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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남산골 공부 공동체 마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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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08-28 10:23 조회4,1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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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이대로 살면 죽습니다!” 최근 ‘자기 배려의 인문학’(북드라망)이라는 책을 낸 강민혁(45)씨가 7년 전 의사로부터 들었던 경고다. 그 당시만 해도 강씨는 일에 치이고 술에 절어 살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지성이니 문학 같은 단어는 소녀 취향이라 생각했다. 철학책은커녕 독서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랬던 그가 불과 7년 만에 플라톤, 에피쿠로스, 세네카 등 서양고전철학부터 니체, 푸코, 데리다 등 현대철학을 줄줄 꿰고 책을 출간하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강씨는 은행원이다. 의사의 경고를 들었던 당시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 아침 7시30분에 출근해 자정이 될 때까지 꼬박 일에 매달려야 하는 생활이 4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회사에서도 소문난 주당이었다. 남는 시간은 술 마시기도 부족했다. 담배는 하루 3갑을 피워대던 골초였다. 당연히 ‘빵점 남편’에 얼굴 보기도 힘든 아빠였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부인 손에 끌려 병원에 갔다. 몸의 심각성을 깨달아서인지 의사의 경고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진짜 이대로 살면 안 될 것 같았다.
   
   문득 신문에서 읽었던 지식인 공동체 ‘수유+너머’가 떠올랐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씨가 1997년 개인 연구실로 시작해 인문학 연구실로 발전시킨 곳이었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마침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공부하는 강좌가 등록 마감을 앞두고 있었다. 그날도 술을 잔뜩 마시고 ‘미친 척’ 찾아간 ‘수유+너머’에서 그는 전혀 다른 세상을 봤다. 눈 내리는 겨울 저녁 형광등 아래 30~40명이 강의를 듣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문화 충격이었다. 등록을 하고 그날로 술·담배를 끊었다. 강씨는 그날을 자신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날로 꼽았다. 러닝머신 위에서 이유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뛰다 스톱버튼을 누르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 무엇을 위해 뛰어야 할지 자신의 삶을 다시 리셋한 순간이었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달려가 강의를 듣고, 일요일도 하루 종일 강의실에서 보냈다. 일요일 아침 니체 세미나를 듣고, 오후에 불교 세미나, 저녁에 들뢰즈 세미나를 들었다. 철학의 ‘철’자도 몰랐으니 전혀 다른 언어를 듣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를 버티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
   
   “6년 전 술·담배를 끊고 홀로 찾아가 만난 이 세계는 나에게 진정 새로운 삶을 안겨주었다. ‘사회생활’에서 맺은 협소하고 소모적인 인간관계는 끊겼으나, 이 세계에서 우정의 공동체라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얻었다. 이곳에서 형성된 지성의 연대는 여러 두려움을 없애주었다. 아니 그런 두려움은 두려움조차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나는 여전히 은행원이고 평범하지만 내가 딛고 있는 세계는 이전과 달라졌다.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이다.”
   
   강씨가 ‘중년 은행원의 문학, 철학, 글쓰기 창구’라고 부제를 붙인 그의 책 서문에 쓴 글이다. 강씨는 ‘수유+너머’가 분리돼 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함께하며 감이당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감이당에서 그는 ‘약선생’으로 통한다. 강씨는 “서비스업 습성이 몸에 밴 탓인지 칭찬을 잘해서 사람들에게 ‘약 친다’고 놀림을 받다 붙여진 예명이다”고 설명했다. 감이당은 의역학으로 연구 영역을 넓힌 고미숙씨가 인문학과 의역학을 접목, 생명과 우주의 근원을 탐구해 보자는 의지를 가지고 서울 남산자락에 만든 배움터이다. ‘감이당’에는 강씨처럼 철학책 한 줄도 안 읽다 어느 날 갑자기 공부에 빠진 ‘호모쿵푸스’(고미숙씨가 만든 용어로 머리가 아니라 쿵후처럼 온몸으로 배우는 공부의 달인)들이 많다.
   
