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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숫자의 시간 속에서 잊고 있었던 삶의 서사 '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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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11-04 10:00 조회4,1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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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일으키는 감흥은 무엇일까. 숫자로 표시된 시간은 그것이 흘러간다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시간에 당연히 붙어 다녀야 할 풍경이라든지 정서, 태도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첫 눈이 올 때, 낙엽이 질 때, 새싹이 솟을 때 자연스레 기대하게 되는 장면들, 감정들, 바람직한 마음자세는 숫자가 알려주지 않는다. 자연의 움직임과 거기에 합당한 인간의 행동을 세세히 말해주는 시간을, 사실 우리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다. 달력 한 구석에 손톱만하게 표시돼 있는 절기다.
 
인문의역학연구소 '감이당'의 연구원 김동철ㆍ송혜경이 쓴 <절기 서당>은 '근대적 시간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새로운 시간을 재발견하고자' 절기를 연구한 책이다. 그에 따르면 절기는 숫자의 증감으로 표시된 시간과 달리 삶의 서사가 담긴 시간이다.
 
예를 들어 24절기 중 첫 자리인 입춘(24절기 중 처음)에 옛날 사람들은 아무도모르게 거지의 움막 앞에 밥을 한 솥 해놓거나 마을의 끊어진 다리를 잇는 등 좋은 일을 하곤 했다. 이런 행동은 단순히 약자에 대한 연민에서 하는 게 아니라 '봄의 윤리'였다. 입춘(立春)이란 '봄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봄을 세운다'란 말인데, 여린 새싹이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오기 위해 사람을 비롯해 온갖 만물이 협심해야 비로소 봄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약자를 돕는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비롯됐다. 이른바 시간의 윤리학, 생태적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과학적 사실 여부를 떠나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잡담이다. 옛날 농부에게 자연과 함께 사는 법을 알려준 절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러주는 행복을 탐구하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들이 말하는 11월의 윤리는 무엇일까. 양력 11월 7일은 입동이다. 입동은 24절기 중 음기가 가장 강력한 시기로 동물은 겨울잠에 들고 나무는 잎사귀를 떨궈 양기를 밖으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힘껏 웅크린다. 사람이 양기를 품는 방법은 한시적 온기를 주는 난로 옆에 붙어 있는 것보다 서로 교류하는 것이다. 관계 안에서 서로의 기를 나누며 뜨거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입동을 맞는 우리의 행동강령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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