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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청년 실신시대, 확실한 출구는 ‘쓰나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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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4-03 11:09 조회4,9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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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이야기. 배경은 천공의 섬 라퓨타. 문명의 발달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천국 같은 곳이다. 한 귀부인이 있었다. 라퓨타에서 가장 부자인 데다 외모도 출중하다. 자신을 끔찍이 사랑해주는 총리와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고 그 섬에서 가장 좋은 저택에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을 돌본다는 구실로 지상세계인 라가도로 내려갔다가 거기에서 몇 달 동안 행방을 감추어버렸다. 왕이 수색대를 보내 찾아보니 허름한 옷을 입은 채로 싸구려 식당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매일 때리는, 병*같이 생긴 늙은 남자를 먹여살리기 위해서였다. 돌아온 뒤에도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전혀 나무라지도 않고 다정하게 대해주었지만 다시 달아날 방도를 꾸몄다. 결국은 패물보따리를 들고서 아래 세상의 옛 애인한테로 달아나선 연락이 두절되었다.

#2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이야기. 배경은 조르바와 두목이 갈탄광 사업을 위해 들어간 크레타 섬. 파블리라는 청년이 마을의 ‘팜므파탈’인 과부를 짝사랑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 파블리의 시체를 둘러싸고 마을사람들이 웅성거리자 마을 장로인 아나그노스티 영감이 바위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파블리, 이제야 구원을 받았구나. 과부와 결혼해 봐야 좀 살다 보면 부부 싸움질이나 하다 얼굴에 똥칠이나 하지.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라.” 인생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이런 말을 할까 싶지만, 천만에! “날 봐요, 나보다 복 많은 사람이 또 있겠소? 밭이 있겠다, 돈도 있겠다, 마을 장로겠다, 착하고 정숙한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딸 낳았겠다, 나는 이 여자가 내 말에 반항하여 눈꼬리 치켜뜨는 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소이다. 거기에다 내 아들들도 모두 아이 아비가 되어 있겠다. 내겐 불만이 없어요. 허나 이놈의 인생을 또 한번 살아야 한다면 파블리처럼 목에다 돌을 매달고 물에 빠져 죽고 말겠소. 팔자가 늘어져 봐도 별 수가 없어요. 저주받아 마땅하지.”

참 당혹스런 이야기들이다. 인생과 행복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확 깬다는 점에서 말이다. 라퓨타의 귀부인은 왜 스스로 ‘지옥행’을 택했을까? 또 크레타 섬의 장로는 왜 자신의 축복받은 인생을 저토록 저주할까? 두 사람 다 행복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데….

돈과 지위만 있다면 모두 다 행복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둘처럼 사는 것이 생의 목표다. 그래서 늘 한탄한다. 돈만 있다면, 지위만 높다면, 혹은 남편이 순정파라면, 아이들이 건강하다면, 기타 등등.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있는 저 두 사람은 왜 저 모양인가? 저들이 좀 유별난 인물들이라 그런가? 아니면 저 책의 저자들이 괴팍해서 저런 이상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나? 얼마 전까지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 소위 보통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헌데, 이런 통념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올해 설날은 늦게 찾아왔고 길었다. 지난해 윤달이 들어선 바람에 보통 때보다 늦은 2월 중순, 절기로는 우수가 되어서야 설이 되었고, 2월의 중간에 끼어 있다 보니 아주 긴 겨울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뉴스를 보면 경제가 어려워 소비가 줄었다고 난리법석이다. 헌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휴가기간 동안 국경을 넘어 해외로 빠져나갔다. 소비는 줄여도 여행은 포기할 수 없다는 뜻일까? 혹은 이 암울한 시대에 여행 말고는 달리 낙이 없다는 뜻일까? 확실한 건 삶은 결코 소유에 예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돈을 ‘미치도록’ 좋아하긴 하지만 그걸 쌓아두기 위해 버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그 사람은 ‘변태’다. 그럼? 움직이기 위해서다. 활동과 관계의 네트워크, 사람은 거기에 접속할 때만이 살아있다고 느낀다. 그러니 아무리 쪼들려도 기어코 주머니를 털어 국경을 넘는 것이 아닐까. 부연하면, 스마트폰의 일상화로 우리의 감각은 지극히 확장되었다. 이 영역에 있어서만은 빈부격차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문제다. 어지간한 자극으론 당최 감응이 오질 않는다. 국경을 넘는다는 건 이 무기력과 권태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편일지도 모르겠다.