▲  보충수업을 통해 20주에 걸쳐 완독한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지난 7월 30일 밤 10시 서울 중구 필동 남산자락 깊숙이 자리 잡은 골목길. 초행길엔 찾기 힘든 2층 주택의 한 방에선 공부가 한창이었다. 앉은뱅이 책상을 각각 앞에 두고 10여명의 사람이 빙 둘러 앉아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들은 감이당 강좌 중 하나인 ‘중년남성을 위한 인문의역학’을 수강하는 학생들이다. 공부와 거리가 먼 중년남성들을 끌어보자고 만든 강좌다. 인문학 초보들도 들을 수 있도록 비교적 편안한 내용으로 짜여 있다. 강의를 개설해 놓으니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수강생도 몰려들어 ‘중년남성을 위한 인문의역학’보다는 ‘중년을 위한 아름다운 인문학’이란 뜻에서 ‘중남미’ 과정으로 부르고 있다. 1년 4학기(10주씩 40주) 과정으로 동의보감, 대학, 서양철학 등을 공부한다. 강의시간은 매주 화요일 저녁 7시30분부터 10시30분까지이다.
   
   수요일 저녁에 이들이 모인 이유는 보충학습을 위해서다. ‘중남미’ 수강생 중 뜻 있는 사람들끼리 철학 원전 한 권을 선정해 같이 읽고 공부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만든 공부모임이다. 매주 수요일 7시 반부터 모여 3시간씩 공부를 한다. ‘중남미’ 과정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는 강민혁씨가 이 모임을 이끌고 있다. 이들이 선택한 책은 미셸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이었다. ‘자기 배려’라는 개념에 관한 연구를 제시한 책으로 무려 588쪽에 이른다. 강씨가 책을 강독하고 해석도 곁들이면서 공부를 진행하고 있었다. ‘테크놀러지적 사유의 방식’이니 ‘세네카의 의식점검’이니 기자에게는 낯선 언어들을 붙들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열공 중이었다.
   
   이날은 마침 ‘주체의 해석학’을 완독한 날이었다. 한 권을 다 읽기까지는 꼬박 20주가 걸렸다고 한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케이크에 초를 꽂고 서로에게 박수를 쳐 주면서 책거리 기념을 했다. 책을 모아놓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손때 묻은 페이지마다 형광펜, 볼펜으로 밑줄이 좍좍 그어져 있었고 깨알 같은 메모들이 가득했다. CEO, 교수, 약사, 기자, 주부 등 나이도 직업도 다양하지만 이곳에서는 다 같은 학생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꼭 뒤풀이도 한다고 했다. 맥주나 차 한잔 앞에 두고 공부하는 방법을 교환하고 글쓰기에 대한 고민도 나누면서 서로에게 ‘도반’이 돼 주고 있었다. 뒤풀이 간다는 이들을 붙잡고 앉아 왜 공부를 하는지, 공부가 자신에게 주는 변화는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남학생 2명을 포함 40~60대 학생 10명은 공부의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다. 굳이 이름을 따로 밝힐 필요 없이 공부가 그들에게 주는 느낌은 같아 보였다.
   
   “취업이나 입시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 진짜 공부를 하는 거잖아요. 공부가 근육에 콕콕 박히는 느낌이랄까. 알아간다는 희열이 얼마나 큰 것인지 경험하고 있어요. 공부도 중독성이 있더라고요.”
   
   “철학 원전을 혼자서 읽는 것은 쉽지 않아요. 읽을 기회도 많지 않고. 이번까지 원전을 읽는 공부에 두 번째 참가하고 있어요. 처음엔 한 장 넘어가는 것도 힘들었는데 두 번째 들으니 무슨 이야기인지 내용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너무 신기하고 감동이었어요. 혼자 읽으면 2~3시간 동안 한 장 나가기도 힘든데 500쪽이 넘는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니 짜릿하죠.”
   
   “강의와 상담을 하고 있는데 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내 안으로부터 올라왔어요. 나도 모르면서 누군가를 상담해 준다는 것이 민망했어요. 삶의 현장에서 질문이 이어지니 내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삶에서 생긴 질문을 풀기 위해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다 보면 또 다른 질문이 따라와요. 존재의 순환처럼. 이 나이에 학생으로 돌아가 보충수업 하러 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이 시간이 일주일을 버티게 해줍니다. 직업도 나이도 잊고 다 같은 학생이 돼서 공부의 장이 주는 에너지에 푹 빠져요. 이 시간을 기다리는 설렘과 공부의 힘으로 가족을 대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요.”
   
   “공부를 하기 전에는 삶을 보는 관점이 한두 개였다고 하면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관점들이 생겼어요. 관점이 달라지니 삶을 대하는 방식이나 태도도 바뀌게 되더라고요. 세상이 훨씬 풍요롭게 보여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보통 사람들처럼 저도 승진, 돈에 매달리는 삶을 살았어요. 공부를 하다 보니 통념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 훨씬 줄었어요. 내 아이에게도 좋은 대학 가는 것보다 행복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공부를 하고 난 후 삶에 대한 두려움이 덜어졌어요. 막연한 두려움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됐다고 할까요.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어요.”
   
