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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0대의 탈주와 자유의 표상, 허클베리 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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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11-21 16:50 조회3,7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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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의 탈주와 자유의 표상, 허클베리 핀


등록 : 2014.11.20 20:38수정 : 2014.11.20 20:38


그림 이억배 화백

내 서재 속 고전

허클베리 핀의 모험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민음사 펴냄(1993)


주석 달린 허클베리 핀
마이클 패트릭 히언 주석, 박중서 옮김/현대문학 펴냄(2010)


<톰 소여의 모험> <마크 트웨인 자서전> <주석 달린 허클베리 핀> <인간이란 무엇인가?> -지난 몇 달 동안 내 서재의 중심을 차지한 주인공들이다. 이 책들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다름아닌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하 ‘헉핀의 모험’)이다. 한 월간지에 로드 클래식(여행기 고전)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는데, 한국(열하일기), 중국(서유기), 스페인(돈키호테)을 거쳐 마침내 미대륙으로 넘어갔다. <헉핀의 모험>이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 여행기가 특이한 건 미성년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위의 목록에서 보듯, 로드 클래식의 주인공들은 성인이자 순례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인한 체력과 깊은 경륜, 구도적 열정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국경을 넘고 문명의 장벽을 넘는 대탐험에 나서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헌데 <헉핀의 모험>은 중딩 정도의 미성년자가 주인공이 되어 미시시피 강을 따라 흘러가는 대장정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이 여행이 아동용 모험류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현대의 미국 문학은 모두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부터 비롯했다.” 헤밍웨이의 전언이다. 무엇보다 사륙배판에 950여 쪽에 이르는 <주석 달린 허클베리 핀>의 위용이 작품의 위상을 한눈에 말해준다. 물론 찬사가 높으면 악평도 따라다니는 법. 출간 당시는 물론이고 마크 트웨인이 ‘불멸의 명성’을 얻은 뒤에도 이 작품은 공공도서관이나 학교 등에서 종종 금서로 분류되곤 했다. 심지어 ‘마크 트웨인 중학교’에서도 유해한 책으로 찍히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했다. 최고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셈인데, 이 양가성이야말로 이 작품을 끊임없이 다시 읽게 하는 원동력일 터이다.


헉은 그 유명한 ‘톰 소여’의 친구다. <헉핀의 모험>이 출간되기 전, <톰 소여의 모험>에 카메오로 먼저 등장한다. 톰 소여는 악동이긴 하지만, 그래도 교양있는 중산층에 속한다. 교환법칙과 연애의 밀당에도 능숙하기 이를 데 없다. 그에 비하면 헉은 ‘밑바닥’ 인생이다. 동네에서 이름난 주정뱅이의 아들이자 부랑소년이다. 옷차림도 넝마에 누더기가 기본이다. “날씨가 좋으면 남의 집 문간 계단에서 잠을 자고 비가 올 때면 큰 나무통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학교에도 교회에도 갈 필요가 없었고…. 낚시질을 하든 헤엄을 치든 마음이 내킬 때 어떤 장소에서건 할 수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노숙아 아니면 늑대소년 등으로 조명될 판이다. 헌데, 이어지는 멘트는 아주 뜻밖이다. “한마디로 이 녀석은 정말로 인생을 살맛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을 뭐든지 다 갖추고 있었다.” “세인트피터스버그에 살면서 어른들한테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얌전한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하, 그렇구나! 이게 청소년의 본성이구나! 하지만 우리에겐 이런 캐릭터가 몹시 낯설다. 깔끔하고 고분고분하고 귀엽고…. 이게 우리가 아는 (혹은 바라는) 10대의 모습이다. 만약 헉같은 아이가 있으면 십중팔구 범죄를 연상하기 십상이다. 즉각 공권력이 개입하여 어떻게든 교화를 하려고 들 것이다. 헉도 그런 운명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톰과 모험을 벌이다 뜻밖에 큰돈을 손에 넣게 되자, 그때부터 헉은 더글라스 과부댁에 입양되어 온갖 규칙과 매너를 익혀야 했다. 헉은 ‘돌아버릴’ 것 같아 다시 통나무로 돌아간다.


학교·가족·국가·교회가 쳐놓은
온갖 장벽 뛰어넘는 자유의 여정
쉽게 얻는 것에선 충만감도 없다
‘간섭과 돌봄’이라는 손길을
거부해야 두 발로 설 수 있다


헉을 찾아간 톰에게 헉은 이렇게 절규한다. “과부댁은 종이 땡땡 울리면 식사를 하고, 종이 땡땡 울리면 잠을 자고, 또 종이 땡땡 울리면 일어난다니까. 모든 일이 하나같이 지독하게 규칙적이라서 정말로 견딜 수가 없어.” “다른 아이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어, 헉.” “톰, 나는 다른 아이들이 아니잖아.” 그렇다. 나는 “다른” 아이가 아니다! 이보다 더 절실한 외침이 또 있을까.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먹을거리가 너무 쉽게 얻어지니까 도무지 밥맛이 없어.” 이 대목에서 완전! 감동 먹었다. 그렇다. 쉽게 얻어지는 것에선 어떤 충만감도 없다. 그것이 생명과 몸의 원리다. 헉은 길바닥에서 그런 심오한(!) 이치를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그 ‘맛’을 잃어버리게 된 건 다 ‘그 죽일 놈의’ 돈 때문이다. “내 몫도 네가 다 가져…나는 말이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 따위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어.” 화폐법칙의 장벽을 간단히 뛰어넘은 것이다. 이것이 헉이다. 아니, 이것이 청소년기의 야생성이다.


