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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길은 알기 어렵지 않다네, 저 강과 언덕 사이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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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1-14 06:02 조회4,2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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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길을 아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야. 저 강과 언덕 ‘사이’에 있다네.”

1780년 여름, 생애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너면서 연암 박지원이 던진 말이다. 길이란 ‘사이’에 있다?! 사이란 무엇인가? 이것과 저것, 두 양변을 떠난 제3의 변이항이 그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것과 저것을 모두 버려야 하지만, 동시에 이것과 저것이 없이는 또 불가능하다. 떠남과 머무름, 버림과 채움의 무수한 변주! 고로, 거기에는 어떤 정답이나 매뉴얼이 있을 수 없다. 늘 현장에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불멸의 텍스트 낳은 2700리 대장정

압록강을 건너 연경으로, 연경에서 열하로 가는 2700여 리의 대장정 동안 연암은 이 화두를 결코 놓지 않았다. 그래서 답을 찾았느냐고? 그건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 화두 덕분에 『열하일기』라는 불멸의 텍스트가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길이란 그런 것이다. 중요한 건 목표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쉼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무언가가 생성되는 것, 그것이 곧 길이다.

여기 길에 대한 두 개의 텍스트가 있다. 2014년 대미를 장식한 히트작 ‘인터스텔라’와 ‘미생’이 그것이다. 전자는 은하계를 넘나드는 과학영화고, 후자는 대기업을 무대로 하는 직장 드라마다. 전자가 거시적이라면 후자는 미시적이다. 하지만 둘 다 ‘길’에 대한 탐사라는 점에선 상통한다.

먼저 ‘인터스텔라’에 대하여. 지난 연말 간신히 짬을 내 인터스텔라를 봤다. 마치 숙제를 하는 학생의 마음으로. 왠지 보지 않으면 공부를 안 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 다음날 1000만을 돌파했다니 막판에 그 대열 안에 겨우 골인한 셈이다. 지구에 더 이상 곡물이 자라지 않아 다른 행성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은하계로 가야 하는데 거기로 가려면 ‘웜홀’을 통과해야 한다. 초기 설정이 이렇다 보니 웜홀을 비롯해 블랙홀이니 상대성 원리니 하는 양자역학의 개념들이 쉬지 않고 등장한다. 솔직히 이렇게 ‘지적인’ 영화가 1000만 명을 돌파한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긴 그 이전에 이런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더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처음 든 소감은 ‘지구가 위험하긴 한가 보다’였다. 지구의 위기라는 키워드는 이제 SF적 상상력이 아니어도 상당한 공감대를 확보하고 있는 느낌이다. 기계인간이나 외계인의 습격 때문이 아니라 식량위기 때문이라는 설정이 더 큰 실감을 안겨 주었다. 지구가 더 이상 곡물을 키워내지 못하면 결국 인간도 살 수 없다. 옥수수와 땅과 인간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네트워크,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 네트워크를 지나치게 가볍게 취급했다. 그런 점에서 지구의 위기는 인류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하여, 이제 지구, 아니 인류를 구하려면 고도의 지성이 요구된다. 은하계와 은하계 ‘사이’를 연결하는 물리적 법칙과 그것을 능동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말하자면 첨단 과학이 곧 신화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여, 거꾸로 알게 되었다. 신화 역시 인류 최초의 과학이자 지성이었다는 사실을.

일러스트 강일구


한편 지난 연말 ‘미생’에 푹 빠져 있었다. 본방을 사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혹시라도 놓치면 꼭 챙겨서 보곤 했다. 프로기사가 되기 위해 청춘을 다 보냈지만 결국 입단에 실패하고 후원자의 ‘빽’으로 ‘원인터’라는 대기업에 들어간 계약직 직원 장그래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김 대리와 오 차장 등 다른 인물들의 활약이 더 눈부신 작품이었다. 흔해 빠진 러브 라인도 없고, 터무니없는 희망고문도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 역시 인터스텔라 못지않게 지적이고 냉철하다. 그런데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열광적 호응을 이끌어냈으리라. 개인적으론 직장생활에 대한 간접체험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나처럼 평생 백수로 보낸 경우엔 소위 ‘사회생활’의 실상을 체험할 기회가 거의 없다. 고작해야 영화나 드라마가 전분데, 거기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하다. 특히 멜로의 주인공들인 재벌 3세나 본부장들은 ‘저따위로’ 일을 해도 회사가 굴러간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다. 문득 떠오른 의구심인데, 혹시 이런 설정들이 우리 사회의 계급적 적대감을 심화하는 게 아닐까? 연애에 ‘쩔어’ 살아도 기업이 제대로 굴러간다면 둘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비리투성이거나 엄청난 상속을 받았거나. 보통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부자들의 이미지도 대충 이런 수준이다. 부를 생산하는 과정을 제대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미생에선 ‘현장’이 살아 있다. 물건을 팔려면 어떤 서류가 필요하고 어떤 협상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또 거기에선 희로애락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등등. 인터스텔라가 웜홀이나 블랙홀을 스펙터클한 영상으로 재현해낸 것처럼 미생은 소위 현장의 ‘쓴맛, 단맛’을 아주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내게는 ‘원인터’도 위기에 빠진 하나의 소행성처럼 느껴졌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고, 매 순간 결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삶의 원리 똑같은 은하계와 영업3팀

