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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바이러스와의 ‘밀당’은 숙명, 담담히 의연히 대처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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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8-13 13:46 조회4,2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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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와의 ‘밀당’은 숙명, 담담히 의연히 대처할 일


한강 둔치에 괴생물체가 출현했다.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먹어치우고 급기야 한 소녀를 납치했다. 가족들은 소녀가 죽은 줄 알고 장례식까지 치렀지만 그날 밤 전화기 너머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녀의 아빠는 자기 딸이 살아 있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대신 방역당국은 아빠를 체포하여 온갖 검사를 다 해댄다. 바이러스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결론은 ‘노 바이러스’. 미 군의관들이 주고받는 이 말을 듣자마자 아빠는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딸이 납치된 원효대교를 향해 달려간다.

짐작하겠지만 영화 ‘괴물’의 줄거리다. 이 영화의 키워드는 괴물 자체보다 괴물이 퍼뜨렸을지 모를 바이러스다. 미디어는 연일 바이러스에 대한 특종을 알리고, 괴물과 조금이라도 접촉이 있었던 사람들은 다 바이러스 보균자로 의심받고 격리된다.

최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MERS) 사태를 보면서 영화 ‘괴물’의 장면들이 오버랩되었다. 방역당국의 허술함과 정보의 범람, 그리고 대중의 과민반응 등등. 물론 영화보다 더 강렬한 ‘추억’도 있다. 2003년 동아시아를 휩쓴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가 그것이다. 사스 역시 호흡기증후군이었고, 40대 이상의 치사율이 높았다. 사스의 등장은 전염병에 대한 승리를 자축했던 현대의학의 오만을 통렬하게 조롱한 ‘바이러스의 역습’이었다.

메르스 불안감에 잠식된 우리의 삶

그리고 12년 뒤 2015년, 바이러스는 귀환했다. 메르스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서. 사스와 메르스, 닮은 듯 좀 다르다. 그때는 조류가 매개자라 했고, 지금은 낙타란다. 사스의 주활동무대는 중국 광둥성과 홍콩이었고, 메르스는 중동이 본거지다. 결정적인 차이는 사스 유행 당시 한국에선 한 명의 환자도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한국이 메르스의 감염확산 지역이 됐다는 사실이다.

2003년 그때 하필 나는 중국 여행 중이었다. 열하일기에 관한 책을 낸 뒤, 그 여정을 밟아가기 위해서였다. 베이징에 도착하자 연일 사스에 관한 뉴스가 넘쳐났고, 거리에는 방독용 마스크를 눌러 쓴 사람들로 그득했다. 공공건물이 닫힌 건 물론이고 베이징대까지 휴교에 들어갔으며 사람들은 다들 자기만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더 놀라운 건 국내 반응이었다. 한 명의 환자도 나오지 않았건만, ‘땡사스’라는 유행어가 돌 정도로 사스가 9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5000 명이 넘는 중국 유학생들이 마스크를 쓰고 귀국하는 장면은 마치 할리우드 재난영화를 방불케 했다.

그때 참 의아했다. 중국이야 환자가 속출했으니 그렇다치고, 한국은 왜 그렇게 떨었을까. 지진이나 전쟁도 그렇게 공포를 야기하기는 어려우리라. 심지어 당시는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그럼에도 사스에 대한 뉴스는 전쟁을 압도해버렸다. 영화 ‘괴물’에서 바이러스가 괴물의 위력을 압도한 것처럼. 환자가 출현하지 않았을 때도 그랬는데 지금이야 말해 무엇하리. 네팔 대지진과 성완종 리스트, 극심한 가뭄 등 숱한 정치경제적 이슈들을 다 덮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학교가 휴교를 하고 공공기관의 행사들은 줄줄이 취소되었고, 사람들의 일상은 심각하게 위축되고 있다. 한마디로 메르스, 아니 메르스에 대한 불안이 삶을 온통 잠식해버린 형국이다.

12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건만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방역당국의 발표는 늘 헛다리를 짚고 미디어는 그에 대한 공세를 높이면서 온갖 정보와 해석을 쏟아낸다. 대중은 동요한다. 한편으로는 당국의 무능에 대한 불신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통계와 수치가 주는 압박 때문에. 그 결과 자기도 모르게 ‘원시적’ 공포에 시달린다. 12년 전 사스 추정환자가 동네 병원에 입원한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결사반대를 외치며 밤샘 농성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과민반응이라니. 헌데 이번엔 의료진의 자녀들을 학교에 등교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온다는 소식에 다시 한 번 아연실색했다. 이런 반응은 일종의 히스테리에 가깝다. 과학과 합리성, 친절과 배려 등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최소한의 윤리적 기초마저 내팽개친다는 점에서 말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대책 역시 놀랄 정도로 동일하다.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라’는 것이 전부다. 이렇게 ‘무능한’ 의학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사태가 종결되고 나면 하루종일 손만 씻는 강박증 환자가 늘어날까 걱정이다. 최소한 제대로 된 의학이라면 이런 사태를 전 국민이 자가면역을 높일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알다시피, 우리의 의식주는 양생에 치명적이다.