<헉핀의 모험>은 이 문제적 꼬마의 자전적 이야기다. 헉을 괴롭히는 건 두 가지다. 술주정뱅이 아빠의 ‘폭력’과 과부댁의 ‘과보호’가 그것이다. 폭력은 두려움을 낳고, 과보호는 의존성을 낳는다. 헉으로선 둘 다 견딜 수 없다. 해서 그 두 개의 사슬로부터 도주하기로 결심한다. 마침 흑인노예 짐도 남부로 팔려갈까봐 두려워서 무작정 튀었다. 둘은 잭슨섬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추격자들을 피해 미시시피강을 따라 기나긴 여행을 하게 된다. 헉의 탈주가 자유를 향한 인류사적 모험이 되는 순간이다. 이 여정에선 문명의 허구성과 잔인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강물이 모든 것을 비추듯이, 헉과 짐은 문명의 이면을 ‘리얼하게’ 투사하는 일종의 반사체였던 것.


문명사회는 부조리 그 자체였다. 한 마을에선 두 가문이 숙원(宿怨)으로 쉬지 않고 총질을 해댄다. 헉이 뭣 때문에 숙원을 지게 되었냐고 묻자, 대답이 아주 걸작이다. 너무 오래되어서 아무도 모른다나. 헐~ 목적도, 이유도 모른 채 끊임없이 죽고 죽이다니. 이 야만적인 전투는 양쪽 모두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또 천막 부흥회는 성령의 열기와 더불어 에로틱한 분탕질로 들끓고, 그 와중에 야바위꾼들은 군중들에게 돈을 뜯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이런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헉은 토할 것 같다. 그래서 끊임없이 도주한다. 강물 위를 자유롭게 떠다니는 뗏목 위로. 뗏목 위에는 ‘좋은 친구’ 짐이 있고, 드넓은 하늘이 있고, 숲과 바람과 물결이 있으므로.


그렇게 흘러가다 마침내 헉은 최후의 장벽과 마주한다. 두 야바위꾼들이 짐을 40달러에 팔아먹은 것이다. 헉은 깊은 고뇌에 잠긴다. 짐을 구출할 것인가? 아니면 그를 다시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 이 작품의 배경은 1840년대. 남북전쟁(1861) 이전만 해도 노예제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도망노예를 돕는 건 누군가의 재산을 탈취하는 “아주 비열한” 짓에 속했다. 헉은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강을 따라 내려온 우리의 여행을 다시 떠올려보게 되었다. 나는 짐이 항상 내 앞에 있었음을, 낮이고 밤이고, 때로는 달빛 아래서나 때로는 폭풍 아래서도 그러했음을, 우리는 함께 뗏목을 타고 떠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하고 웃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 심지어 나야말로 짐 영감에게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라고, 지금 당장으로선 유일한 친구라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헉은 드디어 결단을 내린다. “좋아, 그러면 지옥에 가자.” 우정과 자유를 위해 지옥행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짐을 다시 훔쳐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혹시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을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 일 역시 하고 말 것이었다.” ‘톰 소여’류의 악동소설의 범주를 넘어 미국 문학의 최고봉이 되는 순간이다. 10대의 야생성이 객기 어린 방랑이나 모험이 아니라 학교와 가족, 국가와 교회가 쳐놓은 온갖 장벽을 뛰어넘는 자유에의 여정이 될 수 있음을 멋지게 그려낸 것이다.


고미숙 고전학자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상념이 떠올랐다. 우리에게 청소년은 감시와 보호의 대상이다. 끊임없이 간섭해야 하고, 또 보호해줘야 한다. 그 결과 청소년은 한없이 나약하고 소심해졌다. 그와 동시에 간섭과 돌봄의 시간은 점점 더 늘어난다. 대학에 가도, 취직을 해도 그 장막은 거두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태라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질 태세다. 그 끝에는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누구나 알고 있듯이, 자신을 구하는 것은 오직 자기뿐이다! 어떤 교육도 ‘렛잇비’ 이상이 되기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이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열어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간섭과 돌봄’이라는 두 손길을 동시에 거부할 수 있어야 두 발로 설 수 있는 법, 탈주와 자유를 꿈꾸고 기획하기에 10대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다!


고미숙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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