를 우리가 만들었고, 이런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더는 착취와 억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차원의 문제다.” 호오, 성직자답지 않게 꽤 과격하신걸. “이런 태도 뒤에는 윤리와 신에 대한 거부가 도사리고 있다. 윤리는 조롱받고 경멸을 받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신에 대한 거부, 윤리에 대한 조롱? 아직도 그걸 기대하다니, 너무 순진한 거 아냐? “이런 점에서 나는 금융 전문가와 정치 지도자들이 고대 현자 중 한 분의 말씀을 심사숙고하길 바란다. ‘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훔친 것이며 그들의 삶을 빼앗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허걱! 조금 나누라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분배하자는 것도 아니고 아예 ‘내 것’이 ‘남의 것’이라니. 이렇게 ‘급진적’인 말을 막 해도 괜찮나?

요즘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년메시지(<프레시안> 번역)의 일부다. 구구절절 나도 모르게 추임새가 튀어나온다. 몰랐던 것도 아니고 대안이랄 것도 없는데, 대체 이 신선한 충격의 정체는 뭐지? 아마도 그건 이 ‘돌직구’의 원천에 주의나 이념이 아니라 영성이 있기 때문이리라. 20세기 내내 인류는 참으로 다양한 사상과 혁명, 개혁과 이상을 실험해왔다. 그 결과 많은 걸 이루기도 했지만 많은 걸 잃기도 했다.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는 혁명적인 구호와 명제들이 더는 ‘혁명적’이지 않다는 것. 더 구체적으로 내 안의 ‘혁명적 정염’을 끌어내지 못한다는 것. 오히려 과격해질수록 따분하고 피로할 따름이다. 왜 그럴까? 그 구호의 이면에 부와 권력에 대한 ‘진부한’ 욕망의 선분들이 이리저리 교차하고 있기 때문일 터. 교황의 메시지가 주는 참신함 혹은 급진성은 그런 복잡한 구도를 간단히 해소해버리는 도약과 직진에 있다. 그의 기준은 오직 윤리와 신일 뿐이다. 여기서 윤리와 신은 특정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내재한 원초적 영성에 가깝다. 동양사상적으로는 ‘천리’(天理), 인류학적으로는 ‘자연지(知)’로 번역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개혁과 영성, 혁명과 자연은 서로 동떨어져 있었다. 그 결과, 개혁이나 혁명은 주로 물질적 배분의 차원으로 고착되었고, 영성이나 자연은 저 드높은 산정으로 초월해 버렸다. 이런 양분화 속에선 혁명이든 구원이든 결코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설령 이룬다 해도 절반의 성취에 불과할 뿐이다. 내적 해방이 없는 혁명, 혹은 외적 세계와 소통하지 못하는 구도가 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교황의 메시지는 문득 그 자명한 이치를 환기하고 있다. 신과 인간, 윤리와 경제의 조건없는 일치. 말하자면, ‘래디컬’(radical)이라는 영어 단어가 지니는 두 가지 의미-근원적인 혹은 급진적인-를 동시에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선택한 고전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가 주는 감동도 같은 맥락에 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건 ‘동방의 별 해체 선언문’을 통해서다. 열세 살의 나이에 신지학회에 발탁되어 지도자로 키워졌지만, 1929년 자신을 떠받드는 ‘동방의 별’을 스스로 해산해버린다. 자신은 결코 추종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리란 조직의 규모와 숫자를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참으로 급진적이지 않은가. 사상의 내용을 떠나 자신의 물적 근거를 스스로 내려놓는 이 행동방식이 말이다. 이후 프리랜서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과 대화를 통해 직접적이고도 개별적인 차원의 깨달음을 설파한다. 최근 번역된 이 마지막 일기는 1983년 2월25일부터 1984년 3월30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방에 있는 자택에서 매일 아침 녹음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아흔을 바라보는 현자가 들려주는 목소리는 간결하면서 동시에 단호하다.

