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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여, 놀면서 배우는 칠두령의 경지에 취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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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7-29 12:38 조회4,4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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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억배 화백

내 서재 속 고전

교사연수, 주부공부방, 환경단체, 구청 및 대학병원, 도서관, 경영자회의 등등. 지난 스물두 달 동안 내가 고전 강의를 했던 모임과 단체들이다. 지역으로 보면 서울, 부산, 대구, 익산, 전주 등이고 세대로 보면 10대에서 70·80대까지를 망라한다. 가히 ‘대중지성’의 시대라 할 만하다. 짐작하듯,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인문학 열풍 덕분이다. 그 허와 실을 따지는 건 일단 제쳐두고, 이런 식의 ‘가로지르기’ 자체는 분명 주목할 만하다. 대체 인문학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이질적인 존재들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상품과 자본, 정보가 아무리 막강하다 한들 그것이 흘러다니는 루트는 편협하다. 무엇보다 ‘세대적’ 교차점은 희박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고전은 삶과 삶을 연결한다. 그 안에 생로병사의 파노라마, 인생과 우주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역과 계층, 세대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저력도 거기에 있을 터이다. 아무튼 이렇게 분주한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니 당연히 책을 읽을 시간도, 글을 쓸 시간도 없었다. 대신 이런 때는 길 위의 모든 현장이 ‘나의 서재’가 된다. 현장의 구체성을 탐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서재!
이 ‘길 위의 서재’에서 건진 화두 하나. 이 ‘대중지성’의 흐름 속에서 대학(생)의 위상은 어디쯤일까? 물론 요즘은 대학에서도 인문학 강연을 한다. 솔직히 이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대학은 본디 인문학의 산실인데, 인문학 특강이 따로 있다니. 그건 대학에 인문학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 대학에는 인문학이 없다. 특정 분과학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 자유와 행복을 위한 기예로서의 인문학을 말한다. 이것은 대학의 모든 분과학에 삼투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학은 지성을 포기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지성이 없는 대학? 그건 ‘앙꼬 없는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과연 그렇다. ‘대학의 사막화’는 대학생들의 무기력한 신체성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난다.
대학생들에게 인문학은 일종의 구경거리다. 존재와 세계의 이치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 지적 긴장은 고사하고 그저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만’ 본다. 손에선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 채로. 질문을 하라고 하면 “알바에, 과제에, 정말 힘든데 어떻게 해야 되나요?” “무슨 책부터 읽어야 하죠?” “고전 공부하다 경쟁에 뒤처지면 어쩌죠?” 등등. 논쟁이 아니라 상담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그렇게 힘들면 대학을 그만두라고, 지성의 기쁨은 고사하고 오직 불안만을 야기하는 그런 대학을 왜 다니느냐고.
한번 따져보자. 단군 이래 대체 어느 시대가 청춘에게 녹록했던 적이 있었는가? 정말 지금 시대만 그렇게 힘든가? 멀리 갈 것도 없이 굶주림과 빈곤이 뼈에 사무쳤던 산업화 세대는 물론이고 혁명, 통일 같은 거대 담론을 등에 짊어지고 공장으로 감옥으로 가기를 자처했던 민주화 세대의 청년기를 떠올려 보라.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어, 배가 불러서들 그래’ 같은 ‘꼰대 담론’을 되풀이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느 시대건 세상의 문턱은 턱없이 높았다는 것. 과거에는 주로 빈곤과 억압이 핵심이었다면, 지금은 상품과 소비의 유혹이 치명적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각기 다른 문턱 앞에서 그걸 뛰어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건 어느 시대건 마찬가지다. 대학이 지성의 광장이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지성은 다르게 사유하고자 하는 열정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함이다. 그래서 야생적이다. 지성과 야생성의 눈부신 결합, 그것이 곧 청춘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시대 대학에는 이런 의미에 걸맞은 청춘이 없다.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라고 하기엔 이미 늦었다. 설령 제도와 시스템의 결함을 찾아낸다 한들, 과연 대학당국, 교육부, 정치인이 그걸 해결해줄 수 있을까. 하여, 이제 믿을 건 청년들 자신뿐이다. 오직 청춘의 열정을 분출시킴으로써만 ‘사막화’되어가는 대학을 구할 수 있다.
임꺽정 전집 1~10
홍명희 지음
사계절 펴냄

