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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강하고 빠른 ‘남성성’을 능가하는 ‘여성성’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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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06-09 13:58 조회3,8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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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억배 화백

내 서재 속 고전

<홍루몽>
홍루몽
조설근·고악 지음
최용철·고민희 옮김
나남출판사(2009)

갑오년 봄은 유달리 빨리 왔다. 4월이 채 되기도 전에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과 벚꽃까지 한꺼번에 피어나더니 홀연 천지를 뒤덮었다. 공동체(감이당&남산강학원)의 뒷산이기도 한 남산 순환도로를 산책하면서 우리는 수없이 탄성을 쏟아냈다. 오, 이런 지복을 누리다니! 하지만 봄날은 짧았다. 서둘러 만개했던 꽃들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자 순식간에 떨어져버렸다. 아, 또 이렇게 봄날이 가는구나!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이것이 저 ‘4월16일’의 전조라는 걸. 청명의 끄트머리 즈음, 진도 앞바다에서 수백명의 청춘들이 꽃잎처럼 스러져버렸다. 봄은 오행상 목(木)이고, 목은 만물을 살리는 기운이다. 그래서 청춘의 계절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눈부신 봄날, 단 한명의 청춘도 살리지 못했다.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바다로 가라앉았다. 과적과 부실로 무게중심을 잃어버린 ‘세월호’와 함께. 탐욕과 부패, 소외와 무지로 존재의 평형수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시대’와 함께.

<홍루몽>은 중국 최고의 소설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청춘남녀의 아름다운 ‘대서사’다. 그래서 봄이 오면 늘 <홍루몽>을 읽고 싶어진다. 노동과 화폐에 찌들어 사랑도, 우정도 ‘사막화’되어가는 우리 시대 청춘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다. 이런 에로스도 있다고. 이런 여성성, 이런 인생도 있다고. 하지만 4월16일 이후 <홍루몽>을 읽는다는 건 고통이었다. 작품 속의 주인공들 위로 세월호의 청춘들이 끊임없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설근(1715~1763)과 고악(1763 ~1815) 두 사람이다. 보다시피 생몰연대가 현격하게 다르니 공동작업을 할 처지는 아니다. 조설근이 80회까지 쓰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가 짜놓은 대략의 스케치를 보고 고악이 후반부를 완성하여 총 120회가 되었다. 일종의 릴레이 연작인 셈이다. 조설근은 남경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몰락으로 북경으로 이주하여 불우한 일생을 보냈다. 시화에 능했으나, 평생 <홍루몽> 80회를 지었을 뿐이다. 고악 역시 낙척한 선비로 지내다 친구의 부탁으로 홍루몽 후반부를 완성하였다. 조설근이 죽은 해에 고악이 태어난 점이 흥미롭다. 마치 하나의 생이 또 다른 생으로 이어지면서 ‘대서사’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청나라 왕조가 절정에 이른 18세기, 중국 최고의 명문가 저택인 ‘영국부’가 작품의 배경이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 소설은 이 거대가문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주인공 가보옥의 아버지는 황제의 신임을 받는 고위관료이고, 누이는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귀비다. 하여, 천하의 부귀와 복락은 다 이 가문으로 들어온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딱 한꺼풀만 벗기면 이 부귀영화의 이면이 드러난다. 입신양명을 둘러싼 온갖 비리와 부패, 얽히고설킨 치정관계, 위선과 허세, 폭력과 음모 등등. 지극한 부귀는 언제나 이렇듯 ‘존재의 침몰’ ‘윤리의 몰락’을 요구하는 법이다.

청년 가보옥은 원초적으로
‘여성성’을 타고난 남성이다
천성적으로 깊은 사랑에 빠진 ‘의음’은
오직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다
여성성을 둘러싼 남성적 질서는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자신을 지키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금지하고 억압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창조하고 살리는 데는 한없이 무력하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반생명적’이다

