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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노동보다 더 피곤해진 연애 … 차라으~리 의리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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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10-26 21:25 조회4,3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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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노동보다 더 피곤해진 연애 … 차라으~리 의리로 살자

<4> ‘나홀로족’의 생존법

고미숙 고전평론가 | 제397호 | 20141019 입력
일러스트 강일구
최신 통계에 따르면 ‘나홀로족’이 점차 증가 추세라고 한다. 심지어 조만간 ‘나홀로족’이 4인 가구를 넘어 가장 일반적인 가족 형태가 될 거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20세기 초 서구 문명의 도래와 더불어 이 땅에 수많은 가치가 탄생했다. 민족·국가·국민·계몽·혁명 등등. 대부분의 가치는 자본의 전 지구적 확장 및 디지털 문명과 더불어 점차 종언을 고하고 있다. 하지만 민족·국가의 최소 단위로 부상했던 ‘가족주의’만은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광고와 드라마, 영화 등 각종 미디어에선 ‘가족 사랑’만이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선전·선동’을 쉬지 않고 쏘아댄다.

그런데 현실은 보다시피 ‘나홀로족’의 부상이다. 기댈 곳은 가족밖에 없다는데, 가족을 포기(혹은 거부)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난다? 이 아이러니는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경제적 부담 때문이라는 진단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그게 전부라면 중산층 이상은 가족적 연대가 공고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해서 좀 더 심층적 접근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이 추앙해 마지않는 ‘가족주의’는 대가족이나 가문이 아니라 핵가족이다. 핵이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최소 단위를 의미한다. 엄마·아빠·아이로 구성된 트라이앵글이 핵가족의 형식이다. 역삼각형 꼴이라 그런지 출발부터가 몹시 위태롭다. 더 이상 쪼개지면 가족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자유연애 근저에 작동하는 화폐 법칙
그럼, 이렇게 위태로운 단위가 가족의 이상적 타이프가 된 연유는 무엇일까. 남녀 평등, 자유연애, 휴머니즘 등의 명분을 표방하긴 하지만 근저에 작동하는 건 어디까지나 화폐법칙, 곧 교환과 거래다. 그것은 이광수의 『무정』(1917년)에서 비롯된다. 주인공 형식은 구여성 영채와 신여성 선형을 두고 끊임없이 재고 또 잰다.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연애가 시작됐다. 이팔청춘이면 누구나 거쳤던 자연스러운 결연 과정이 온갖 꼼수와 계산을 수반해야 하는, 이른바 ‘작업’이 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연애를 지배하는 건 ‘스위트 홈’의 환상이다. 007가방을 들고 출퇴근하는 사무직의 아빠, 에이프런을 두르고 양식을 요리하는 엄마,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이. 언덕 위의 하얀 집, 그리고 멋진 자가용. 지금도 모든 이가 행복의 요건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항목들이다. 이걸 다 충족하려면 돈이 아주 많이 든다. 그러니 함부로 짝짓기를 할 수가 없다. 당연히 재고 또 재야 한다.

지난 100년간 현대인들은 이 공식을 향해 맹렬히 돌진해 왔다. 이 공식에 맞춰 연애를 하고 ‘스위트 홈’을 이루면 행복을 쟁취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면서. 결과는 참담하다. 그 공식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 하나 있다. 카프카의 『변신』이 그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변신』의 첫 문장이다. 그레고르는 이 집의 가장이다. 외판원으로 성실하게 일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간다. 자부심과 책무를 동시에 지닌 정규직이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벌레가 된 것이다. 갑옷처럼 딱딱한 등에 수많은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벌레라니. 이건 변신이 아니라 ‘변태’라 해야 맞지 않나.

더 어이없는 건 그 다음이다. 그레고르는 몸이 그 지경인데도 출근시간에 늦을까 봐 안달이다. 가족들의 삶과 미래가 온통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다. 하나, 웬걸! 파산한 줄 알았던 아버지는 그동안 꼬불쳐 놓은 비상금을 밑천 삼아 은행의 수위가 되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그런데도 그레고르는 가족들 걱정뿐이다. 특히 누이동생한테 바이올린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다. 웬 바이올린? 그래야 ‘스위트 홈’이니까. 아하, 이젠 알 듯도 싶다. 그레고르가 왜 벌레가 됐는지. ‘스위트 홈’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니 몸이 그렇게 굳어 버린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징그러움 혹은 끔찍함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제 그레고르는 가족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죽도록 뛰고 그 결과 갑충이 되었건만, 가족들은 이제 그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럽다. 그레고르는 결국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죽음에 이른다. 등골 빠지게 일하다 정말로 ‘등골이 빠져’ 죽은 것이다. 가족들은 그 기념으로 교외로 소풍을 떠난다.

“전차가 내려야 할 장소에 도착하자 잠자양(누이동생)이 제일 먼저 일어나 싱싱한 팔다리를 쭉 뻗었다. 잠자 부부의 눈에 그 모습은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스위트 홈’을 위한 새로운 희생양이 등장한 것이다. 언젠가 그녀 또한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할 것이다.