   “그리스 철학자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구나. 그들도 직업을 영유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살 것인가를 고민했구나. 시대를 불문하고 삶의 고민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위로가 되더라고요.”
   
   “사실 혼자서는 몇 줄 읽다 보면 어느새 고개를 꾸벅거리곤 했는데 같이 공부한 덕분에 완독할 수 있었어요. 오늘도 회사 끝나고 술자리 유혹을 뿌리치고 오느라 힘들었어요. 각자 위치에 따라 환경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 같아요. 책을 읽다 보면 승진, 성공을 뛰어넘어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것이 바로 고전의 가르침 아닐까요.”
   
   “어느 순간 보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제가 공부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내가 느끼는 즐거움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게 해주고 싶었어요. 다음 학기에 친구가 등록을 하기로 했어요.”
   
▲  감이당의 수업 중 하나인 ‘중년남성을 위한 인문의역학’ 교실. photo 김종현 영상미디어 기자

   이곳에 오기까지 대부분 철학책 한 권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각자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길게는 2년에서 짧게는 ‘중남미’ 과정에 등록한 후 몇 개월 만에 그들이 향하는 삶의 방향은 비슷해져 있는 듯했다.
   
   먼저 책을 읽은 선배의 입장에서 ‘주체의 해석학’ 강독을 맡아 20주 동안 매주 수요일 저녁을 이들과 함께한 강씨가 말했다. “사람은 안 변한다고 하잖아요? 특히 40대 이후에 머리가 굳어져서 더 안 변한다고들 하죠? 사람은 변합니다. 저도 그랬고 여기 오신 분들도 변했습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 생활도 바뀝니다. 표정만 봐도 다들 훨씬 밝아지고 즐거워졌습니다. ‘먹고 놀고 술 마시고’ 통념적으로 살면서 생긴 쾌락이 아니라, 다른 경로·다른 감각에서 느끼는 또 다른 쾌락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강씨는 공부를 시작하고 술, 담배와 함께 육식도 끊었다. 생전 안 하던 달리기를 시작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80㎏에 육박하던 몸무게는 10㎏이 넘게 빠졌다고 한다. 생각의 변화가 생활은 물론 몸까지 변하게 만든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자 경기도 양주가 집이라는 60대의 이명희씨가 서둘러 일어섰다. 수업이 있는 화요일과 수요일 보충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매주 이틀 이곳에 오는데 왕복 세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했다. 이씨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니 이젠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글쓰기는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올라온다. 글쓰기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고 말하고 바쁜 걸음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내려갔다.
   
   감이당에는 이들처럼 평일 저녁과 주말을 이용해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중남미’ 과정을 포함해 현재 200명이 넘는다. 감이당의 강의는 ‘TG스쿨’에서 진행한다. TG스쿨은 ‘Trans Generation School’의 약자로 세대를 불문하고 배움을 연마하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현재 TG스쿨은 감이당의 간판 강좌인 ‘대중지성’을 비롯해서 ‘중남미’ ‘나는 백수다’ ‘청소년 비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대중지성’은 1~3학년 과정과 ‘포스트 대중지성’ ‘수요 대중지성’ ‘목요 대중지성’반이 있다. 모두 1년 과정으로 10주씩 4학기로 나눠서 진행된다. ‘대중지성’반은 글쓰기를 집중 훈련하고 있다. 강민혁씨처럼 글쓰기 훈련을 거쳐 책까지 낸 경우도 꽤 있다. 수강생들의 글쓰기를 독려하고 출판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아예 2012년 ‘북드라망’이라는 출판사도 만들었다. 외부 출간도 하고 있지만 수강생들에게 ‘북드라망’ 블로그에 한 가지 주제로 연재를 하게 하고, 연재한 글을 묶어 책을 내고 있다. ‘갑자서당’ ‘누드 글쓰기’ ‘절기서당’ 등이 그렇게 출간된 책들이다.
   
   정규 강좌 이외에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가 수시로 열린다. 주역 세미나, 마음 탐구 세미나부터 조선왕조실록 세미나까지 주제도 다양하다. 특히 매년 12월 첫째 주에는 감이당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학술세미나가 대대적으로 열린다. 3~4일간 이어지는 학술세미나에서는 에세이 발표를 비롯해 연극, 노래경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축제처럼 열린다. 인문학 멘토가 된 고미숙의 뒤를 이을 ‘포스트 고미숙’ 신춘문예 공모도 하고 있다.
   
