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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누드 글쓰기, 내 운명 찾는 최고의 내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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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4-03 11:10 조회5,9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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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 1월 1일은 한참 지났고 음력 1월 1일은 아직 좀 남았다. 그러나 진짜 새해는 입춘부터다. 1년 365일을 총 24개의 마디-입춘부터 대한까지-로 구획하는 절기력은 태양력과 태음력을 결합한 동양적 역법이다. 이제 입춘(2월 4일)이 지났으니 그야말로 갑오년은 ‘거(去)’하고 을미년이 ‘래(來)’하였다. 해가 바뀔 때면 한편 설레고 한편 두렵다. 뭔가를 이룰 것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예기치 않은 불운이 닥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그래서 이맘때면 다들 토정비결이나 별자리 점성술 등을 보느라 분주하다. 미래에 대한, 또 운명에 대한 예측만큼 인간의 호기심을 야기하는 것도 없다. 관상과 손금, 타로와 애니어그램, 심지어 혈액형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모든 매체에는 ‘오늘의 운세’란이 있고 그 기사들은 늘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한다. 어디 그뿐인가. 거리 곳곳에는 역술원·철학관·사주카페 등이 즐비하다. 더 놀라운 건 10년 넘게 정기적으로 점집을 순례하는 이들도 있고 가족을 위한 전담 역술가까지 둔 경우도 있다. 풍문으로는 우리나라 정·재계 인사 90% 이상이 주기적으로 역술가 상담을 받는다고 한다. 이 정도면 가히 정치경제학적 이슈로 설정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설 맞아 토정비결·점 보는 사람 많아

‘이 난만한 과학기술의 시대에 그런 미신이 판을 치다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거야말로 오만과 편견의 소산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오만과 운명론에 대한 편견! 과학과 기술은 물질을 분석하고 이용하는 데는 능하지만 삶의 지도를 ‘통째로’ 그리는 데는 거의 ‘무용지물’이다. 내가 누구인지(존재론), 세상의 이치가 무엇인지(인식론),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윤리학) 등이 운명론의 기본 테제다. 말하자면 인문학의 모든 테마를 아우르고 있는 셈이다. 이 주제들이 구현되는 현장은 다름 아닌 몸이다. 더 정확히는 몸에 새겨진 욕망의 패턴이다. 또 이 욕망은 끊임없이 외부와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운명론에는 몸과 마음의 행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공간의 리듬이 개입한다. 시절인연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관계망을 관통하는 과학적 방법론 같은 건 없다.

10년 전 나 역시 이런 문제에 봉착했었다. 사방이 꽉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었을 때 그동안 배운 서구식 프레임에는 도무지 참조할 만한 바가 없었다. 결국 지인의 도움으로 역술가와 상담하는 코스를 밟았다. 그때만 해도 나 역시 운명론이란 신비롭고 초월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간주했다. 한참 뒤 『동의보감』 공부를 하다가 대반전이 일어났다. ‘천지운기’편을 배우다 사주명리학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병을 고치려면 그 사람이 타고난 오장육부의 기운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기운의 배치는 곧 심리적 패턴으로 이어진다. 가장 간단한 예로 ‘목화(木火·간과 심장)’ 기운이 강한 사람은 주로 발산하는 성향을, ‘금수(金水·폐와 신장)’ 기운이 강한 이들은 수렴성이 강하다. 전자는 일을 잘 벌이지만 수습을 잘 못하고 후자는 시작하는 데는 굼뜨지만 뒷심이 좋다. 이런 패턴이 사회적 위상 및 인간관계를 낳고 거기에서 인생의 리듬과 강밀도(intensity)가 탄생한다.

사주명리학 접하고 인생의 ‘압축파일’ 봐

생리에서 심리로, 질병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이런 이치를 익히는 과정에서 마침내 내 사주팔자의 초식을 읽게 되었는데 참 신기했다. 마치 내 인생의 ‘압축파일’을 본 느낌이랄까. 그리고 몹시 의아했다. 이런 정도라면 스스로 익혀도 될 텐데 왜 꼭 ‘신통방통한’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거지? 나도 그랬지만 직접 배울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명리학의 토대인 육십갑자는 자연철학이자 생활과학이었다. 천지인을 관통하는 우주론에서 농가월령을 비롯해 성명학에서 풍수지리, 관상과 궁합 등 일상의 전 영역에서 두루 활용됐다. 20세기 들어 서구과학의 도래와 함께 이 모든 것은 다 미신의 영역으로 치부되었다. 양지에서 음지로 축출된 것이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앞에서 본대로 운명론이 다시금 전방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지에서다. 자연철학은 고사하고 생활의 지혜로도 활용되지 못한 채 그저 ‘신비와 미신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고 있을 따름이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나라의 국기는 태극기다. 태극기에는 음양과 사괘(四掛·건곤감리)가 그려져 있다. 동양적 우주론을 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바탕이 되는 ‘음양오행론’이 미신이라고? 이게 말이 되나? 또 『동의보감』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 최고의 의학고전이다. 이런 고전을 탄생시킨 나라에서 정작 그 베이스에 해당하는 ‘음양오행론’을 음지로 몰아넣다니, 참 희한한 노릇 아닌가.