이처럼 ‘스위트 홈’은 결코 스위트 하지 않다. 몹시 쌉싸름하고 살벌하다. 교환법칙의 지배를 받는 한, 가족이란 서로가 서로를 ‘등쳐 먹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가족드라마가 언제나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음모와 배신,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증, 이것이 드라마가 보여 주는 우리 시대 ‘가족의 초상’이다. 그런 점에서 ‘나홀로족’의 출현은 필연적이다. 일단 경제적 이유 때문인 건 맞다. 교환법칙이 고도화될수록 핵가족은 단자들로 쪼개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 ‘스위트 홈’의 환상이 완전히 깨진 탓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갑충이 되고 싶지 않다. ‘스위트 홈’을 향해 달려가는 한 결국은 벌레가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눈치챘다고나 할까.

연애와 윤리는 일치하기 어려워
그렇다면 이 핵가족의 원천이자 출발인 연애는 어떨까? 마찬가지로 위태롭다. 핵가족이 그랬듯이 연애 역시 사랑의 ‘화폐적’ 변형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엔 연애가 노동보다 더 피곤한 일이 됐다. 오죽하면 개콘에도 ‘연애능력평가’라는 코너가 생겼을까. 원래 짝짓기엔 에너지가 많이 드는 법이다. 성적 쾌락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미친 듯이 탐닉하다 졸지에 증오의 화염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래서 연애와 윤리의 일치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는커녕 연애에 몰두하는 순간, 성욕은 항진되고 소유욕은 증식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요즘 대세인 ‘성형 열풍’이 그 증거다. 성형의 목적은 거의 대부분 짝짓기다. 당연히 섹시미가 유일한 척도다. 섹시해져야 많은 이성을 유혹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더 많은 화폐를 소유할 수 있으니까. 과연 이 광풍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성형천국’은 ‘연애지옥’이라는 사실이다. 성욕과 화폐가 만나는 순간 연애는 더 이상 에로스의 향연이 아니라 ‘작업이자 투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핵가족이라는 프레임과 더불어 이 지긋지긋한 연애타령도 같이 종식해야 하지 않을까. 아, 사랑을 포기하거나 에로스를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건 그냥 ‘자연의 흐름’에 맡겨 두고 다른 가치를 연마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정과 의리가 그것이다. 사실 ‘나홀로족’에게 절실한 건 연애가 아니라 우정이다. 연애는 선택이지만 우정은 필수다.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래사회의 방향은 하나다. 단자적으로 분열된 ‘나홀로족’들의 자유로운 연대와 공존! 그래서 모두들 길 위의 존재가 된다. 스위트 홈은 정착민이 되지만 나홀로족이 되면 굳이 하나의 장소나 집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나홀로족이 정착을 하면 고립과 단절로 치달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무조건 길 위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핵가족을 뛰어넘는 다양한 실험을 동반할 것이다. ‘셰어하우스’나 다가구 실험, 우리 공동체(남산강학원&감이당)에서 하고 있는 ‘더부살이 프로젝트’ 등이 거기에 속한다. 프랑스에선 독거노인과 청년들이 함께 사는 콜로카시옹(colocation) 운동을 실험 중이라고 한다.

여기엔 정해진 방향이나 룰이 없다. 각자의 조건에서 자유롭게 ‘헤쳐모여’ 하면 된다. 뭘 하든 상관없지만, 단 하나, 사람은 다른 사람과 연결돼야 비로소 ‘살맛’을 누린다는 소박한 진리, 아니 자연의 섭리만 잊지 않으면 된다.

이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일까? 타자들과 공존할 수 있는 윤리적 훈련이다. 그것이 바로 우정이고 의리다. 연애의 윤리를 훈련하는 건 쉽지 않지만 의리는 얼마든지 훈련할 수 있다. 아니, 의리야말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또 배운 만큼 내공이 커진다.

애 쓰고 기 쓴다고 사랑이 이뤄지나
연애는 ‘일대일’이지만 우정은 ‘일대다’다. 친구는 또 다른 친구로 이어지는 다리다. 생각해 보라. 평생 동안 소위 ‘운명적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될까. 기껏해야 서너 번일 것이다. 그 이상이라면 ‘연애 중독’을 의심해 봐야 한다. 실제로 한 번도 없는 경우도 적지 많다. 왜 그럴까? 사랑이란 내 안의 ‘자연(무의식)’이 요동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를 쓰고 기를 쓴다고 될 리가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핵가족이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지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연애(사랑의 ‘변태적’ 형식)만이 삶의 가치라고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그다음엔? 스위트 홈이 기다리고 있단다. 헐~ 간신히 빠져나온 그 막장의 늪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다시 갑충이 되란 말인가? 이 망상의 코스만 벗어나도 ‘나홀로족’의 앞날은 밝다. 그러니 이젠 정말 새로운 슬로건이 필요하다. ‘연애 말고 의리’!



고미숙 40대 이후 지식인 공동체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남산강학원&감이당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3종세트』 『달인 3종세트』 『동의보감 3종세트』 등.

(2014.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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