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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알고자 하는 인간 본능, 스마트폰 등장과 함께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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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08-31 06:35 조회5,1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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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알고자 하는 인간 본능, 스마트폰 등장과 함께 사라지다

<2> 로고스는 운명이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 제389호 | 20140824 입력 
일러스트 강일구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아 가던 시대는 복되도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미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나오는 말이다. 언제 들어도 가슴이 뛰는 구절이다. 루카치의 말대로, 자본주의가 도래하기 이전엔 별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었다. 별의 운행이 지상의 계절을 만들고, 사계절의 리듬 속에서 인생의 희노애락이 펼쳐진다.

이 ‘천지인’의 삼중주를 일러 도(道) 혹은 로고스라 부른다.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지식의 시원에 점성술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저 무한한 별의 세계와 이 유한한 인간의 운명이 하나로 연결되다니, 이보다 더 경이로운 일이 어디 있으랴. 이로써 알 수 있는 바, 인간은 원초적으로 로고스적 존재다.

로고스는 말·지성·진리로 번역되는 낱말이다. 앎 혹은 지혜라 번역해도 무방하다. 말과 지성, 말과 진리의 직접성을 보여주는 표현인 셈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요한복음) 이것이 기독교의 창조론이다. 여기에 따르면, 말씀이 곧 신이다. 말씀이 세상을 창조했으므로. 신-말씀-창조, 이것이 로고스를 둘러싼 의미망이다.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의 신화는 더 리얼하다. “창조주는 빙산과 같았다! 그는 바위처럼 침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빙산을 던져 버리고 침묵을 깼다. 이 세상을 창조하고 싶은 열망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이 세상이 생겨날지어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이 창조되었다.” 여기서도 말이 세상을 창조한다. 창조의 소리, 그것이 곧 로고스다. 로고스는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를 이어주는 교량이자 전령사다.

하여, 문명의 탄생 이래 인간은 천지의 모든 것을 알고자 했다. 빅뱅에서 별의 탄생, 지구의 심층, 세포와 DNA, 사회구성체와 역사적 변동에 이르기까지. 왜? 그래야 자신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저 별의 세계로 나를 인도하고, 다시 그 별에 대한 앎이 생명과 존재의 비밀을 풀게 해준다. 하여, 모든 점성술은 천문학이자 운명론이다. 음양오행의 상생과 상극, 그 생극의 파노라마를 통해 운명의 지도를 그리는 사주명리학 역시 같은 패러다임에 속한다. 우주는 빅뱅 이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약 3만년쯤 전에,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또 자기를 낳고 거두는 이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생명체를 탄생시킨 것이다. 하여, 로고스적 충동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자 의지에 속한다.

문명은 이 로고스의 해방을 향해 달려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신화를 전승하고, 문자를 발명하고, 책을 보급하고, 학교를 만들고…. 좀 더 많은 앎을 좀 더 많은 인간들이 누릴 수 있도록! 20세기를 장식한 모든 혁명의 비전 역시 궁극적으로 이 구호의 틀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스마트폰이 우리 앞에 도래하였다. 스마트폰은 앎의 모든 장벽을 해체한, 그야말로 로고스적 의지로 충만한 기술이다. 하지만 아주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은 그 혁신의 동력을 망각해버렸다. 별을 보지도, 길을 묻지도 않게 된 것이다.

대신 에로스에 올인한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성적 열기를 느낄 때만이 비로소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또한 인간적인 속성이 아니냐고 묻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에로스적 충동은 인간만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다. 모든 동·식물도 다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 달리 인간의 에로스에는 고매한 가치가 담겨 있노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이를테면 쾌락을 전제하지 않는 사랑, 타자와의 깊은 공감, 화폐 법칙을 벗어나는 증여와 헌신 등등…. 맞다. 헌데, 그게 바로 로고스다. 앎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없는 한, 사랑과 윤리가 오버랩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때 사랑이란 화폐보다 더 지독한 소유의 게임이 돼버린다. 로고스가 배제된 에로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지는 우리 시대 멜로가 잘 보여준다.

멜로가 그리는 사랑은 일종의 상품이다. 특히 여성들의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켜주는! 남자 주인공들의 신분이 계속 상승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재벌 2세·3세에서 왕·황제가 등장하는가 싶더니 마침내 외계인까지 강림해주셨다. 2014년 한국과 중국을 강타한 멜로 ‘별에서 온 그대’가 그 주인공이다. 어느 날 지구에 불시착한 이 남자는 400살이나 먹었음에도 무지막지한 동안에 꽃미남이다. 늙음에 대한 경멸과 불멸에의 갈망을 한눈에 집약한 캐릭터다. 거기다 초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어, 순간이동과 괴력을 발휘하여 수시로 연인을 지켜준다.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일단 이 정도는 용서하기로 하자.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일단 이 남성에겐 네트워크가 없다. 시월드는 물론이고, 동업자도, 친구도 없다. 이쯤 되면 외계인이 아니라 전형적인 강남스타일 아닌가. 그래서인지 40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춘기의 첫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퇴행의 극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새로운 삶, 낯선 세계와의 접속을 의미한다. 그때 로고스적 본성이 요동치면서 아주 색다른 삶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퇴행적인 외계인을 소유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둘 다 ‘우주적 왕따’가 되는 수밖에.