타인의 조언 받아봤자 요행심만 커져

일러스트 강일구


운명의 지도에는 흔히 생각하듯 재물운과 관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재능과 성욕, 욕망과 무의식, 공부와 지혜, 육친관계 등 삶의 전 영역이 다 포괄된다. 그렇다. 팔자가 재물운·관운·남편복·자식복 등으로만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편견의 극치다. 삶에 대한 탐구는 생략한 채 오직 내가 손에 넣고 싶은 것만 갈구하는 격이므로. 운명론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재능(명리학 용어로는 식상)으로 재물(재성)을 일구고 그 재물은 다시 사회적 관계(관성)로, 그 다음엔 지혜(인성)의 영역으로 흘러간다. 이것이 사주팔자의 다섯 가지 스텝이다. 이 스텝들이 펼치는 생극(상생과 상극)의 파노라마가 곧 운명의 지도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은 결국 스스로 탐구해야 한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기본원리는 외면한 채 타인의 조언을 받아봤자 결국 요행심만 커지게 된다. 길한 것은 챙기고 흉한 운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요행심 말이다. 또 조언을 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대로 말해주기가 아주 난감하다. 궁합을 보러 온 커플한테 한 10년쯤 살다가 인연이 끝나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혹은 아이를 막 낳은 엄마한테 자식과의 인연이 아주 희박하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대충 얼버무리면서 마음을 잘 다스리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과장된 표현으로 겁을 준 뒤 부적이나 굿을 권유하든가. 그래서 돌팔이니 사기꾼이니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역술가 찾아가봐야 일회적 방편에 그쳐

운명의 지도를 그리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이 ‘누드 글쓰기’다. 누드라고 해서 ‘야한’ 상상은 금물이다. 사주명리학의 초식을 배운 다음 자신의 팔자를 스스로 분석해 글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감이당)에서 몇 년 전부터 시행해온 프로그램이다. 근데 왜 누드냐고? 현대인들은 자신에 대해 진솔하게 말하는 통로가 거의 없다. 친구는 물론 가족, 연인들끼리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가 트라우마의 원천이다. 기억과 감정이 밖으로 흘러갈 통로가 없으니 속에서 뭉치고 탁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결국은 돈을 들고 상담사나 의사를 만나러 간다. 이것도 나름의 치유 효과가 있겠지만 역시 일회적 방편일 수밖에 없다. 신통한 역술가를 찾아 헤매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누드 글쓰기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팔자를 있는 그대로 다 까발린다는 뜻에서 ‘누드’다. 이 작업의 이점은 크게 두 가지다. 타인의 인생을 통으로 엿볼 수 있다는 점,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학기당 40여 명이 참여하는데 학기를 마칠 때마다 마치 40여 편의 ‘인생극장’을 감상한 느낌이다. 운명에 대한 탐구라고 하면 무겁고 비장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마치 판소리 열두 마당처럼 유머와 흥이 넘친다. 재물운은 넘치지만 40대 후반이 되도록 연애 한번 못해본 노처녀. 눈부신 미모를 타고났지만 남편의 바람기로 속앓이를 하는 중년여성. 수도자의 길을 가려고 하나 여성의 유혹이 그치지 않는 30대 청년. 평생 부귀를 다 누렸지만 딸자식의 이혼으로 손자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우울증에 걸린 70대 할머니.

내 인생의 지도 가지고 길 떠나야

여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다들 생각한다. 아, 나만 팔자가 사나운 게 아니었구나. 또 세상이 쏘아대는 상식이라는 게 참 부질없구나. 정규직, 노후대책, 스펙과 외모 등 세상에는 온갖 ‘설(說)’이 난무하지만 운명에는 그런 기준이 별반 통하지 않는다. 누구든 얻는 만큼 버려야 하고 가진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여 자신의 운명을 관찰하게 되면 부질없는 탐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럴수록 운명의 스텝이 꼬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또 명리학에는 10년마다 운로가 바뀐다는 ‘대운’이라는 개념이 있다. 대운이 바뀌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오르면 내려가야 하고 떴으면 가라앉아야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 인생 또한 사계절의 변화와 다르지 않은 셈이다.

운명이란 ‘명(命)을 운전한다’는 뜻이다. 명을 운전하려면? 일단 내비게이션이 필요하다.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보인다’고 했던가. 운명론 역시 그렇다. 내 인생의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날 수 있다면 비로소 그 길의 주인이 될 수 있으리라. 더 나아가 그 길 위에서 어떤 사건과 인연을 만나든 그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운명이 아닐까. ‘장자적 도(道)’ 혹은 니체의 ‘운명애(amor fati)’가 그런 경지일 터, 모든 운명론이 궁극적으로 수행과 지혜로 이어지는 이치다.


(20150208,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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