   감이당이 있는 남산골 일대는 공부 공동체 마을이 돼가고 있었다. 감이당이 있는 ‘깨봉빌딩’을 중심으로 TG스쿨과 청년 기숙사인 ‘베어하우스’ ‘풀집’ ‘곰집’들이 남산자락 필동 골목 곳곳에 포진해 있다. 청년학사인 ‘풀집’ ‘곰집’도 2호, 3호로 계속해서 늘려가는 중이다. 지난 8월 2일 오후 ‘깨봉빌딩’을 찾았다. 빈 세미나실에는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하는 사람이 몇 명 앉아 있고 강의실에는 20~30명이 둘러앉아 한창 의역학 강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강의가 끝난 후 감이당과 인연을 맺은지 4년 이상이 됐다는 몇 사람을 만났다.
   
   개중에는 감이당이 맺어준 커플도 있었다. 류시성(34)·송혜경(34)씨는 공부친구로 만나 올 1월에 부부가 됐다. 북드라망에서 출간한 ‘절기서당’은 류씨와 송씨의 공동작품이다. 신혼집도 감이당 근처에 있다. 류씨는 “우리처럼 공부를 하러 왔다 아예 이곳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아 감이당 주민들이 마을을 접수 중이다”고 말했다. 자신을 ‘청년백수’라고 소개한 류씨는 감이당 살림을 맡아하면서 어떻게 하면 평생 공부만 하면서 빌붙어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류씨는 “여기서는 공부만 하고도 먹고살 수 있어요. 공부를 잘하고 글을 잘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니에요.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회계도 필요합니다. 청년백수들을 위해서는 기숙사가 있어요. 수강생들이 내는 수강료로 이 모든 것이 이뤄지고 있으니 감이당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는 셈입니다”라고 말했다.
   
   류씨는 이곳에 오기 전에는 공부와 거리가 멀었다. 학교는 적만 걸어놓은 채 술 마시고 아르바이트해서 여행 다니는 것이 본업이었다. 남들처럼 양복 입고 정규직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 보니 10년 만에 겨우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28살 때 뭘 해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했어요. 처음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고미숙 선생님 강의를 듣게 됐어요. 사방을 쏘다니다 꼼짝없이 한자리에 앉아 눈알만 굴리고 있자니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재미있었어요. 자기 성찰 없이 남들과 다른 길만 가려고 했는데 공부를 통해 삶의 작동원리를 배우고 나니 결국은 나도 남들과 똑같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류씨는 누구나 공부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강사가 학생이 되고 학생이 강사가 되기도 하는 곳이 이곳의 특징이란다. 류씨는 “공부 자체보다 사람들을 통해 배우는 것이 훨씬 많다. 책이 아니라 옆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진짜 스승이다”고 말했다.
   
   고교 교사인 송씨는 5년 전 공부를 시작했다. 쇼핑 좋아하고 맛집 쫓아다니던 평범한 20대였지만 마음속에는 늘 “나를 알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은 거미줄에 걸린 것 처럼 답답했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강의도 들으러 다니고 명상도 해보고 책을 읽었지만 그때뿐, 어디에도 나는 없는 것 같았다. 서른 살이 되던 해 ‘나에게 주는 선물’로 감이당 대중지성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그리고 정답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숭이가 가지를 바꾸듯 너도 바뀌는 것이다.’ 강의 시간에 이 말을 듣는 순간 고유한 나는 없다는 깨달음과 함께 나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어요. 공부하고 밥 먹고 숨 쉬는 일상 속에도 내가 있었어요. 그 동안 멀리서만 찾으려고 했던거죠. 사소한 것,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 결혼 전이나 후나 부부의 일상은 똑같다고 했다. 각자 필요한 책 보고, 책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것이 생활의 대부분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책을 한 권만 사도 되는 것이다”면서 웃는 부부의 얼굴은 맑고 편안해보였다.
   
▲  감이당이 맺어준 커플 송혜경·류시성 부부와 ‘자기 배려의 인문학’ 책을 출간한 강민혁씨, 대중지성반 4년째인 임경아씨.(왼쪽부터)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최근 몇 년 새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인문학 강좌를 하는 곳은 많다. 미술, 문학, 과학과의 결합 등 인문학에 접근하는 방법도, 대상도, 매체도 다양해졌다. 감이당은 마음과 몸은 따로가 아닌 하나임을 강조한다. 몸을 들여다보면 삶이 보인다는 것. 또 글쓰기는 여기서 중요한 과정이다. 자기를 돌아보고 정리하는 데 글쓰기가 가장 좋은 도구이고 공부의 완성이라고 보고 있다. 인문학과 의역학의 접목이다 보니 인문학을 통해서 오는 사람도 있고 의역학을 통해서 오는 사람도 있다. 마음의 끈을 잡고 왔거나 몸의 끈을 잡고 와서 서로 다른 한쪽을 보면서 비로소 온전한 자기를 찾게 되는 것이다.
   