패스트푸드에 치맥, 거기다 먹방에 야식, 온갖 ‘핫한’ 음료들 및 불면증의 만연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면역력 저하를 초래한다는 건 말할 나위도 없다. 메르스는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일상을 전면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럼에도 몸과 질병에 관한 어떤 새로운 담론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 참을 수 없는 빈곤함이라니.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자가면역 높일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미세해서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두렵다. 무지가 곧 두려움의 원천임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또 바이러스의 행보는 예측불가능하다. 방역망을 아무리 치밀하게 쳐도 늘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미사일 공격도 불가능하고, 발본색원은 더더욱 어렵다. 하여, 인식의 지반에 전방위적으로 균열을 일으킨다. 예컨대, 이번 메르스는 대형병원, 특히 삼성서울병원이 의학의 메카에서 바이러스의 온상지임을 보여주었다. 최고의 시설과 최고의 의료진을 자랑하는 곳이 ‘메르스의 메카’가 되어 버린 이 역설적 형국. 병원이 병을 낳고, 의료진이 가장 면역력이 취약한 존재라니,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병이 들면 환자들은 무조건 병원에 의존한다. 의사는 다시 기계와 시스템에 의존하고. 당연히 엄청난 비용이 든다. 그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병원은 늘 과잉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 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병원이 대형화할수록 의존도가 더더욱 높아진다. 그래서 무조건 대형병원을 찾아드는 것이다. 그러면 몰려드는 환자들을 관리하느라 의료진의 노동강도는 점점 높아진다. 결과적으로 병원의 질은 현저히 떨어지고 만다. 과도한 밀집에 강도 높은 스트레스, 바이러스가 활동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구비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이런 식의 의료체계를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환자들 역시 병원의 한계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건 시설과 시스템 자체가 아니라 그 배치와 용법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사스건 메르스건 어차피 완벽한 백신은 불가능하다. 감기를 치료하는 약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면역력이 관건이다. 면역력은 의료적 수치와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다. 동선과 체질, 나이와 절기 등에 따라 각자 다르게 구성되는 공생의 패턴에 가깝다. 말하자면, 의식주를 비롯하여 일상 전반을 조율할 수 있는 ‘자기 배려’의 능력이라고나 할까. 방역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전염병이 아무리 휩쓸어도 일상은 계속되어야 한다. 지진의 잔해와 전쟁의 포염 속에서도 삶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바이러스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그리고 이번에 통렬하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메르스로 인해 시장이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재래시장과 백화점이 닫히고 여행과 관광업, 식당과 해수욕장 등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말하자면 자본의 역동적 흐름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이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사람들이 마음 한번 바꿔먹으니 국가도 자본도 속수무책이다. 거꾸로 말하면, 자본의 배치와 사회적 구조를 개혁하는 것도 마음의 흐름에 달렸다는 뜻이 아닐지. 아무튼 마음은 정말 힘이 세다.

이처럼 메르스는 아주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 전반에 대하여 심오하고도 다양한 질문을 던져준다. 바이러스는 결코 적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일부이자 우리 안의 타자(他者)다. 그러므로 작금의 사태를 메르스라는 타자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이러스야말로 지적 상상력, 철학적 비전, 문명적 대탐사 등을 가능케 하는 역동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고로, 메르스가 후딱 지나가기만을 바라지 말고 냉철하게 주시할 일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의 안과 바깥,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영화 ‘괴물’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괴물과의 사투 끝에 딸을 구했지만 딸은 이미 숨졌고, 대신 딸과 함께 납치되었던 소년이 구출되었다. 그토록 엄청난 고난을 겪었지만 주인공은 한강 둔치를 떠나지 않은 채, 그곳에서 다시 일상을 꾸려간다. 소년과 함께 흰쌀밥을 푸짐하게 먹으면서. 그럼 괴물은 이제 영영 사라졌는가. 그럴 리가 없다. 괴물은 또다시 귀환하리라.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이제 주인공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 무엇보다 눈빛이 달라졌다. 문득 괴물의 낌새가 느껴지자 정면을 또렷이 응시하는 강렬한 눈빛. 이것이 바로 면역력의 정수다.

그렇다. 바이러스는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하여, 메르스가 종식되어도 바이러스는 언젠가 때가 되면 귀환할 것이다. 전혀 다른 이름과 모습으로. 그때 역시 백신은 없으리라. 왜냐면 바이러스의 변형은 늘 인간의 기술보다 한 발 앞서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바이러스와의 ‘밀당’은 인류가 숙명적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피할 수 없다면 마주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의연하게 담담하게.


(2015.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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