연휴 동안 우연히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후루이치 노리토시)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여기서 ‘절망의 나라’는 일본이고 ‘행복한 젊은이들’은 현재 일본의 청년세대다. 요컨대, 불황기를 통과하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그 어느 세대보다도 만족도가 높다는 내용이다. 그럴 리가? 이유는 간단하다. 미래에 어떤 희망도 없기 때문에 지금이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는 것. 인생이란 반전의 연속이라더니, 과연 그렇다. 희망을 가지라고, 꿈을 가지라는 말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선 쟁쟁하다. 하지만 정말 묻고 싶다. 희망이 있나? 꿈을 실현할 수 있나? 또 묻고 싶다. 희망과 꿈이 이루어지면 만사OK인가? 누군가 그랬다. 모든 사람이 호주의 중산층처럼 산다면 지구 3.5개가 필요할 거라고. 달리 말하면, 사람들의 희망과 꿈이 이루어지면 지구는 폭발해버릴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사람들이 먼저 지구를 폭발시킬 것이다. 왜? 소유와 증식으로 이루어진 삶은 신체를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들 테니까.

청년들에게 필요한 건 소통과 교감

일러스트 강일구


일본 청년들도 이걸 눈치챘나보다. 지금보다 더 가질 수도 없지만 더 가진다고 해서 더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도 없다. 더 나아가 그런 식의 행복은 지루하고 권태롭다는 것까지도. 그럴 바에야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일자리나 연봉이 아니라 동료 혹은 친구란다. 가족이 소멸되고 ‘무연고 사회’가 되면서 고독사가 만연하자 정말 생존에 필요한 건 친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연인이 없다는 것은 말할 수 있지만 친구가 없다는 말은 쉽게 말할 수 없다”는 대목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러니까 경제가 무너지고 일자리가 없어도 그럭저럭 살만한데 친구가 없다면 그건 치명적이다. 시위에 나가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이념적으로는 좌든 우든 별 상관이 없다. ‘마음을 둘만한 곳’이면 되고, 거기서 새로운 동료를 만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뉴스에선 주로 시위의 구호만 부각하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뭔 일이 일어날 것 같지만, 정작 참가자들은 구호보다는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어 기쁘다’는 식이란다. 결국 청년들에게 필요한 건 소통과 교감인 것.

젊은이와 사회 잇는 회로 있어야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었다. 쓰나미로 인해 원전이 폭발한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그것은 엉뚱하게 청년들을 무기력에서 빠져나와 활발하게 움직이게 했다. “일주일분의 식수와 음식을 봉사 활동 참가자가 직접 챙겨야 한다. 또 텐트와 침낭도 할당된 그룹 내부에서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현지로 이동하는 데 필요한 교통비도 자부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1개월 동안 1500명의 봉사자가 참여했다.” 젊은이들이 무기력한 건 그들과 사회 사이에 어떤 구체적인 회로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동일본 대지진이야말로 사회 혹은 타자와 교감하기를 열망하는 젊은이들에게는 ‘기다리던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쓰나미를 기다리는 청년들이라니! 헐~.

그때 문득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총리부인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있어 라퓨타에서 누리는 부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 자신이 직접 주도하거나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쾌락을 누리느니 늙고 난폭한 애인과 사는 게 훨씬 낫다. 지지고 볶아도 그 현장에선 온전히 주인으로 살 수 있으니까.

핵심은 현장성과 운동성이다. 청년들에겐 현장이 필요하다. 자신의 에너지를 직접 투여하고 전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지금까지는 그 흐름을 주도한 것이 부국강병이었다. 그 대의가 청년들을 움직인다고 여겼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움직이기 위해 그런 대의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제 그런 논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청춘의 생명력이 소멸된 건 아니다. 동일본 대지진은 분명 비극이다. 하지만 그것은 청년들에게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모든 게 해결돼도 기다리는 건 권태

이 대목을 읽다가 문득 나의 중학교 1학년 때 경험이 떠올랐다. 그해 여름, 50년만의 홍수가 전국을 휩쓰는 바람에 강원도 산골동네까지 물이 역류하는 재난이 벌어졌다. 주민들은 무사히 산 위의 마을로 피난을 했는데, 문제는 학교였다. 산사태가 나면서 학교가 완전히 초토화된 것이다. 우리는 방학 내내 트럭과 손수레로 흙과 돌 더미를 치우는 노역을 해야 했다. 지금이라면 ‘청소년 학대’로 시사프로에 나올 법한 일이지만, 우리는 당시 꽤나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를 우리 손으로 재건하는 느낌이랄까. 쓰나미 복구에 참여한 일본 청년들의 마음도 이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지.

오늘도 뉴스에선 고령화와 저출산에 ‘청년실신’ ‘오포 세대’ 등 절망과 침체에 관한 담론이 쏟아진다. 한국도 결국 일본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셈이다. 어떤 점에선 지극히 당연하다. 상승기가 있으면 하강기도 있는 법. 그리고 그것이 꼭 좌절의 원천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미 보았듯이 저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도 기다리는 건 무기력과 권태다. 어차피 그렇다면 오히려 이 하강기를 삶의 척도를 완전히 바꾸는 절호의 찬스로 삼는 건 어떨까. 쓰나미를 기다릴 게 아니라 낡은 가치들을 전복하는 쓰나미를 불러 일으키는!


(20150308.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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