이런 믿음을 심어준 고전이 <임꺽정>이다. 임꺽정은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구한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던 벽초 홍명희의 작품이다. “순조선적 정조”를 견지하겠다는 작가의 선언대로 모더니즘적 유행에도, 사회주의적 이념에도 포획되지 않은 ‘원초적 생동감’이 두드러진다. 연산군에서 명종대까지 난세를 주름잡은 임꺽정과 그의 친구들, 곧 칠두령의 이야기가 기본 줄거리다. 1980년대에는 이 작품을 주로 신분 모순과 체제에 대한 저항 등의 관점에서 읽어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식의 독법에 결코 갇히지 않는다. 내가 이 작품을 이 시대에 다시 호명하게 된 건 무엇보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그 계보학적 탐색을 시도하기 위해서다.
칠두령은 길 위의 존재들이다. 국가, 신분, 직업,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묶어놓을 수 없다. 그들은 사농공상의 범주를 벗어난 불가촉천민이다. 게다가 그들은 저 범주 안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다. 처음 내 시선을 사로잡은 대목 하나.
“너 어디 사느냐?”
“양주 읍내 삽니다.”
“나이 몇 살이냐?”
“서른다섯 살입니다.”
“부모와 처자가 있느냐?”
“아버지가 있고 처자도 있습니다.”
“네 집에서는 농사하느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놉니다.”(3권 381쪽)
그렇다. 꺽정이는 ‘노는 남자’다. 그의 의형제들인 봉학이, 유복이, 천왕동이 등도 다들 비슷하다. 그럼 뭘 하고 노는가? 배우면서 논다. 꺽정이는 봉학이, 유복이와 더불어 서울 갖바치의 집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갖바치 역시 백정 출신이지만 유불도 ‘삼교 회통’의 이치를 터득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다. 이 청년들은 갖바치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면서 많은 걸 배운다. 검술과 표창, 활과 축지법, 돌팔매와 지략 등등. 배움이 문자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다. 그럼, 배워서 뭐하지? 아무 이유 없다. 그냥 배운다. 놀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논다. 배움에 대한 이 무모한 열정, 이들로 하여금 어떤 권위에도 무릎꿇지 않는 자존감과 배짱을 부여해준 원천은 바로 거기에 있다.
청년기에 터득해야 하는 건
백수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삶의 기예
곧 지성의 열락이 아닐까
그것은 철저히 신체적이다
‘임꺽정’에는 도처에서 질펀한 입말들과
가슴 뛰는 에로스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 ‘진맛’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 시대 청춘들이 이 경지와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시대에 뭔가를 배운다는 건 자격증, 곧 화폐로 교환된다는 걸 의미한다. 대학에서 ‘청춘의 열정’이 증발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교환법칙으로 인해서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밝히는데도 대학생들의 다음 스텝은 청년 백수다. 설령 그럴듯한 정규직 자리를 얻는다 해도 역시 중년엔 명퇴를 감내해야 한다. 더 나아가 정년까지 버틴다 해도 정년 이후의 많은 시간을 다시 백수로 보내야 한다. 결국 인간은 태생적으로 백수인 셈이다. 백수로 왔다 백수로 가는! 그렇다면 청년기에 터득해야 하는 건 이 백수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삶의 기예, 곧 지성의 열락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신체적이다. 백수에게 유일하고도 고귀한 자산은 몸뿐이니까. 이 정도만 해도 <임꺽정>이 우리 시대 청춘들에게 하나의 지도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고미숙 고전학자
또 하나. 이 작품은 무려 열 권이다. 스마트폰 시대의 호흡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알다시피, 스마트폰은 ‘빠름빠름’이 교리다. 1초 안에 엄청난 양의 정보를 담을 수 있다고, 그것이 능력이라고 선전해댄다. 이런 스튜피드! 그건 능력이 아니라 폭력이다. 그걸 담아서 대체 뭣에 쓰려는가? 그런다고 나의 24시간이 240시간이 된다던가? 무제한 다운로드를 받는다고 내 인생이 무제한으로 늘어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빠름에 끌려다니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정보의 바다에 익사하고 말 것이다. 이런 뻔한 이치를 외면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긴 호흡으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편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는다는 건 내용과 서사, 정보와 교훈을 얻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진짜 핵심은 책의 ‘리듬과 강밀도’를 체득하는 일이다. 스마트폰이 퍼뜨리는 ‘빠름의 교리’를 거스를 수 있는, 청춘의 열정에 긴 호흡을 불어넣을 수 있는 대안으로 장편 고전을 읽는 것만한 게 없다. 아 한가지 더. <임꺽정>에는 도처에서 질펀한 입말들과 가슴 뛰는 에로스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 ‘진맛’을 누릴 수 있다면, 스마트폰의 현란한 스펙터클 같은 건 좀 시시하게 보일 것이다. 아마도!
(한겨례, 1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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