   감이당의 의역학 담당 스태프 중 한 명인 도담 선생(45·안도균)은 10대 때부터 독학으로 의역학을 공부했다. 혼자 몸만 들여다보다 인문학과 글쓰기를 만나면서 몸과 연결된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뒤늦게 대학을 가서 수의사가 됐지만 이곳에 와서 “공부를 업으로 삼자”고 결심했다. 그는 찾는 사람이 많은 인기 강사다. 그는 “병을 고치려면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질병이 어디서 올까요? 나를 둘러싼 통념,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앎을 통해 몸을 바꾸고 삶을 바꿔야 합니다. 강의실이나 책에서 얻은 지식? 그건 강사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에요. 교회 가서 은총받고 오는 것과 뭐가 다른가요? 지식을 쌓기만 하면 오래 앉아 책 읽느라 오히려 혈전만 늘어요. 진짜 공부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전 차를 팔았다고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니 세상 풍경이 보이더란다. 걷는 기회가 많아지니 건강도 따라왔다. 그는 앎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곧 ‘수행’이라고 했다.
   
   4년째 대중지성반을 다니고 있다는 임경아(41·회사원)씨도 건강에 대한 관심 때문에 공부를 시작했다. 3학년 과정의 대중지성반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경우는 3분의 1 정도라고 한다. 임씨는 늘 몸이 골골해 한약에 의존해서 살았다. 처음엔 한약값이나 줄여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몸보다 ‘나’를 찾게 됐다. 임씨는 “공부를 하면서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30대 때 임씨의 욕망은 통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파트 사고, 자동차 바꾸고, 아이들 공부시키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특별히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아파트는 점점 멀어지고 남편도 아이들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만 왜 안 될까. 불만이 쌓이니 화가 끓고 몸이 힘들었다. 어느 날 강의시간에 ‘일상을 바꿔야 건강이 바뀐다, 전제를 바꿔야 자유로워진다’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공부하기 전에는 몰랐어요.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는 것을. 내 안에 화를 만드는 것이 나의 욕심이었어요. 전제를 바꾸고 나니 아이들에 대한 집착도, 남편을 내 뜻대로 해야겠다는 욕망도 줄었어요. 나는 왜 화가 날까?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미움도 사라졌어요.”
   
   임씨는 “남편과 회사 사람들로부터 공부하고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사실 숙제하고 시험공부 하느라 화낼 시간도 줄었어요. 집안에 문제가 많았는데 시험공부가 급하다 보니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게 되더라고요. 한약도 많이 줄였어요”라며 웃었다.
   
   임씨는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 몇 번 포기하려고 했지만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글쓰기를 위해 자신을 해체하고 정리하면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다보니 사유도 달라지고, 그 내용들을 뼈에 새기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대중지성반의 글쓰기 훈련은 혹독하다. 3개월에 한 번씩 에세이를 발표해야 하고 시험도 본다.
   
   고시공부하듯 인문학 공부를 했다는 강씨는 “직장인들이 인문학 공부를 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사실 전투적인 공부입니다. 존재를 바꾸려고 하면 승진시험 준비하듯 시간을 내고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철학자들이 수십 년 연구한 책을 이해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그만큼 강도 높게 공부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 격무 속에서도 여가의 시간을 확보하고 자기 성찰을 할 수 있어야 훌륭한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이끌어가면 세월호 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고 말했다.
   
   지난 8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4차 문화융성위원회’를 주재하고 인문정신 진흥 계획 등을 논의했다. 회의에서 발표된 보고서에는 초·중등교의 교과과정 중 인문학 교육 강화, 전국문화시설 이용한 인문학 강좌 확대, 전담기구 설립 등 다양한 대책이 담겨 있다. 얼마나 실효성 있는 정책이 나올지 모르지만 ‘인간성 회복’이 화두가 된 요즘 남산골에서 공부를 통해 ‘남과 같은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찾아가는 이들이 하는 말은 모두 같았다. “자기변화가 없는 책 읽기는 지적 성취에 만족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나를 바꾸지 않는 공부는 진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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