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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매뉴얼에 빠져 현장·생명의 소리 못 듣는 우리의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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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7-16 11:10 조회4,1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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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개콘(개그 콘서트)은 나의 TV생활에 있어 항상 시청률 1위였다. 일요일 밤에 개콘 본방을 사수하는 일은 나의 은밀한 ‘사생활’ 가운데 하나였다. 개콘을 보면서 낄낄거리다 보면 피로가 사라질 뿐더러 머릿속이 시원해진다. 개그맨들의 ‘말빨’에 신체가 활발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게 풍자와 역설의 향연, 곧 유머의 힘이다. 그럼 유머는 언제 탄생하는가. 욕망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까발릴 때, 엄숙한 권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때,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이 엉뚱하게 연결될 때, 한마디로 상식이 와해되고 통념의 전복이 일어나는 순간들이 그것이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보는 아주 새로운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유머와 상상력이 ‘환상의 짝궁’이 되는 이유다.

드라마는 정반대다. 특히 멜로의 경우, 이미지로 시작해서 이미지로 끝난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외모가 너무 화려한데다 그 화려한 미모를 시도 때도 없이 클로즈업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리얼리티를 기대하기란 정녕 어렵다. 온갖 사건이 벌어지고 감정의 파토스가 연출되지만 남는 건 결국 판타지다. 판타지도 살아가는 힘이라고 말하면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판타지가 주는 힘은 능동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실상을 압도해버리면 신체는 결국 거기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예속된 신체, 거기에선 유머도 상상력도 불가능하다. 한편, 뉴스는 늘 현장을 중계하지만 정보를 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신체를 촉발하는 힘이 현저하게 부족한 것이다. 대체 왜 그럴까. 국가와 정치, 경제와 사법 같은 거대담론에 치중된 점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이분법적 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 강자와 약자, 정의와 불의 같은! 하여 뉴스는 언제나 충격과 분노라는 정서를 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뉴스가 쏟아내는 정보들에 열렬히 반응하는 것을 세상에 적극 참여하는 것인 양 착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충격과 분노 역시 수동적 정념의 일종이다. 그 패턴을 반복하다 보면 신체는 무력해지거나 아니면 들뜨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개콘에 열광했던 건 드라마의 판타지, 뉴스의 진부함에 대한 나름의 소심한 ‘저항’이었던 셈이다.

슬픔과 분노 넘으려면 인과관계 알아야

그랬던 내가 언제부턴가 개콘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웃찾사(웃음을 찾는 사람들)나 코빅(코미디빅리그)처럼 코미디 프로가 늘어서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나의 시선이 시사다큐 쪽으로 옮겨간 탓이다. 변화의 출발은 아무래도 지난해 세월호 때부터인 것 같다. 누구나 그랬을 테지만 처음엔 슬픔과 분노가, 그 다음엔 형언할 수 없는 당혹감이 밀려왔다. 대체 진도 앞바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풍랑이 인 것도 아니고 암초를 만난 것도 아니고 테러를 당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거대한 배가 침몰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더 뼈아픈 건 아무도 구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산을 뚫고 바다를 메우는 산업강국, 무인도에서 한라산까지 와이파이가 뚫리는 IT강국에서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날부터 세월호 참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화두가 되었다. 이 비극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조롱하는 이들조차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은산철벽보다 더 장엄한 화두! 그래서 각종 뉴스를 열심히 챙겨보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인과라도 알아야 슬픔과 분노를 넘을 것 아닌가. 물론 보면 볼수록 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뉴스를 더 깊이 다루는 시사다큐 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거기에선 사건을 훨씬 더 심층적·입체적으로 다룬다. 물론 그렇다고 인과의 사슬이 풀린 건 아니다. 오히려 의혹과 물음이 더더욱 깊어졌을 따름이다.

낡은 통념으론 ‘역설의 바다’ 알 수 없어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신체의 동선이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시사프로가 일상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개콘에 대한 배반이 시작된 셈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오래된 프로그램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새로 편성된 시사프로들은 다양한 사건사고와 인물군상을 다룬다. 거기에는 뉴스에선 결코 마주칠 수 없는 내용들도 수두룩하다. 마치 역사기술에서 미시사의 웅성거림을 보는 듯하다. 거기에 포착된 ‘인정물태’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한다. 고급 아파트 안에 온갖 쓰레기를 몇t 분량씩 쌓아두는 주부, 80대 할머니들만 성폭행하는 중년 남성들, 수십 마리의 개와 함께 자동차 안에서 생활하는 중년 여성, 각종 변태성욕에 빠진 변호사와 의사 등등. 한마디로 세상은 요지경이요 미스터리 투성이다. 기존의 상식과 통념으로는 도무지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았다. 빈부격차, 세대차이, 학벌차이, 나아가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차이 같은 잣대는 더더욱 무용지물이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고상한 것과 천박한 것, 아름다움과 추함, 생과 사 등의 가치들이 난마처럼 뒤엉켜 있었다. 이런 ‘역설의 바다’에서 개인이 먼저냐, 구조가 먼저냐 하는 논란 또한 무망하기 그지 없다. 둘은 서로 긴밀하게 유착되어 어디까지가 개인적 욕망이고 어디서부터가 구조적 모순인지를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자기의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신화 속 뱀의 형상 같다고나 할까. 이것을 탐사하기 위해선 정말로 깊은 성찰과 지혜가 필요하다. ‘세상만사, 천지만물’이 다 책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리라.