내가 이 드라마를 끝까지 참고 본 건 대체 ‘어느 별에서 왔을까’가 궁금해서였다. 비록 상상의 산물일지언정 하나의 별이 설정되면 그 별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쏟아지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끝까지 그 별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맙소사! 그냥 익명의 ‘별’에서 왔다니, 이게 말이 되나? 요즘처럼 천문학이 만개한 시대에.

더 어이없는 건 여주인공의 반응이다. 외계인이라는 걸 알게 되자, 처음엔 괴로워하다가 결국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거기까진 좋다. 그 다음엔 당연히 물어야 하지 않는가? 그를 낳고 길러준 별에 대하여. 그곳의 자연과 환경·살림살이 등에 대하여. 하지만 여주인공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던 거다. 오직 그가 언제부터 자신을 사랑했는지, 또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것인지 따위만 알고 싶어 했다.

솔직히 이건 여성에 대한 모독이다. 여성들은 지적 호기심이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지성은 에로스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는 건가? 그래서인지 다른 멜로들에는 그래도 한동안 회자되는 대사가 있었건만, 이 작품은 한중 양국에서 빅히트를 쳤음에도 그럴싸한 대사 하나 탄생시키지 못했다. 주인공들의 미모와 현란한 이미지, 그리고 ‘치맥’이 전부란다. 그야말로 로고스적 결핍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별과 ‘그대’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대를 사랑하면 별에 대해서도 알고자 하는 법.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자신과 이 지구에 대해서도 궁금하지 않다는 뜻인데,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위태롭다! 자신에 대한 탐구 없이 타자를 받아들인다는 건 결국 맹목과 충동으로 화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과연 그랬다. 외계인이 별로 돌아간 이후 그녀는 거의 파탄 상태에 빠진다. 울부짖고 부수고 미쳐버리고. 사람들은 이것을 진정성이라 간주한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착각이다. 일상을 내팽개치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는 이가 대체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은 중독이지 진정성이 아니다. 사랑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번뇌의 카오스 속에서 리듬을 부여할 수 있는 힘, 그것이 곧 로고스적 충동이다.

그때 비로소 질문이 시작된다. 이 사랑의 원천은? 이 괴로움과 광기의 이유는?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근거는? 별을 보고 길을 찾는 진리에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인류는 이 로고스의 해방을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스마트폰을 통해 그 뜻을 이루었다. 스마트폰 안에는 인류가 도달한 최고의 지적 성취가 다 들어 있다. 먼 곳을 가지 않아도, 장서각을 뒤지지 않아도 손 안에서 다 접속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이들이 별을 보고 길을 찾는 여행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스스로 운명의 길을 열어가야 하지 않을까? 오래 전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별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한다. 살아 있을 땐 세상에 빛을 선사하고 죽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우주에 환원한다. 대표적인 예로, 초신성의 폭발이 이 지구를 만들고 생명체를 만들었다. 그 폭발과 증여가 없었다면 이 지구도, 우리도 없다. 고로 우리는 모두 별의 후예다. 당연히 우리들 존재의 심층에도 ‘증여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롯하여 모든 영적 멘토들이 청빈과 비움, 또 나눔을 강조하는 이치 또한 거기에 있으리라.

또 별은 홀로 빛나지 않는다. 누군가 보내는 빛을 반사해야만 빛을 발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고 그 반사체들끼리 서로를 비추는 우주적 네트워크, 이것이 인드라망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길 또한 그러하리라. 생로병사란 결국 인연의 그물망 속을 헤쳐가는 것임을. 공자의 인(仁), 부처의 자비, 노자의 도(道)가 탄생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러니 ‘별에서 온 그대’를 기다리지 말고, 감히 알려고 하라! 아니 별이 선사하는 앎의 향연을 만끽하라! 그때 비로소 지금껏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삶의 길이 열릴 것이니. 고로, 로고스는 운명이다!



고미숙 40대 이후 지식인 공동체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남산강학원&감이당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3종세트』 『달인 3종세트』 『 동의보감 3종세트』 등.

(중앙선데이. 201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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