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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말 속의 사주명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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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11-21 16:42 조회4,0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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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고전 낭송 순간 삶은 전혀 다른 매트릭스로 진입

<5> 말 속의 사주명리학

고미숙 고전평론가 | 제401호 | 20141116 입력
일러스트 강일구
#1. 터치 마이 바디, 빨개요, 아드레날린, 내 거 같은 내 거 아닌…. 요즘 유행하는 노랫말들이다. 보다시피 무척 ‘야’하다. 어떻게든 ‘섹시함’을 강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섹스 자체야 뭔 죄가 있겠는가. 문제는 그것이 맹목에 가깝다는 데 있다. 맹목적 섹스는 포르노다. 포르노는 소유욕과 짝한다. 즉, 상대와의 소통이 아니라 상대로부터 오직 쾌락만을 탐하고자 한다. 그래서 폭력이다. 성이 범죄나 폭행 등과 동의어가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노릇이다. 이런 노랫말들을 전혀 폭력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걸그룹의 눈부신 미모와 댄스가 이 폭력성을 감추기에(혹은 눈감아주기에) 충분한 때문이리라. 더 중요한 건 이렇게 ‘야’한데도 몹시 진부하다는 사실이다. 소유와 중독을 표현하는 말은 어휘가 워낙 빈곤하다 보니(내 거, 빠져 등) 동어반복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청소년들의 언어폭력이 심각한 수준이란다. 특히 인터넷상에선 욕설과 악플이 난무한다. 언어폭력에 시달리다 자살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군인들도 구타보다 언어폭력이 더 괴롭다고 할 정도다. 해서 언어순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기도 한다. 예컨대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를 반복하라는 것이다.

야한 말, 욕설 없는 사회는 불가능
하지만 과연 그게 해답일까. 일단 욕이 없는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 또 청소년 시기엔 ‘욕설의 맛’을 즐기는 게 당연지사다. 문제는 욕 자체가 아니라 욕이 너무 상투적이라는 데 있다. 한두 개의 단어를 쉬지 않고 반복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청년들을 들뜨게 했던 그 질펀한 ‘욕설의 향연’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순화용 언어도 빈곤하긴 마찬가지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들은 두세 번만 들으면 금방 지겨워진다. 더 중요한 건 아무런 욕설을 담지 않아도 언어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싸늘한 시선, 냉담한 어조로 말하는 ‘고마워’는 욕설보다 더 굴욕적일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시대의 언어는 폭력과 빈곤 사이를 정신 없이 오가고 있다. 이 중에서 더 근본적인 것은 빈곤이다. 빈곤은 권태를 낳고, 권태는 폭력을 부른다. 폭력의 방향은 야하거나 파괴적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므로 언어순화로 언어폭력을 치유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언어폭력이란 4대 강에서 자라는 ‘큰빗이끼벌레’와 비슷하다. 생태계를 정화하려면 물길을 트고 강물을 힘차게 흐르게 해야 한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바야흐로 언어에 대한 새로운 전제와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누구든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 또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어 한다. 그런데 왜, 내 몸이 연출하는 가장 강렬한 활동인 언어에 대해선 이토록 무관심한 걸까. 공적으론 ‘영혼 없는’ 말들을, 사적으론 내 멋대로 지껄이는 폭언을, 노래방에선 섹시한 말을, 또 일상에선 돈·성적·승진·대박·연예인·스포츠 등과 관련된 말들이 거의 전부다. 학벌이나 교양의 차이도 별 의미가 없다.

창조와 생성, 존재와 윤리, 생명과 지혜 등 삶을 고귀하게 해주는 언어들은 왜 일상의 현장과 결합하지 못할까. 청소를 하면서, 회식을 하면서 니체와 스피노자, 공자와 연암을 이야기하면 안 되는가. 결혼식이나 집들이를 할 때 루쉰이나 카프카를 멋지게 낭독하면 안 되는가. 뒷담화를 하는 대신 ‘몸과 우주’에 대해 수다를 떨면 안 되는가. 스펙을 위해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도 왜 우리 입에선 이토록 황폐한 어휘들만 난무하는 것일까. 그것이 얼마나 몸에 해로울지는 말할 나위도 없다.

말과 밥과 끼, 모두 사람 입과 관련
주지하듯, 인간은 ‘호모 로퀜스’다. 언어적 동물이라는 뜻이다. 뇌세포가 복잡하게 진화한 이유도, 직립을 하게 된 이유도 다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다. 언어를 통해 ‘천지인’을 연결하고 시공의 장벽을 넘어 타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인간의 유한성을 넘을 수 있는 최초의, 최고의 활동이 바로 언어다. 어떤 언어를 구사할 것인가가 곧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한때 “내가 먹는 음식이 곧 나다!”는 말이 유행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하는 말이 곧 나의 운명이다!”