물론 사이즈와 스케일은 천지 차이다. 인터스텔라의 은하계는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극치라면, 미생의 회사는 일상의 최소단위다.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은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은하계건 영업3팀이건 살아가는 원리는 다르지 않다. 인터스텔라에서 지구를 위험에 빠뜨리는 건 미세먼지였다. 지구의 사막화가 황사를 일으켰고, 그 황사와 함께 미세먼지가 끝도 없이 몰려오면서 곡식들이 하나씩 사라져 간다. 아무리 거대한 것들도 결국은 미세한 균열로 무너지게 마련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우주의 법칙이다. 미생의 현장 역시 마찬가지다. 영업3팀의 해체는 계급적 갈등이나 공금횡령 같은 거창한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장그래가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그 이전에 이미 오 차장이 회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독불장군식 추진력, 워커홀릭적 기질 등이 불협화음을 낳았고 그에 대한 동료들의 ‘편견에 찬 시선’이 결국 오 차장을 떠나게 한 것. 오 차장이 떠나고 장그래도 밀려난 뒤, 소위 살아남은 자들-김 대리와 천 과장이 옥상에서 허탈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론 그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결국 김 대리는 회사를 나와 오 차장이 새로 차린 일터로 합류한다. 이를테면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한 것이다. 아무리 대기업, 정규직이 좋다 한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는데 뭔 낙으로 일을 한단 말인가. 미세먼지의 도래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아울러 대우주건 소우주에서건 ‘완생’은 없다! 장그래는 물론이거니와 김 대리, 오 차장, 마 부장, 최 전무 등 그 서열의 퍼레이드에서 대체 누가 “난 이제 충분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드라마에 열광한 대부분의 정규직이 자신을 장그래와 동일시했다는 사실이 그 점을 말해준다. 은하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웜홀을 통과해 다른 행성으로 갔다고 해서 길이 절로 열리는 건 아니다. 거기서도 시기와 질투, 사랑과 우정은 계속 교차한다. 그런 점에서 『주역』의 64괘 중 마지막 괘가 ‘화수미제(火水未濟)’라는 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우주는 영원히 ‘열린 체계’ 혹은 카오스라는 뜻일 터, 그래서 비관적이냐고?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생생불식(生生不息)’이라는 주역의 이치도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구원의 가능성은 인간 자신에게 달려

인터스텔라의 흥행에 대한 분석이 분분하다. 교육열과 가족애 때문이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글쎄, 정말 그럴까? 그렇게 환원하기에는 작품이 내장하고 있는 메시지가 만만치 않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웜홀을 만들어 다른 은하계로 가게 해준 존재는 누구일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지구를 위기에 빠뜨린 것도 인간이듯이 구원의 가능성 역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 또 블랙홀의 정보를 통해 탈출의 메시지를 전달해준 이는 누구인가? 미래의 ‘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시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이다.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은하계에 따라 시간은 다 다르게 흐른다. 하여, 아버지는 여전히 젊은데, 딸은 점차 늙어간다. 아버지보다 더 늙은 딸이라니. 선불교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여행’을 하다 마침내 아버지와 딸은 극적으로 해후한다. 백발이 된 딸이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에 말이다. 딸은 말한다. 자기한테는 자식과 손자들이 있으니 이제 아버지 당신의 길을 가라고. 아버지는 다시 우주 어딘가를 고독하게 떠돌고 있을 동료를 찾아 떠난다. 하여, 이 영화는 가족애라기보다 ‘길’에 대한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품고 서로의 길을 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왜냐하면? 역시 시간차 때문이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나의 우주다. 서로 다른 속도와 시간을 지닌 소우주. 이 소우주들의 마주침과 엇갈림이 수많은 길들을 탄생시킨다.

미생의 마지막 장면도 역시 길이다. 요르단 암만의 ‘붉은 사막’을 보면서 장그래와 오 차장의 독백이 이어진다. “본디 땅 위에는 길이 없다. 누군가 다니면 길이 된다”는 루쉰의 멘트와 함께. 그렇다. 연암의 말대로 길은 ‘사이’에 있다. 땅과 인간 사이, 은하계와 현장 사이사이, 그리고 2014년과 2015년 사이!

고미숙 40대 이후 지식인 공동체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남산강학원&감이당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3종세트』 『달인 3종세트』 『동의보감 3종세트』 등.


(중앙선데이, 2015.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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