이것이 남성적이고 가부장제적 세계라면, 그 내부 깊숙한 곳에 아주 이질적인 공간이 하나 존재한다. 대관원이라는 ‘비밀의 정원’이 그것이다. 이곳은 ‘금릉 12차’라 불리는 젊고 아리따운 여성들의 공간이다. 여기가 이 소설의 진짜 배경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세계를 주도하는 건 이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 청년 가보옥이다. 이 청년의 시선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저 부귀공명의 세계가 아니라 사랑과 우정, 시와 낭만이 흐르는 대관원으로 향한다. 그는 원초적으로 ‘여성성’을 타고난 남성이다. 그럼 트랜스젠더? 아니면 카사노바? 둘 다 아니다! 그는 여성 같은 남성도, 여성을 ‘밝히는’ 남성도 아닌, 오직 ‘여성적인 것’을 깊이 사랑하는 존재다. 하여, 그는 ‘남성적인 세계’를 혐오한다. 더럽고 추악하며 냄새가 난다고. 오호, 이건 대체 어떤 경지일까? “세상에서 음란함을 좋아하는 자라 함은 대개 여인의 용모를 좋아하고 가무를 즐기며 웃고 떠드는 데 지겨워하지 않고 남녀간의 운우에 때를 가리지 않으며, 천하의 미녀들을 자신의 순간적 쾌락으로 삼지 못해 안달이나 하는 자이나 이는 말초적인 음란함을 추구하는 바보 같은 자들이다. 그런데 너(가보옥)는 지금 천성적으로 깊은 사랑에 빠진 자로 우리는 이를 ‘의음’(意淫)이라고 한단다. 뜻이 넘친다는 이 ‘의음’이란 두 글자는 입으로는 전할 수 없고 오직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을 뿐이며, 말로는 밝힐 수 없고 정신으로만 통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이 두 글자를 얻었다 함은 규중에서 진실로 좋은 벗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세상의 길과는 어긋나고 엇갈리어 백방으로 비난받고 수없는 눈총을 받게 될 것이다.” 경환선녀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가보옥의 ‘성정체성’이다. 의음이라? 참으로 낯설다. 바야흐로 ‘연애만능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의 사랑법은 실로 빈곤하기 짝이 없다. 남성(성) 아니면 여성(성), 멜로 아니면 포르노, 소유 아니면 배신. 이런 이분법이 고작 아닌가. 노동과 화폐에 속박되는 것도 그 때문일 터. 그러니 청춘이 어찌 황폐하지 않으리오. 봉건제와 가부장제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이런 ‘여성성’이 만개할 수 있을까? <홍루몽>에 감탄하는 이유다.

그래서 이 청춘남녀의 에로스는 끊임없이 유동한다. 사랑에서 우정으로, 우정에서 지성으로, 이성애에서 동성애 혹은 양성애로. 주인공 가보옥은 금릉 12차를 비롯하여 모든 처녀들을 사랑한다. 이 사랑은 우리가 아는 그 어떤 것과도 공통점이 없다. 소유와 쾌락, 집착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들의 삶을 완성시켜주는 것. 그래서 그와 만나는 순간 여성들의 개성은 봄날 꽃들처럼 만개한다. 용기와 결단력, 카리스마와 의리, 시적 상상력과 영적 지향 등등. 물론 가보옥을 둘러싼 삼각관계가 있긴 하다. 설보차와 임대옥이 그렇다. 하지만 이들의 삼각관계 역시 우리가 아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두 여성은 서로의 개성과 미덕을 깊이 존중한다. 가보옥 역시 임대옥을 사무치게 사랑하지만 그것이 다른 가치들을 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여성성의 세계는 위태롭다. 그걸 둘러싼 남성적 질서의 강고함 때문이다. 그 세계는 부와 권력, 폭력과 지배가 주도한다. 그것은 청춘을, 여성을, 생명을 잠식하는 기제들이다. 우리는 지금 그걸 생생하게 목격하는 중이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크고 빠르고 강한 것들을 신봉해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왠 줄 아는가? 자신을 지키는 데 더 급급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금지하고 억압하는 데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지만, 창조하고 살리는 데는 한없이 무력하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반생명적’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집안의 기둥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가모(할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이 거대가문은 참담하게 몰락해간다. 또 그와 더불어 열두 명의 여인들 역시 하나씩 스러져간다. 늑대 같은 남편의 시달림으로, 강도에게 납치되어, 치명적인 병과 원하지 않는 결혼으로. 마침내 가보옥의 연인 임대옥마저 지극한 슬픔 속에서 죽어버리자, 대관원의 봄은 속절없이 끝나고 말았다.

가보옥은 죽음보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과거를 준비하여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준다. 이제 철이 들어 입신양명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인가? 아니다!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이후 그는 돌연 과거장에서 사라진다. 훗날 한 나루터에서 아버지와 마주쳤으나 먼발치에서 작별인사를 드린 후 눈 덮인 광야를 향해 떠나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이다. 대체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또 거기에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고미숙 고전학자

이 소설의 또 다른 제목은 ‘정승록’(情僧錄)이다. 정이 지극하면 깨달음이 된다는 뜻. 그렇다면 우리들의 이 깊은 슬픔과 분노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가보옥이 눈 덮인 광야를 향해 걸어갔듯이 우리 또한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분명한 건 그것만이 저 진도 앞바다에서 무참하게 스러져간 청춘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점점 두려워진다. 다시 4월16일, 그 이전처럼 살아가게 될까봐. 서로 모른 척하면서 탐욕과 무능, 소외와 무지의 세상을 그냥 수락하게 될까봐.


(한겨레,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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