실제로 사주명리학적으로도 말은 운명의 핵심 키워드다. 사주명리학이란 생년월일시를 네 개의 기둥(사주)과 여덟 개의 글자(팔자)로 재구성하여 운명의 흐름을 탐사하는 동양적 지혜다. 이 지도는 다섯 개의 스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 스텝이 바로 말의 영역이다(전문용어로는 ‘식상’이라고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과 밥과 끼(재능 혹은 성욕)가 다 여기에 포함된다. 모두 ‘입’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자리가 잘 발달된 사람은 먹을 복과 언어능력을 타고나는 셈이다. 반대로 이 자리가 부족하거나 넘치면 말로 인해 밥그릇을 엎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말 한마디로 권력의 정상에서 추락하기도 하고, 공든 탑이 한번에 뒤집어지기도 한다. 이 말의 흐름이 왜곡될 경우 그것은 졸지에 ‘성적 충동’으로 변질된다. 말과 성욕이 하나의 벡터를 구성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오묘하다. 따라서 늘 소유와 중독에 찌든 말을 내뱉는 건 내 안에 변태적 성욕을 키우는 행위나 다름없다. 결국 어떤 말을 하느냐가 욕망의 흐름을 조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그 다음 스텝이 재물운과 관운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영역이기도 하다. 보통 사주팔자라고 하면 이 영역만을 다루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다음 스텝이 기다리고 있다. 무형의 가치, 곧 지혜의 영역이 그것이다(전문용어로는 ‘인성’이라 한다). 지혜는 ‘나’를 낳아주고 지켜주는 생성의 에너지다. 결국 사주명리학은 인간의 운명을 ‘말’에서 시작하여 ‘지혜’로 마무리하는 ‘생극(상생과 상극)의 원운동’인 셈이다.

그러므로 개인이건 집단이건 운명의 척도는 간단하다.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어떻게 지혜를 연마할 것인가, 재물운과 관운도 그 두 가지 사이에서 결정되는 셈이다. 양생적으로도 그렇다. 말이라는 활동은 신장의 물을 심장의 에너지로 펌프질하여 폐로 보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정(精)·기(氣)·신(神)’의 순환에 아주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실 인간의 활동은 대부분 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뇌에서 하는 사유운동과 발이 하는 구체적 행동 사이를 연결하는 것도 말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육체노동을 거의 하지 않는 시대에는 정·기·신을 순환할 수 있는 활동으로 말보다 더 강렬하고 구체적인 것도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말은 점차 소멸되어 간다. 스마트폰은 사람들을 더더욱 외딴 방으로 몰아넣고, 카톡은 수많은 친구와 연결되는 네트워크지만 ‘음소거’ 상태다. 지하철이나 버스, 기차에서도 더 이상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학교에서도 그렇다. 책 읽는 소리가 멈춘 지 오래고, 열띤 토론의 광장도 닫혔다. 심지어 청춘과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도 말의 길은 끊어져 버렸다. 이른바 ‘실어증 시대’가 된 것이다. 언어와 폭력이 동의어가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낭송은 텍스트를 신체화하는 독서법
북미 인디언들의 지혜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아이들은 목소리와 귀를 기울여 들어 주는 귀를 필요로 한다…. 만일 우리가 아이들이 말을 하도록, 그래서 그들의 가슴을 열도록 격려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발산할 다른 방법을 배울 것이고, 이 에너지는 그들을 파괴할 것이다. 아이들은 말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그것은 그들 내부의 독소를 방출하고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오게 해준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을 때,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과 경험은 내부에 머물게 되고, 그들의 삶을 오염시킨다.”(서정록 『잃어버린 지혜 듣기』 참조)

어디 아이들만 그렇겠는가. 모든 세대가 다 마찬가지다. 말이 밖으로 토해지지 않으면 그것은 파괴적인 에너지로 변환된다. 질병이 되고 폭력이 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고운 말’ ‘착한 말’이 아니라 ‘말의 역동적인 향연’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대안이 뭐냐고? 우리 공동체(남산강학원&감이당)는 오랫동안 낭송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낭송이란 텍스트를 신체화하는 독서법이다. 암기가 ‘음소거’ 상태에서 텍스트를 먹어치우는 것이라면 낭송은 소리의 파동을 통해 우주적 기운에 접속하는 일이다. 당연히 고전의 모든 텍스트가 다 가능하다. 방식도 여러 가지다. 낭송 오디션, 낭송 페스티벌, 낭송 파티 등. 참여의 형식 역시 다양하다. 가족끼리, 커플끼리, 혹은 동아리별로. 캠핑이나 여행과도 잘 어울린다.

고전을 낭송하는 순간 삶은 전혀 다른 매트릭스로 진입한다. 논어를 낭송할 때면 공자가 되고, 불경과 접속하는 순간 부처가 되고, 동의보감을 통해서는 몸과 우주의 이치에 눈뜨게 된다. 말이 파동이요 기운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낭송은 최고의 양생술이자 개운법이다(더 궁금한 내용은 고미숙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와 낭송Q 시리즈를 참조할 것).

생각해보니 그렇다. 고전의 스승들은 물론이고 임꺽정의 칠두령, 그리스인 조르바, 춘향이와 심청이 등의 카리스마는 다 입담이 그 원천이다. 그들의 언어는 지혜롭고 또 유머러스하다. 그들이 사랑과 우정의 화신이 된 것도, 길 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거기에서 비롯한다. 하여, 이젠 알 것 같다. 인생이란 ‘말과 밥과 길’의 삼중주라는 것을.



고미숙 40대 이후 지식인 공동체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남산강학원&감이당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3종세트』 『달인 3종세트』 『동의보감 3종세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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