그렇다. 돌아보니 세상이 온통 세월호였다. 그러니 진상규명이 될 리가 없다. 감히 단언컨대, 정부는 진상규명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상을 규명하려면 이전의 전제들을 다 바꾸거나 내려놓아야 한다. 낡은 통념과 상식으로 어찌 그 거대한 역설의 바다에 다가갈 수 있으랴. 유머와 상상력이 커플이듯, 무지는 독단과 짝하는 법이다. 전제를 바꾸려면 명분이나 도식이 아닌 현장을 주시해야 한다. 지지고 볶고 좌충우돌하는 현장의 역동성과 마주쳐야 한다. 시사프로가 주는 생생함도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에 본 장면 가운데 인상적인 것 하나. 성매매 특별법을 둘러싼 공방이었다. 생계형 성매매를 허용해야 한다는 쪽과 절대 안 된다는 쪽이 치열하게 맞섰는데, 그것 자체야 아주 익숙한 배치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허용해야 한다는 쪽의 패널인 김강자 서장의 태도였다. 일찍이 집장촌을 해체하는 데 앞장선 분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리얼한 현장을 접한 이후 오히려 생계형 성매매를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다. 이런 상황 자체도 참 신선했다. 왜냐면, 대개의 공무는 상투적인 명분과 정해진 매뉴얼을 따라 움직인다. 헌데, 이분은 시종일관 현장의 실감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성매매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여성들이 있다. 그럼 그들은 다 죽으라는 말이냐. 국가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재활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지만, 그 120억 가운데 100억은 그 사업을 하는 인력에 투입된다. 고작 콘돔을 나눠주는 것 말고 하는 일이 뭔가? 무엇보다 집장촌 여성들은 그런 공무원들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등등. 공중파에서 성매매 여성들에 대해 이렇게 진솔하게 표현하는 건 처음 봤다. 또 다른 시사프로에 등장한 한 집장촌 여성은 공무원들은 포주들의 횡포를 걱정하지만 자기가 보기엔 시도 때도 없이 단속을 해서 벌금을 매기는 국가야말로 ‘진짜 포주’라고 응답했다. 성정치학에 대한 푸코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중요한 건 결론이 아니다. 어디서, 어떻게 도출되었는지, 얼마나 현장과 깊이 연동되어 있는지, 핵심은 그것이다. 그래야 그 정책이 살아 움직일 것 아닌가.

현장이 곧 유머와 상상력의 원천될 수도

우리는 그동안 현장의 실감이 없는 매뉴얼과 진부한 도덕률을 반복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 틀 안에서 아무리 치고받고 해도 결국 남는 건 더 복잡해진 통계수치와 매뉴얼뿐이다. 요즘엔 거기에 CCTV의 설치가 꼭 따라다닌다. 이런 추세면 앞으로 우리나라 전역은 CCTV로 도배 될 전망이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이것이 신체를 수동화하는 방식이다. 수동화하면 슬퍼지고, 슬픔은 역량을 감소시킨다. 거기에서 부정과 증오가 싹튼다. “수동적 정념은 타인의 본성에 대한 증오, 그리고 자기본성에 대한 증오, 결국 삶 전체에 대한 증오를 초래한다.”(이수영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다!” 세월호 참사의 비극성을 압축하는 문장이다. 들을 때마다 가슴이 뻐근하고 뼈에 사무친다. 시스템에 대한 집착으로 매뉴얼만 비대해졌고, 그 매뉴얼들이 마침내 신체를 잠식해버린 것이다. 현장과 생명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 그게 우리 문명의 현주소다. 다시 일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우리는 여전히 망연자실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봄날은 속절없이 가고, 우리는 또 살아야 하는 것을. 그렇다면 길은 하나뿐이다. 질문을 결코 멈추지 않는 것. 그 질문들이 탄생한 현장을 예의 주시하는 것. 그 인과의 법칙을 끝까지 궁구하는 것. 그래서 뭐가 달라지겠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질문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적어도 수동의 정념에 휩싸여 삶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능동적 ‘떨림과 울림’을 맛보기 위해 당분간은 개콘을 배반하고 시사다큐에 집중할 예정이다.

농담삼아 덧붙이면, 그런 점에서 개콘의 라이벌은 코빅이나 웃찾사가 아니라 시사프로의 밀착 카메라가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카메라가 쫓는 현장이 곧 유머와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중앙선데이. 2015.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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