혁명적인 구호가 ‘혁명적 정염’을
끌어내지 못하는 건 그 이면에
욕망의 선분들이 교차하고 있어서다

자본의 무한증식과 불멸에의 집착은
동일한 궤도를 달리는 ‘욕망의 전차’다
혁명적 비전과 영적 지혜가
조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세계의 제도와 조직은 인류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 다양한 물질적 조직을 만들었다. 전쟁과 민주주의, 독재 정치 그리고 종교적 제도…. 오래전부터 수많은 종류의 제도가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인간의 내면을 바꾸지 못했다. 제도는 절대 인간을 근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바꿀 수 없다.” ‘동방의 별’을 해체할 때의 문제의식이 생생하게 변주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참 궁금하다. 대체 왜 인간은 이토록 끈질기게 제도에 의존하고 거기에서 안정감을 얻으려고 하는지. 하긴 그렇다. 20세기 초와 비교해도 인류는 제도적으로, 물질적으로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 그런데 왜 윤리적 차원에선 점점 더 추락하는 것일까? 그 또한 제도의 문제일까? 더 좋은 제도와 시스템이 갖추어지면 우리는 과연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오히려 이런 태도와 전제들이 개별적 차원의 탐구-자유와 해방을 위한-를 방치하는 명분으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윤리에 대한 조롱, 영성에 대한 거부가 발생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하다. 윤리적 자율성과 영적 해방이 없는 혁명이 가당키나 한가? 그건 일종의 ‘형용모순’이 아닌가?

그러면 당장 이런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나 하나 바뀐다고 사회가 바뀌겠는가? “나의 노력은 그저 커다란 호수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이 아닐까?” 크리슈나무르티의 답변은 이렇다. “우리의 의식은 당신 것도 내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의식은 많고 많은 세월을 지나 진화하고 성장하며 축적된 것이지요. 그 의식 속에 신앙과 신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다른 많은 의례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생각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생각이 태도와 행동, 문화, 염원들을 만들어내지요. 그리고 이 의식이 곧 자신이며 ‘나’인 동시에 자아이며 인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독립적인 개인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 인류 전체입니다.” 하여, 단언컨대, “깊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어 당신의 모든 신경과 애착을 집중시키는 그런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미래는 그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의 연속일 뿐이다.” 즉, ‘이것’에서 ‘저것’으로의 변화는 ‘물질주의적 범위 안에서 결정된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

즉, 내면과 외면, 개인과 인류는 원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삶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다. 이것을 망각하는 순간 문명과 자연, 인간과 신 사이에 지독한 장벽이 세워진다. 그 원천에 삶과 죽음의 분리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말하자면, 혁명적 이념에는 죽음에 대한 탐색이 없고, 종교적 교리는 죽음에 대한 해석을 독점함으로써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해버린다. 하지만 생성과 소멸은 동시적인 것이다. 이 간단한 이치가 환기되지 않을 때 삶은 지극히 불구적일 수밖에 없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자본의 폭주를 제어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금융자본의 무한증식과 불멸에 대한 집착은 동일한 궤도를 달리는 ‘욕망의 전차’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비전과 영적 지혜가 조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 일기>의 마지막 장은 예상대로 죽음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수학과 글쓰기, 읽기와 같은 지식을 습득하려는 모든 행위를 가르치는 동시에 죽음의 위대한 품위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죽음이 단지 무서워하거나 언젠가 마주해야 할 불행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파란 하늘과 풀잎에 앉은 메뚜기를 바라보는 일상의 일부라고 말이다. 치아가 자라고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죽음도 배움의 일부다.” “이 아름다운 지구의 모든 것은 살아가고, 죽으며, 태어나고 또 말라 죽는다.” “우리 이전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죽음은 피해야 하고 뒤로 미루어야 하는 끔찍한 것이 아니라, 매일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위대한 광대함을 만날 수 있다.”
고미숙 고전학자

솔직히 여기에는 어떤 논평도 주석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즉각적으로 이 ‘위대한 광대함’의 지혜를 수락하는 수밖에는. 교황이 금융 전문가와 정치 지도자들에게 고대의 현자들의 말을 바로 ‘들이댈’ 때의 맥락도 이런 것일 터, 바라건대 크리슈나무르티와 프란치스코와 같은 이 ‘맨발의 성자’들의 급진성을 단서 삼아 혁명과 영성의 새로운 마주침이 곳곳에서 실험될 수 있기를! 

(한겨레. 201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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